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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선안] 종이꽃 제33편
형수의 곁에 막 벗어난 정호는 못내 착잡함을 느낀다. 그 어두운 밤에 덮인 거리를 정처도 없이 거닐어본다. 형수의 의지를 눈으로 보았음에도 일말의 의심은 가셔지지 않는다. 이제 막 전쟁의 회오리에 벗어난 후유증에 허덕이는 시국도 시국이지만, 일말의 보호자로서 의무를 소홀히 하였다는 죄책감이 그 주위를 맴돌고 있다. ‘연심이가 하루라도 빨리 돌아와준다면.’ 내심 기대도 걸어보기를 수차례. 야속히도 연심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를 두 달. 어느 날 최 내과 병원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때는 정호가 왕진을 간 뒤였으므로 간호사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간호사가 몇 마디를 묻더니 묵묵히 메모지를 찾아 적어대기 시작한다. 간호사의 오른손에 쥐여진 펜은 움직이며 서서히 윤곽이 드러났고 그 메모지에는 서형수 이름 석 자와 함께 연심이의 신변에 대한 내용으로 급한 사정을 적어 놓았다. 간호부는 이윽고 수화기를 내린 채 메모지 한 장을 뜯어 최정호의 집무실 책상-정확히는 진료실 책상 위에 놓는다. 간호부의 눈에는 의혹의 시선이-곱지 않은 시선이 감지되었다. 경찰에서 연락이 온 것이 석연하지 않았고, 어떤 여자의 행방과 관련하여 연락을 했다는 것에 꺼림칙함을 느끼고 있다. 이윽고 원장이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선생님, 서대문경찰서 서 순경이라면서 원장님 오시면 바로 연락을 해달라고 하더군요.” 간호사의 말을 듣기 무섭게 시계를 바라보니 오후 두 시. 왕진한 환자의 집에서 밥을 먹는 융숭한 대접을 받고 온 터다. “가서 일 봐요.” 수고했다거나 알았다는 말이 없고 그저 무뚝뚝하게 대하는 원장의 태도에도 그러거니 하며 간호사는 웃어넘긴다. 백의의 천사답게. 정호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적시고 있다는 걸 감지했다. 마치 비밀이 들킨 사람처럼 말이다. 치부에 들킨 사람처럼.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목소리를 가다듬고 수화기를 댄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누른다. 메모가 되어 있는 전화번호로. 수신음이 울리는 동안 말이 안 나올까봐 조마조마해대면서. “네, 서형수입니다.” 순간 정호가 안도해하며 연심의 이야기를 물었다. 형수의 말에 의하면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갔다는 얘기가 전부였다. -부산! 이곳에는 연심의 부친이 계셨으나 병원에서 딸의 간호를 받으며 몸져눕고 있었다. 그나마 연심의 여윳돈을 가져왔기에 아버지의 치료비는 감당할 수 있어 가능했다. 연심은 아버지의 병구완을 묵묵히 해내었다. 그러나 연심 아버지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갔다. 죽음이 임박해온 것이다. 이*들아! 이*들! 하며 전쟁 통에 시달렸던 인민군의 망상에 한참을 서성였다. 망상보다는 섬망(妄)이랄까. 이를 보던 연심은 눈물을 흘렸다. 서서히 임종의 때가 오고 있는 것이다. ‘아, 하느님 아버지! 이 불쌍한 영혼을 돌보소서.’ 연심의 두 볼에 뜨거운 눈물이 넘쳐흐른다. 울컥한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오르지만 연심은 묵묵히 참는다. 아버지가 연심이에게 왜 우느냐고 짜증을 냈기 때문이다. “이것아 왜 울어!” 임종을 눈앞에 둔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는 “장 서방 잘 있어?”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하고 “장 서방 안 와?” 하면 그이는 출타중이라고 답했다. 제 육신을 보전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가득했지만 초지일관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연심이 부산에 왔을 때 동네 사람들이 모여와서는 연심이의 앞날을 걱정해하며 삼 개월 밖에 살지 않는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고 알려주었다. “에고, 이를 우얄꼬.” 그 중에서 칠숙이네 큰 딸인 칠숙이 흐느끼는 것이다. 이제 막 시집을 간 그녀는 동기의 슬픈 일을 누구보다 위로해주기도 했고 지지해주기도 했다. 어머니와는 다르게 고지식하지 않고 매우 착한데다, 잔재주가 많아 여러 아낙들에게 도움을 주는 순진무구 그 자체였다. 그런 칠숙이 내외의 도움으로 부산에서 가장 큰 병원에 병든 아버지를 모신 거다. 그 고마움을 어떻게 전해볼 새도 없었다. 그저 눈물로 지새운다. ‘불쌍한 우리 아버지.’ 그 말밖에 되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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