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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선안] 종이꽃 제32편
정호가 생각에 골몰하는 사이에, 찬모(饌母)가 문을 두드리며 “선생님, 진지 잡수세요.” 하며 기척을 냈다. “아 알겠어요.” 찬모 석돌이 엄마의 기척을 느끼고 벽시계를 바라보니 날은 어두워졌고 시각은 여섯시 사십분을 가리켰다. 서둘러 방을 나왔다. 정호의 집은 이층집으로 된 양옥이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 만든 집이다. 계단을 내려가 보면 오른편에 식당이 자리해 있다. 석돌엄마의 손놀림이 매우 분주하다. 석돌이네는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최씨네를 극진히 돌봐온 일가였다. 해서 전쟁이 끝나서도 일가붙이가 없던 관계로 최씨네를 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하는 사이였다. 남편인 서복동은 정호의 병원에서 대소사를 담당하는 직원이었다. 그 덕분에 아들인 석돌이는 초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중학교 이학년에 접어들었다. 석돌이 엄마가 물러간 뒤 최씨네 식구들만이 남아 저녁식사를 들었다. 그런데 정호의 낯빛도 좋지 않은 데다 저녁을 드는 둥 마는 둥 하는 걸 보던 최 영감이 한 마디를 한다. “이애, 정호야. 무슨 근심이 있는 게냐?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으니.” 갑작스런 아버지의 물음에 정호는 얼떨떨해하였다. “에, 예?” 소스라쳐 놀라는 모양을 보던 아버진 더는 묻지 않는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한다. “아, 아닙니다.” 대답하고 난 정호는 허겁지겁 밥을 먹는다. 아들이 전보다 더 생각하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는 최 영감의 심정은 뭔지 조짐이 좋지 않음을 느낀다. 근래에 연심을 만나고 난 뒤부터 행동거지가 수상함을 말로는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그 신변에 좋지 않은 것이 있음을 무엇보다도 직감하는 최 영감이었다. “아유, 정호야. 왜 그렇게 깨지락거리니. 보기가 좋지 않구나.” 윤씨부인이 옆에서 잔소리를 해대니 정호는 그예 “저 그만 먹겠습니다.” 하고 일어나버린다. 동생 민우는 형의 모습을 보는 둥 마는 둥 제 몫의 밥을 묵묵히 먹어댈 뿐이다. 그 외에 정호의 양친과 정호의 마누라는 식당을 나서는 정호의 뒷모습을 묵묵히 쳐다볼 뿐이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정호는 불을 키지 않고 어두운 방 안에서 묵묵히 생각하는 것이다. 정호 자신에게도 배우자가 있다. 이름은 윤여희(尹如姬). 이화여대(梨花女大)를 나온 수재 중의 수재라는 것 때문에 마지못해 결혼한 사이였다. 그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그러나 정호 자신은 애정이 없는 사랑이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오래전부터 총독부의 관료로 지내기도 했고 또 남작 작위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더러 듣기도 했었다. 그런 집안 내력도 내력이지만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는 것 때문에 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까지 자신이 숫총각으로 늙어버릴 수 없다는 종가의 강권에 의해 행한 결혼이었다. 그걸 고려해본다면 정호 자신은 매우 비참하기 한량없음을 절감하게 된다. 마누라 있는 몸으로 몰래 자신의 옛 정인을 찾아가는 것 자체로도 큰 잘못으로 여겨지는 세상의 따가운 시선. 그 시선을 감수하며 찾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내면 깊이에 잠재된 부채의식이 한몫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속내를 알 턱이 없는 부인과의 사이에 자식은 없다. 하마터면 속으로 동정녀(童貞女)로 살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우스갯소리를 들어야 하냐며 부인이 넋두리를 늘어놓을 때 정호는 그냥 침묵만으로 방어하였다. 자신만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다. “들어가도 되요?” 여희의 상냥한 말에 “들어오오.” 대답하였다. 문이 열리고 여희는 따뜻한 찻잔을 내밀었다. “홍차(紅茶)예요.” 부유한 처가의 내력답게 여희는 영국제 홍차를 손수 끓여 남편의 앞에 내민다. 자신의 사촌오빠들이 외교관으로 나간 까닭에 쉽게 외국제 물품들을 사들이는 데 이골이 나 있다. 그걸 묵묵히 받아들고 정호는 홍차 한 모금을 마셔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것이 정호의 마음이다. ‘연심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따끈한 찻잔을 들고 마시는 자신의 현실을 헤아리지 않고 오직 연심이에 대한 행방만을 생각하고 있다. 여희와의 결혼생활도 그에게는 만족보다는 피곤함이 몰려올 뿐이었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남편과의 사이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부모가 이를 중재하고자 노력하였으나 무산되었다는 것이다. 정호는 단지 동정에 의해 베풀어진 행위였을 뿐이었지만 그것이 장준창의 뇌리에는 불륜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이들의 관계를 간통(姦通)이라는 의심을 쉽게 벗어던지지 못하는 것이 이 나라의 보수성이 아닌가. 다음날 정호는 다시 그 동네를 찾았다. 연심의 옛집으로. 그러나 연심의 행방을 모르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해서 생각해낸 것이 서형수였다. 서형수와 자신의 집과는 거리상으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동네에서 가끔 인사를 하는 정도의 안면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생각 끝에 찾아왔건만 안주인인 광숙이 의외의 사람이 온 것에 매우 놀라며 무슨 용무로 왔느냐 묻는다. 이에 정호는 “저 최연심이라는 사람을 아시는지요?” 묻는다. “네. 제 동네 친구였지요.” 광숙의 대답에 정호는 차마 무어라 말하기 어려워한다. “연심이한테 무슨 좋지 않은 신변이 있었나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연심 씨가 집을 나갔다는군요.” 별안간 무슨 소리인가 하고 광숙은 놀란다. “집을 나갔다고요?” “......” 대답이 없는 정호를 광숙은 묵묵히 지켜볼 따름이다. “그럼 그 일 때문에 저희 집에 찾아오셨나요?” “그렇긴 합니다만 서형수 씨의 근무처(勤務處)가 어딘지 알고 싶어서요.” 머뭇머뭇 정호는 광숙에게 물어보았다. “아, 우리 그인 얼마 전에 서대문경찰서 관내인 충정로 파출소로 발령받았어요.” “혹 연심 씨에게 연락을 받아보셨는지.” 계속 묻는 말에 불쾌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광숙은 그이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묵묵히 경청하고 대답할 따름이다. “연심이한텐 한 달 동안 연락이 없었어요. 그러잖아도 그이가 그걸 두고 안타까워하더군요. 그래서 그이가 행연 연심이의 행방이 묘연한 것이 아닌가 해서 궁리하고 있는 눈치던데. 그쪽에서도 연락이 없다고 한다면......” “그렇군요. 공연히 실례가 많았습니다.” 총총히 광숙의 집을 나섰다. 광숙의 말에 따라 충정로 파출소로 걸음을 옮긴다. 근처에 전차를 잡아타고 서대문 사거리 안에 이르러 충정로 파출소를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긴다. 파출소가 눈앞에 보인다. 순간 정호는 걸음을 멈췄다. 저곳이 어쩐지 꺼림칙한 곳으로 다가왔다. 잘못하면 제 자신이 간통죄로 걸려들어 감옥에 갇힐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심리 때문이다. 내 본의가 이렇듯 타인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왜 짐작하지 못했을까. 정호에게는 당연한 도리로 생각한 것이 저 사람에게는 왜 부담으로 다가왔을까. 큰 죄책감에 휩싸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불문곡직하고 기왕에 나선 김에 파출소로 들어가자는 마음을 가지고 돌진하듯 찾아간다. 파출소의 문을 열고 들어 가보니 나이 젊은 경찰 한 명이 서류를 살피며 업무를 보고 있었다. “저 실례합니다만.” 경찰이 정호의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네, 무슨 용무로 오셨나요?” 물어본다. “혹시 서형수 경관님이 이곳에 계신지요.” 그러자 “아, 서 경관은 지금 자리에 없는데요. 근처에 순찰을 돈다고 하며 방금 나서긴 했습니다만 자리에 앉으시면서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경관이 순순히 정호를 응접실로 안내한다. 푹신한 소파가 양쪽으로 마주보게 배치되었고 그 가운데에 낡아 보이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외모도 준수한데다 정직해 보이는 이 사람을 안내하는 경찰이 오히려 깍듯한 것이 부담스러울 따름이다. 그때 마침 순찰을 돌고 온 서형수가 모습을 드러내었고 경찰이 손님이 왔음을 알리자 부리나케 이 말을 듣고 응접실로 들어섰다. “아니, 저를 찾으셨다고요?” 형수가 인기척을 냈다. 그러자 정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 바쁘신 분을 공연히 폐를 끼쳐서 어쩌죠.” “아니요. 천만에.” 형수는 편히 앉으라며 손짓을 하였다. 순순히 정호는 자리에 앉았다. “다름이 아니라 최연심 씨의 일로 이리 오게 되었습니다.” “아, 그래요?” 형수는 반색을 표한다. “실은 그것 때문에 수소문을 해보기는 합니다만 도통 행방을 찾기가 매우 어려워서요.” 골치를 앓는 표정을 하는 형수를 정호는 묵묵히 바라보기만 한다. “수소문을 하고 알아낸 게 있는데 하도 기가 막혀서.” “......?” “장준창 그 사람이 정신병을 앓고 있더라는 겁니다.” “네?” 정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요즘 법상으로는 이혼이 성립이 되기 어려움도 있다고 하는데다, 민법 자체가 매우 모순된 부분이 많이 있던 까닭에 쉽사리 이혼을 권하기가 매우 난감하더군요. 재산을 관리하는 것이 오직 남자의 몫이라는 법률상의 규정도 있다고 하고 난색들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섣불리 이혼을 하기가 어렵더란 거죠.” “......” 정호는 제 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자 형수가 이를 보고서 앞에 놓인 성냥갑을 꺼내어 성냥개비로 불을 붙인 뒤 정호에게 담뱃불을 붙여준다. “고맙습니다.” 정호는 묵묵히 담배를 빨며 묵묵히 듣는다. “제가 아는 지인 중 선배 한 분이 변호사를 하는 이가 있기도 해서 알아보기는 했습니다만 그 사람의 의견을 듣고 이리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 “그리고 직접 찾아오셨고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앞으로 몸조심을 각별히 하셔야할 겁니다. 만에 하나 연심 씨 시댁에서 이를 눈치 채고 다시 해코지하려고 벼른다는 소문이 들립니다만,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제가 아무리 경찰관의 신분으로 있는 몸이라지만 감당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고 각별히 몸조심을 하셨으면 합니다.” 그때였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정호는 “알겠습니다. 서 경관께서 앞으로도 연심이를 찾아주실 줄로 거듭 믿겠습니다. 연심이는 아시다시피 고명딸로 태어나 혈혈단신으로 있는 가엾은 아이입니다. 그 아이를 꼭 찾아주십시오. 연심이의 행방이 밝혀진 대로 꼭 연락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서형수에게 부탁하고 황급히 파출소를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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