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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선안] 종이꽃 제27편
옥선이 이사하는 날이 다가왔다. 이른 아침부터 황학동(黃鶴洞)에 있는 광숙이네 집은 분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착실한 이미지의 남편 서형수(徐炯秀)가 마당에서 속옷 바람으로 수건을 목에 걸친 채로 나와 세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광숙은 부엌에서 따뜻하게 데운 물을 담은 물통을 낑낑대며 가져와서 세숫대야에 한가득 들이붓는다. 남편은 그 물로 세수한다. 광숙은 남편의 옆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아직 신혼인 것도 있겠지만 이들은 서로가 금슬이 좋았다. 친정아버지를 모시자고 남편이 제의하였기도 해서 차린 살림집. 비록 살림은 단출하지만 이 순간만으로도 행복함을 느끼는 것이다. 따스한 가정을 유지하기만 하면 여한이 없는 것이다. 소박하다면 소박할 수도 있고. “저기.” 세수를 다 마치고 얼굴로 수건을 닦으며 서형수가 물었다. “네.” “연심 씨가 오기로 했어?” “네.” 안 좋은 일로 처음 부딪힌 연심이었던 만큼 안타까움에 몸 둘 바를 모르는 것이다. 그랬는데 연심이가 혼자 온다는 말을 차마 못하는 것이다. 뭐 남정네가 다 필요로 하지는 않겠지만 간단하게나마 수레를 하나 구해다놓았다고 하니 믿어보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부부는 아침에 밥을 먹고 밖으로 나왔다. 이들은 근처에 흐르는 청계천(淸溪川)을 끼고 걷다가 다리를 건너 동대문 정류장으로 향한다. 정류장에 도착한 뒤 그들은 혜화동 방향의 전차를 올라탄다. 차로 다니는 것이 편하겠지만 이들은 항상 시내에 볼일이 있을 때면 전차를 탄다. 전차가 혜화동에 다다르자 이내 내리고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있는 연심의 집에 당도했다. 집에 당도하자마자 밖으로 나오려는 연심을 맞닥뜨렸다. “아유, 그러잖아도 들어가려던 참이었는데.” 광숙은 연심에게 무안함을 느꼈다. “괜찮아. 집에 아무도 없는걸.” “안녕하십니까.” 서형수가 인사를 했다. 그러자 연심이 난처해한다. 경찰관으로서의 서형수와 일반인으로서의 서형수. 괴리감을 느낀다. 그러나 공(公)과 사(私)는 엄연히 존재하는 법. 연심은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된 듯싶지만 서형수는 묵묵히 받아들인 눈치였다. 세 사람은 혜화동로터리 쯤에 다다라 택시를 잡아탄다. 세 사람은 택시를 타고 옥수동으로 향했다. 옥수동 입구에 다다랐을 때 이미 점심시간이 되었다. 입구 앞에서 마중 나온 희진은 세 사람을 대동하고 집 앞에 다다랐다. 이들이 다다랐을 때 집안에서는 점심 준비를 하느라고 분주했다. 간만에 화기애애하게 가정의 분위기가 좋았다. 그때 화욱이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제 오십니까. 어머니께서 밥을 준비하시고 계십니다.” 순간 광숙과 연심이 놀라며 반긴다. “이게 누고, 화욱이 아니가. 잘 있었나.” 화욱이 머쓱해하였다. 이때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다 마친 듯 “화욱아 와서 밥상을 들이거라.” 옥선의 새된 소리가 들렸다. 옥선은 밥상을 직접 들고서 방에 들이려 하자 화욱이 달려가서 어머니가 들고 있는 밥상을 물려받아 집안으로 들인다. 옥선은 앞치마를 둘렀다. “아유, 어서들 와.” 광숙이 일행을 맞이한 뒤 “목이 빠지게 기다렸지 뭐야. 목이 하마터면 사슴 목이 될 뻔했어.” 옥선의 말에 세 사람은 킥킥 웃었다. “언니, 세간은 어쨌수.” 광숙은 새삼스럽게 스스럼없이 대하며 집안을 둘러본다. “집안에 가구며 옷장들은 모두 새로 사다 들여서 새집에 놔뒀고. 이제 세간만 나르기만 하면 되네.” 그리고서 갑작스레 낯선 남자가 와 있음을 알고 옥선이 “이거 공연히 남정네를 찾아오게 해서 어쩌나.” 부끄럼을 타는 것이다. “언니, 뭘 새삼스레.” 광숙이 까르르 웃어댔다. 연심은 쓴웃음만 띨 뿐. “그래, 희진이는 여기다 내팽개치구 그러면 어떡하시겠다는 거요?” “요 며칠 전에 셋방을 놓기로 희진이랑 상의했어.” 이제 화욱이는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간다고 했다. 금년에 유치원을 다니고 할 법하건만 경제적 사정으로 유치원에 보낼 처지가 못 되는 거다. 하지만 그동안 보육원에서 신세를 진 덕분에 그나마 한글은 물론이고 산수도 깨우칠 수 있었다하니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모른다. 해서 옥선은 아들을 잘못 돌본 죄책감에서 벗어난 것이다. 부산에 있을 때 두세 살 난 아기였는데 이렇듯 자라서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다니 격세지감은 들 법 했다. “그럼 언니는 그렇다 치구 화욱이는 누가 돌보는지.” “화욱인 따로 보모를 둬서 돌볼 생각이야.” 일행들을 위해 차려놓은 밥상. 두런두런 밥상에 모여서 맛나게 먹는다. 밥을 다 먹을 때쯤 되어서일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주머니 계세요.” 밖에 젊은 남자가 소리치는 것이다. 희진이 문을 열자 “아이구, 짐들은 다 챙기셨죠?” 하는 것이다. “네.” 희진의 대답에 남자는 집에 들어섰다. 뒤이어 중 늙은 남자도 들어왔다. “아주머니.” 이때 옥선은 버선발로 남자를 맞이했다. “어서 오쇼.” “짐꾼들은 구하셨어요?” “짐꾼이랄 게 뭐 있수? 잡동사니만 챙기면 되지.” 옥선은 히죽 웃어댔다. “아이구, 이제 슬슬 준비해야겠군요.” 서형수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다. 두 여자도 일제히 일어섰다. 희진은 “화욱이 나갈 준비됐니?” 하며 조카에게 물었다. “응, 이모.” 조카가 대답했지만 아쉬워하는 표정이다. 그러자 희진이 조카에게 다가간다. “왜?” 어리광부리듯 화욱은 고개를 숙이고 말을 못한다. 그리고는 희진의 치맛자락을 꼬집듯 잡는다. “이모하고 헤어지기 싫어.” 눈도 못마주치는 화욱이 그러자 희진은 품에 껴안았다. 보라색 물방울을 새긴 흰 드레스 치마를 잡는 화욱이의 눈동자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어유, 어리광은 왜 부려.” 희진은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때였다. 밖에 나온 연심인 깜짝 놀랐다. 남자는 갑작스럽게 연심을 보더니 낯빛이 변했다. “아, 아니.” 두 사람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연심은 “저, 혹시.” 남자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 “최씨네……” 말을 잇지 못했다. “연심이?” 남자는 놀라는 표정이었고 연심은 갑작스러운 일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그래, 나 최씨네, 큰오빠다.” 연심은 “아, 안녕하셨어요.” 당황하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인사를 했다. “언니, 아는 분이셔요?” 희진이 이들을 바라보며 묻는다. “응, 고향에서 아는 사람.” 연심이 대충 대답했다. ‘이렇게 살아있다니 정말 다행이다.’ 남자는 한시름을 놓았다. 최정호, 그는 육이오전쟁 직전에 몰살당한 최진사의 당질(堂姪) 되는 사람이었다. 한때나마 정혼한 사이였던 최진사의 아들을 잃은 뒤 최씨 집안과의 소식이 단절되었으리라는 생각을 했던 연심으로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연심은 최정호에게 안부를 물었다. “어, 어르신은 잘 계시죠?” 약간의 전라도 억양을 가지고 최정호에게 안부를 묻는다. 어르신이란 최우공 영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최우공과는 이웃사촌처럼 드나들며 지내던 사이였었다. 때문에 최씨네 두 형제와도 스스럼없이 지내기도 한 사이이기도 했다. “응, 정정하시다.” 희진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도 모른 채 옥선이 광경을 보더니 “어유, 내 깜빡했다. 저 사람이 우리 집에 세 들어 산다고 해서 이리로 오기로 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지 호주머니를 손을 넣어 뒤지더니 연심에게 명함을 내미는 것이다. “나중에 이리로 연락하렴.” 연심은 묵묵히 명함을 받아들었다. 명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崔內科醫院 院長 崔定護. 住所 서울 城東區 新堂洞 二三六番地. 電話 22-6485.’ 부끄러운 일을 당한 것 같이 느껴,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있었지만 연심은 이내 참고 묵묵히 받은 명함을 품에 있는 지갑을 꺼내어 고이고이 보관하는 것이다. 뒤이어 이삿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짐은 크고 작은 채로 네 개였고, 어디서 구해다 놓았는지 트럭 한 대가 집 앞에 와 있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짐을 나르고 한 끝에 옥선이와 광숙이 내외 그리고 연심이만 트럭위에 올라타고 정호와 희진은 마중을 나가는 꼴이 되었다. “이모,” 칭얼대는 조카를 희진이 안으며 배웅하였다. “가서 잘 살아야 돼. 엄마 말도 잘 듣구.” 조카의 등을 토닥이며 아쉬움을 달랬다. “응.” 이윽고 정호도 이에 못지않게 “화욱이, 나중에 네 집으로 놀라가도 되지?” 삼촌처럼 스스럼없이 대한다. “네!” 화욱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정호는 제 품에서 지전 한 장을 꺼내주었다. 화욱은 두 손으로 받았다. 그러자 정호가 화욱을 트럭 위에 들어 올리자 형수가 이를 받아 트럭 위에 앉혔다. “화욱이 잘 가.” “화욱아 잘 있어.” 제각각 이모와 이웃에 살던 삼촌이 인사를 하는 것이다. “언니.” 이내 희진은 울먹였다. “응.” “도착하면 연락해주.” “응.” “아주머니 안녕히 가십시오.” 정호도 인사를 한다. “그동안 잘 지내셔요.” 같은 서울 하늘 아래지만 멀고먼 거리는 어쩔 수 없다. 이윽고 트럭은 출발했고 두 사람은 트럭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트럭 안의 사람들도 흔들었다. 출발하는 트럭 위로 뜨거운 태양열을 뿜으며 석양이 지고 있었다. 그 석양빛을 받으며 트럭은 묵묵히 달리고 있었고 트럭이 사라질 때까지 두 사람은 묵묵히 손을 흔드는 것이었다. 해가 질 때 되어서 최정호는 집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아버지의 방에 들어와서 문안을 드리고 말했다. “아버지, 오늘 연심이를 보았습니다.” 마치 생소한 이름을 들은 듯 우공 영감은 다시 말해보라고 재촉했다. “연심이를 보았습니다.” 그러자 “연심이 살아있단 말이냐.” 울먹이듯 말하는 것이었다. 정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최우공 영감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른 채 멍하니 있더니 큰아들이 물러가자마자 방안이 떠나가라 대성통곡하는 것이다. “아이고, 형님!” 방안에서 통곡하며 우공 영감은 그동안 잊었던 최남신 영감의 명복을 다시금 비는 것이다. ‘형님, 이제 편히 눈을 감으시오. 연심이가 살아있습니다. 살아있어요.’ 갑자기 때 아닌 통곡소리가 들리자 윤씨가 큰아들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이게 웬 곡성(哭聲)이냐.” “어머니, 연심이가 살아있습니다.” “뭐?” 꿈이냐 생시냐는 듯 어머니는 아들에게 눈으로도 물어보는 것이다. “서울에 있습니다.” 그제 서야 안심하듯 윤씨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끄덕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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