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안] 종이꽃 제24편
다음날 송의원은 새벽 일찍 집을 나선다. 초량동 판자촌 내리막길을 힘겹게 내려간다. 피곤한 몸은 천근만근 무겁게 느낄 법도 하지만 묵묵히 힘겹게 내려갈 따름이다. 집을 나선 그는 가까스로 내리막길을 다 내려간 뒤 차도를 끼고 묵묵히 걸어간다. 송의원에게는 장성한 자식들이 있었다. 그들은 부산에서 같이 살았으나 전쟁이 끝나고 환도할 시점이 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세복은 자식들의 뜻에 따라 서울에 올라갈 생각은 없었다. 다시는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이 서울이기 때문이다. 서울은 송의원에게는 아픔의 고장이기도 했다. 대대로 어의로서 명성을 얻은 조상의 뜻에 따라 한의사가 되었으나 나라가 기울고 나니 한때나마 누렸던 음덕(蔭德)이 돼지우리에 던져지는 먹이로 전락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래서 송의원은 삼 년을, 젊은 시절을 산속에 은둔하며 허송세월로 보낼 뻔했다. 삼년이 지나 서울에 이르러 명색이 한약방이랍시고 열었다. 그런데 총독부 치하에 있는 상황에 처해지다보니 면허자격이 없고 불법으로 시술했다는 것을 구실삼아 재판에 넘겨지기도 했다. 그래서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처넣어서 간신히 벌금을 물었다. 그래서 일말의 희망마저 버린 채 한의사로서의 길을 나무막대기 분지르듯 끊어버린 채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랬지만 전쟁이 터지고 부산에 피난을 오고 보니 먹고 살 길이 막연했다. 그래서 근심이 끊일 새가 없었는데, 이 년 전부터 한약방 근처에 있는 성당을 다니는 사람이 직접 찾아와 자신의 교우(敎友) 한 사람이 한의원을 운영하는데 그 사람의 몸이 불편하다고 하여 한의원을 꾸려가기 힘들다고 했기에 그에게 직접 운영해보는 것이 나을 거라고 얘기하더라는 거다. 그리고 면허증(免許證)을 따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니 염려할 이유가 없다고 하며 송의원에게 직접 한약방을 운영하는 것이 어떠냐며 종용(慫慂)하였다. 처음에 송의원 마누라는 반대하고 나섰으나 송의원이 집안의 체면도 생각해야 한다며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성당에 다니는 한의사를 찾아가 면허를 따는 방법을 터득한 뒤 명실 공히 한의사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원래의 자리를 되찾았다. 그 기쁨을 한 아름 안은 채 남포동(南浦洞)에 자그마한 한약방의 주인이 되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 길조차 없이 이렇듯 자주 한의원을 찾아가는 것이다. “으이구 저놈의 영감탱이, 저렇게 좋으실까.” 반대하던 마누라는 쓴웃음을 띠며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서울에 있는 큰아들 세복(世福)이, 이 소식을 듣고 반가운 마음으로 잘 되었다는 식의 말을 보내었고 아버지의 앞길을 응원한다며 격려하고 있었다. 큰아들 세복과 작은아들 석주(石柱)는 모두 처자와 함께 서울에 있었고 각각 은행원(銀行員)과 호텔 조리사(調理師)로 일하였다. 세월이 유수같이 흘렀기에 송의원에게는 더없이 무난한 세월이다. 그럼에도 한약국을 연다는 것은 자식들에게 더 이상 손을 벌리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한약국 앞의 길목은 한산했다. 날씨도 쌀쌀한 것도 있지만 아직 근처 시장이 열지 않았기에 사람의 온기가 없기도 하다. 영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약국의 문을 열었다. 이 문을 열게 해 준 정 서방의 고마움을 항시 잊지 않고 있다. 정 서방이 그에게 해준 말이 있다.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듬뿍 받은 사람인가 보오. 이렇기 살아서 공덕을 쌓고.’ 사람의 얼굴은 항상 너그러웠고 평화로운 모습 그 자체였다. 정 서방이 한때 초량동 판잣집 근처에 과일가게를 꾸렸던 일이 있었다. 마누라와 같이 성실하게 살다가 딸 마리아가 성당에 다니는 남편을 만나 시집을 가고 나서부터 그 평화로움을 즐기는 것이다. 정 서방 집의 신심은 매우 독실했다. 항상 빠짐없이 미사에 꾸준히 참례를 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두 아들 철수(哲洙)와 철영(哲英)을 결코 험한 세상에 나가서도 꿋꿋하게 잘 산다면 여한이 없다는 식이다. 열여덟에 결혼하여 맏이 마리아를 시집보내고 두 아들을 뒷바라지 하고 있다. 두 아들은 각각 고등학교 중학교에 다니고 있다지만 학비가 빠듯해도 틈틈이 공부를 잘한다 하여 성당 교우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놓은 장학금으로 근근이 학비를 보태고 있으니 송의원의 눈으로서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걸 고마움으로 생각하며 정 서방이 한약국을 차리는데 보태준 것이 오히려 송의원에게는 분에 넘친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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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정병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