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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선안] 종이꽃 제18편
매청의 집에서 한바탕 상사를 치른 뒤 가뜩이나 간신히 남쪽 끝이나 다름없는 부산 땅에 내려왔건만 선산이 충청도 땅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덕쇠네 식솔들을 거느리고 무덤을 마련하여 묻게 되었다. 삼일장을 치른 장례였고 시끌벅적한 나날이었다. 영감의 시신이 담긴 관(棺), 아니 아로새긴 명정(銘旌)의 붓글씨가 지워질 것 같은 기세로 흐느끼는 매청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그와의 사이에 자식을 두지도 못했고 홀로 살아가려니 앞이 캄캄해져 옴을 느낀다. 야속히도 매청의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산새는 멀리서도 뻐꾹뻐꾹하며 구슬피 지저귀니 눈물은,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매청은 영감의 상을 치른 뒤에 제 어머니에게 부산 집에 살게 하고 자신은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올라간다는 편지를 남기고 덕쇠아범을 시켜 부산으로 곧장 내려가게 했다. 덕쇠아범의 품에서 편지를 받아본 매청 어미의 눈에선 굵은 눈물이 흘러나온다.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넘친다. 옷소매를 잡다 못해 행주치마를 걷어 눈물을 훔친다. “이 망할 것. 그예 서울로 올라가? 이 망할 것.” 투덜대듯 매청 어미는 편지를 접는다. 매청이 서울로 올라온 것은 나흘 뒤의 일이었다. 서울역에 당도한 매청은 새로운 느낌의 서울을 바라보았다. 아니 마주쳤다. 영감과 같이 기 쓰다시피 하여 내려간 피난살이에 무정히도 돌아섰던 서울이었다. 그런 서울을 다시 마주치니 새로운 기운이 싹튼 것을 느끼게 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을, 적들에게 훼철(毁撤)되었을 서울이었을 텐데, 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기도 전에 마주하게 되다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는 것이다. 영감을 보내고 난 매청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음을 생각하노라니 희망도 보이지 않고 새로운 길도 보이지 않는 것을 느낀다. 나는 아무것도 없다. 생각하니 자신 앞에 뿌연 안개로 얼룩진 어두침침한 거리가 눈앞에 보인다. 매청은 정처 없이 길을 거닌다. 주위에는 널따란 광장, 그 주위에서 손님을 기다리며 멍하니 앉아있는 인력거꾼, 서울역 앞에 전차가 멀찍이 남대문을 향해 지나가고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서울역 거리를 휘― 둘러본다. 그러다가 매청은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리다가 눈앞에 있는 인력거를 타고 어디로 가라고 이른다. 그리고 인력거를 몸에 싣고서 지나가는 거리를 둘러본다. 그녀가 찾아가는 곳은 다름 아닌 은실(銀實)이라는 이의 거처였다. 필동(筆洞) 3가로 방향을 틀었다. 남대문을 거쳐 명동, 그리고 퇴계로를 거쳐 필동의 변두리 집에 도착했다. 이 변두리 집은 문과 담장은 한옥에서 봄직한 것이었고 집안은 이층짜리 조그마한 양옥으로 되어 있었다. 얼마 전 미군 부대에서 잡화상으로 떼돈을 번 장 서방의 뒷배 덕분에 호의호식한다는 은실의 소문을 누군가가 알려준 덕분에 혹시나 하여 찾아본 것이다. 왜정 때는 별 소득도 없이 한량으로 나앉으면서 간간이 물지게를 나르던 볼품없는 북청(北靑) 출신의 물장수였다. 허구한 날 슬하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서 제때 돈을 대주지 않아 늘상 불만스러워했던 은실이 혼마치 인근에 다방을 차렸다. 은실은 매청이와는 다르게 쌓은 지식도 있고 여자전문학교 과정을 다 마친 인텔리 여성이기도 해서 말씨는 온전한 편이었다. 투박하기 한량없는 매청이는 배운 구석이 없기도 했고. ‘언니는 그예 호의호식하는 모양이구먼. 배짱 좋은 장 서방이 있어서 좋기는 하겠군.’ 행세는 다소 초라하기 이를 데 없기는 하지만 왕년에나마 잘 나가던 매청이었다. 그런 매청에게 있어 은실은 은인이나 다름이 없는 사람이다. 장 서방과 연줄이 닿아 은실을 알게 되었고 은실은 매청에게 기생보다는 카페에 여급으로 있는 것이 어울릴 것 같다며 말 속에 가시가 돋친 말을 해대곤 했었다. 자신보다 언니이기는 하나, 이미 두 아이의 엄마로 지냈다. 어째서 장 서방과 살림을 같이 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진작 30년 전에 장 서방의 사람됨을 보고 첫눈에 반해 아버지를 조르다 못해 자결이라도 할 작정으로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 터에 세상이 발칵 뒤집혀질 뻔했다. 이에 놀란 은실의 부친이 마지못해 허락을 하여 화려하게 예배당에서 결혼을 하지 않고, 제집에서 정화수를 떠다놓고 혼례를 치렀다. 그랬는데 하루아침에 장 서방이 개과천선하였노라고 하며 가뜩이나 화병으로 가득 찬 매청의 염장을 지르는 것이다. 집에 도착한 매청은 인력거꾼에게 잠시 기다리라 해놓고 큰소리로 “아무도 없소?” 동네 떠나가라 소리치는 매청이다. “누구요?” 안에서 기척이 일어났다. “나 부산에서 온 매청이라는 사람이오만.” 매청이 기척을 내자 안에서는 야단법석이 일어났다. “누가 왔다고?” “매청이가 왔다는 데요.” 나이든 여자 목소리와 젊은 남자 목소리가 오고가고 하더니 문이 벌컥 열린다. “아니 이게 누구야?” 새된 소리로 나이든 여자가 바라본다. “내가 누군지 알우?” “매청이지, 누구야. 하하하하……” 여걸이나 다름없는 웃음소리에 매청은 기생의 교태 있는 웃음을 풍긴다. 매청이 그에게 돈을 대달라고 하자, “그러면 그렇지. ××한다. ××해.” 킬킬대며 인력거꾼에게 삯을 준 뒤 보낸 다음 매청을 안으로 들인다. 덩달아서 남자도 같이 들어온다. 매청을 손님으로 모시게 된 은실은 어느덧 오십을 갓 넘은 중년의 여자가 되었다. 유흥업(遊興業)을 주로 한 은실에게 생전의 부친이 그 아까운 재주를 버릴 일이 있느냐며 발끈했지만 은실 여사는 내 할 몫은 하고 있을 테니 참견을 하지 말라며 엄포를 놓았다. 그러고는 연을 끊었다. 자식이 있는 몸으로 다방을 꾸려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때문에 때때로 갓 태어난 아들을 아랫것에게 업히고 키우도록 해놓고 버젓이 다방을 운영해나갔던 거다. 그런 애가 어느덧 장성하여 지금에 이른 거다. “이애 준창아.” 아들 장준창(張晙昌)에게 “네가 나가서 아버님을 모셔 와라.” 일러놓고 보내었다. “장 서방의 겉모습을 빼다 박아놓았으니.” 은실이 혀를 끌끌 찬다. “헌헌장부인가 보구려.” 매청이 대꾸하자 “헌헌장부면 뭐하나.” 은실이 암튼 안으로 들어가자고 재촉하였다. 방으로 들어갔더니 조그마한 응접실이 보였다. 그곳에 은실은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는 것이다. “네가 어쩌다가 이리로 왔는지 그 까닭을 알아야겠네.” 순간 이 대감의 죽음을 알려야 하는 비참한 현실이 마주치니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뜬금없이 눈물이 솟구치는 것이다. 영문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고 은실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왜 갑자기.” 눈물은 주체없이 흘러넘친다. 매청의 울음은 진종일 그칠 리가 없다. 울음이 솟구치는 순간 그녀의 뇌리에서는 영감의 본처 양씨(梁氏)가 자신을 향해 꾸짖는 소리가 귓가에 생생히도 들린다. ‘맹랑한 것, 영감을 꾀어다 살림을 차려놓고 재산을 냉큼 날로 삼키려고 들어? 이 맹랑한 것아!’ 그러면서 제 머리를 쥐어뜯던 여자의 앙칼진 소리는 매청으로 하여금 큰 상처로 남았음이다. 어쨌든 그 울음을 그치고, 간신히 그치고 난 매청이 영감의 죽음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은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영감탱이 잘 죽었지, 죽었어.” 매청의 흐느낌은 그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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