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병욱
[선안] 종이꽃 제17편
제5. 매청이 “어매요.” 매청(梅淸)이 제 어머니를 불렀다. 매청은 서울 살던 이 모 대감의 소실이었다. 전쟁이 터지고 나자 이 대감의 뒤를 쫓아 이곳 부산 땅으로 살다시피 하고 있는 처지다. 그런 그에게 이 대감은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 대감은 이제 나이 칠순이 넘었지만 타지에서 살고 있는 가운데 그만 병이 들어 자리를 누운 것이다. 그런 그를 근심 어리게 쳐다보던 매청이다. 때문에 친정어머니를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 대감의 본처는 전쟁 통으로 폭격을 맞아 죽고 자식들은 모두 인민군에 징집되어 생사를 알 수 없었지만 전쟁이 끝나기 막바지에 모두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참척의 고통을 겪은 이 대감은 단 한 가지 매청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와.” 매청의 친정어머니는 퉁명스레 대답한다. 말을 꺼내려다 곧 입을 닫아버린 매청. 매청은 정인이 내일 모레 생사를 알지도 못하고 누워있기만 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아야 한다는 현실이 너무나 고되는 모양이다. 기실은 이 대감이 죽은 뒤에 자신의 행보를 염두에 두고자 함이었지만 차마 영감 앞에서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다소나마 조심스러운 것이다. “말을 할라카믄 해라. 그렇기 꿍하니 있어 놓으믄 나중에 가서는 화병이 나는 벱이다.” “영감이 눈앞에 있어서 그러니 밖으로 나가서 얘기하입시다.” 영감의 눈치를 보랴, 어머니에게 하소연을 해야겠는데 좌불안석이 따로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서울에서 같이 동고동락하다시피 한 할아범을 불렀다. “덕쇠 아범.” 밖에 나이든 사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들어선 덕쇠 아범. 덕쇠 아범에게 매청은 영감 옆에서 잘 지키라고 당부한 뒤 어미를 데리고 밖을 나선다. 덕쇠 아범은 매청 어머니도 잘 아는 사이다. 매청이 소실로 들어올 때부터 이 대감이 따로 집을 마련하며 같이 붙여준 집사였다. 갓 칠순을 맞은 덕쇠 아버지 억쇠는 우직하지만 융통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맹한 사람이었다. 그 부인 되는 억쇠댁은 영감 못지않은 일자무식의 소유자다. 억쇠는 매청의 일거수일투족을 뒤에서 봐주는 눈치며 억쇠댁은 매청의 집 부엌에서 마님의 수발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하나 뿐인 혈육인 덕쇠는 솔가하여 외지에서 목공소에서 궂은일을 맡으며 생계를 이어가는 형편이었다. 매청 모녀가 다다른 곳은 뜻밖에도 가희진 언니가 운영하는 그 다방이었다. 이곳 부산 판자촌에서는 사랑방이나 다름이 없는 곳이었다. 시시때때로 심심하다싶거나 혹은 문학적인 감수성과 낭만에 심취하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었다. 어쨌든 이들 모녀는 구석진 자리로 자리를 잡은 뒤 영감의 사후 대책에 대해 의논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매도 보다시피 울 영감이 내일이 될지 모레 될지 장담도 못하고 그렇소.” “그래서.” “영감이 갑작스레 터진 전쟁 때문에 재산이란 재산은 다 팽개치고 내려오다시피 하고 하니 내한테 재산이 나오기를 하고 그렇겄소.” ‘그기 무신 걱정이라고.’ 매청 어멈은 한심스럽게 딸을 쳐다본다. ‘자식도 다 폭격으로 죽은 마당에 매청이 네가 따 놓은 당상으로 있는 재산을 다 얻어먹게 생깄는데 무신 근심이 그리 많노.’ 매청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은 아랑곳도 않은 채 “어매요. 나 참말로 미치겠소.” “와, 덕쇠네가 낼름 삼키갈 까봐 그러나?” “참말 미치겠소, 어매.” 어미는 여전히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의 대화가 차츰 익어가기 시작할 때, 마담 하나가, 그것도 가옥선 씨가 고용한 젊은 마담이 아리따운 미소로 노란 비단 한복을 단장한 채 두 사람에게 생수가 담긴 컵들을 놓는다. “언니들, 커피 드실 건가요?” 하기는 매청 모녀는 자매라고 할 만큼 세파에 비껴가는 미모들이었다. 기실은 매청의 어머니가 열일곱에 매청을 낳았기에 그랬으리라. “고히? 그거 쪼매 주소.” 고히는 매청 어미에게는 외래어나 다름이 없다. 영향을 받기론 일본에서밖에 받지 못한 까닭이지만 마담은 곧잘 알아듣는 눈치다. 어쨌든 매청 어미의 청에 응답하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매청에게 마담이 눈짓한다. 언니는? “나도 주소.” “네.” 왜정 때 유학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여학생들이 했음직한 히사시가미를 본뜬 것 같은 올림머리의 이 마담을 바라보는 매청의 눈길은 마냥 곱지도 않다.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걸 모른다드니 여시겉이 와 그러노.’ “영감님이 죽든지 살든지 내 알바는 아니다. 하지만 영감이 죽거나 하믄 네가 염려한 바를 잘 안다. 덕쇠네가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그 말이겠지.” 매청은 한숨 쉬며 끄덕인다. “그라믄 영감이 죽고 나서 있는 재산을 다 덕쇠네한테 줄라카나?” “어매.” “그라믄 안 된대이.” 펄쩍뛰며 방방이 뜰 것 같은 어미를 매청은 난처하다. “와요.” “네가 장차 어떻기 입에 풀칠을 해야지 않더나?” “그건 그렇심더.” “그라믄 암 소리 말고 영감이 죽고 나서 그냥 문전박대라도 해부리라. 영감이 네가 그렇게 좋아서 덕쇠네를 들였겄나.” 어머니나 자신이나 노류장화(路柳墻花)에 지나지 않아 의식도 그 수준이다. 한데 어쩌랴. 자신도 살아야하는 불가항력에 무기력하니. 어머니를 전송하고 자신은 터벅터벅 황혼 빛을 받으며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별다른 소득도 없이 들어왔다. 이때 억쇠 영감이 마나님의 행차에 졸졸 따라 나오더니, “영감님께서 방금 마님을 찾았심더.” 한다. “나를?” 매청은 뜻밖에 영감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무슨 큰일이 난 것처럼 놀라는 기색이다. 영감이 갑작스레 자기를 왜 찾았을까. 서두르듯 신돌에 신발을 벗어놓고 영감의 누운 자리로 다다른다. 영감은 그예 자지도 않고 먼 하늘을 쳐다보듯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오랜 병환으로 지친 영감의 눈은 그야말로 영롱한 빛에 가려진 안개처럼 보인다.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매청은 넘어가려 한다. “영감 내를 찾았다구요.” “으응.” 신음하듯 영감은 대답한다. “와 나를 찾았소.” 태연하게 매청이 묻는다. “내가 이제 더 살 것 같지 않다.” 기어가듯 영감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느다랗다. “새삼스레 와 그 소리하요.” 태연한척 매청의 대답은 여전하다. “내가 죽게 되믄……” 말을 잇지 못하는 영감을 보다 못해 매청이 곁에 눈엣가시처럼 있는 억쇠 영감을 내치듯 나가라고 이른다. 상전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숙명을 겸허히 받으며 억쇠는 물러간다. 물러간 것을 안 매청이 “말하소.” 하며 영감의 다음 말을 재촉한다. “내가 죽게 되믄…… 바다에 다 뿌리시게.” “바다에요?” 영감은 끄덕였다. 다음날 아침에 매청은 비명을 질렀다. 영감은 숨을 헐떡이며 금방 고꾸라질 것처럼 몸부림을 치는 게 아닌가. 보다 못해 매청이 억쇠더러 의사를 왕진 오게 해달라며 닦달했다. 때마침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병원이 하나 있어 그랬던지 금방 왕진가방을 들고 온 젊은 의사가 들어왔다. 영감의 상태를 유심히 살핀 후 재빨리 왕진가방을 열어젖히더니 청진기를 꺼내어 영감의 상부에 댄다. 그러더니 “부인,” 하며 의사는 고개를 젓는다. 위독하다는 뜻이다. “어르신은 오늘을 넘기기 힘들 거 같소.” 서울 말씨의 의사가 단정하는 말에 매청은 어안이 벙벙하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마음 같아서는 아래 허벅지를 꽉 꼬집어보고 싶건만 그 충동을 참는다. 어째서 이런 결과가 일어났는가. 그러면서도 매청은 그동안 영감과 정을 통했던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열넷에 어미의 출신에 따라 권번으로 들어와 기생이 된 뒤 처음 맞이한 정인이었다. 노마님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자제되는 아들들도 거들떠보지 않고 오직 푸대접으로 일관하던 지난날이 고통스러웠다. 몸서리가 쳐지게 고통스러워했다. 그런 매청의 처지를 묵인할 수 없었던 영감은 특유의 잔정이 많은 성품 덕분에 십시일반으로 모은 재산으로 매청에게 따로 살림을 차리도록 해준 것이다. 해방이 되고 난 뒤 줄곧 매청의 집에서 거처를 하자 노마님이 소식을 듣고서 노발대발 씩씩대며 찾아와서는 여보라는 듯 머리끄덩이를 잡아낚으며 영감을 내놓으라며 고래고래 악을 썼던 거다. 그랬는데 영감이 오히려 매청의 편역을 들어주며 썩 나가라며 소리쳤다. 그런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이 터졌다. 전쟁이 터지면서 매청은 영감을 데리고 하루빨리 서울로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랬는데 막상 서울에 빠져 나오고 보니 영감은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마누라와 아들들의 모습이 삼삼이 보이더라는 거다. 그래서 아랫것에게 사람을 보내어 본댁(本宅)의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그러나 본댁은 거의 멸문에 이를 정도의 상태였고 서울에서 세 모자가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소식을 듣고 이 대감은 충격을 받아 뇌일혈(腦溢血)로 자리에 눕고 말았다. 매청은 영감을 차마 내팽개치기 어려워, 아니 자신에게 정을 듬뿍 주었기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지극정성 간호를 해왔던 거다. 그런 영감이 죽게 되다니 매청은 순간 하늘이 샛노랗게 됨을 느낀다. 임시방편으로 의사는 떠나기 전에 링거를 하나 놓고 줄행랑치듯 나가고 말았다. 이튿날 새벽 여섯 시. 바다에 무덤 하나 남기지 말고 뿌려달라는 유언만을 남긴 이 대감은 세상과 이별하였다. 재산에 대한 언급이 없이 세상을 뜬 것이다. 빈소를 차리는 손길들 속에서 매청은 진종일 밥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 곡성을 실컷 하기도 했으나 무언가 시원한 느낌도 들지 않는다. 하다못해 죽이라도 먹으라고 하는 어머니의 손길도 마다한 매청이었다. 연이어 줄초상을 치르는 부산 판자촌은 오늘도 북새통을 이루었다.
|
http://www.1392.org/bbs?history23:276  
|
| 
|
| 창작 역사소설 최근 댓글 | ||||||||||||||||||||||||||||||||
|
정병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