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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선안] 종이꽃 제16편
서진이의 귀환을 가족들이 반기는 가운데, 아버지는 서둘러 지 역관이라는 사람의 손자며느리로 시집을 가버린 작은딸 내외를 불러내도록 하였다. 지 역관은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 약관의 나이로 일본의 통역관으로 지냈으나 나라가 망한 뒤 일본의 앞잡이가 되기 싫다고 하여 초야에 묻혀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는 것으로 소일을 삼는 생애를 지냈다. 그런 지 역관이 재산이 많았기에 육순에 손자며느리를 두고 이제 칠순이 되었다. 그런 그도 전쟁 통에 부인과 둘째 내외를 폭격으로 잃고, 며느리를 둔 첫째 내외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랬던 지 역관이 간만에 손자 내외에게 친정나들이를 하라고 보냈다. “오빠.” 동생이 집에 들어서며 서진을 바라보는 누이동생의 눈에서는 반가움의 눈물이 맺혀 있다. 서진은 그런 동생을 안아 등을 토닥이며 안심을 시킨다. 남편 지 서방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간신히 참는다. 방서진은 방씨 집안의 유일한 핏줄이었다. 아니 방씨 일가의 곁가지인 먼 피붙이에게서 얻은 양자였다. 아버지는 나이 열다섯에 공명첩을 받아 벼슬아치로 행세하여 한때나마 방 대감으로 불리며 살아왔다. 나라가 망한 뒤에 자신의 집 인근에 살고 있는 이 순사처럼 경찰로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이 점차 파시즘의 대열로 진입할 때 경관으로 있는 가운데 제 백성에 대한 죄책감을 못 이겨 사직하고 집안의 재산이 풍족하다싶으니 제 집안에서 가솔들을 거느리며 조용히 아비규환의 세상과 벽을 쌓았다. 그는 본래 울산 사람이었지만 해방 후에 이곳 부산에 옮겨가면서 울산에 있는 재산들을 모두 팔아버리고 오늘날 이 집에 들어앉은 것이다. 그런 그에게 전쟁은 매우 끔찍한 악몽이었다. 제 슬하에 아들이 없음을 근심해 열 살 까까머리 소년을 양자로 맞이했던 게 엊그제건만 전쟁의 회오리가 이 집에 회오리가 들이닥쳐 전장 한가운데로 양아들을 내몰다시피 했으니 그 죄책감은 매우 깊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 아들을 바라보는 방 대감의 마음은 매우 평안했다. 다음날. 방 대감의 집에 웬 사람이 들어온다. 날은 환히 밝아 마실 나오기 딱 좋은 날씨다. 이때 방 대감의 부인 춘천댁이 여름이 다 지나가고 한 까닭에 앞마당에서 빨간 고추들을 말리기 시작하는데 인기척에 놀란다. “아이고 이게 누구시라구.” “와요,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왔나배요.” 분단장을 곱게 한 채 진해댁이 찾아온 거다. 유석덕 영감이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며칠 동안 서울로 가겠노라며 떠나고 만국이와 단 둘이서 지내고 있는 모양이다. “무슨 그런 말을.” 픽 웃으며 춘천댁이 고추를 마저 말리고 있었다. “아니 고추가 와 이리 많소?” 진해댁이 묻는 말에 “진해댁이 직접 가져가겠나?” “그, 그건 아니거만도.” “자네도 알다시피 전쟁이 끝나고 나자마자 무사히 아들이 돌아왔으니 예전보다 김장을 더 해야하지 않겠나.” “하긴 그렇십니다.” 진해댁은 자리를 쭈그리고 앉아 춘천댁이 고추 말리는 광경을 말없이 지켜본다. 춘천댁의 살림은 전쟁 전보다는 더 어렵다고는 하지만 양반가의 규수답게 살림은 알들 살뜰 하다못해 소박하다지만 정갈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많은 살림을 시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단 한 번도 하인에게 살림을 맡기거나 부려보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엄한 가풍에 따라 살림을 하나에서 열까지 배운 것일 뿐. 그 이상의 정도도 없었다. 그런 춘천댁이 있었기에 오늘날 방씨 집안이 무사한 것이 아닐는지. 이를 지켜본 진해댁이기에 말을 내보이지 않아도 짐작가고도 남음이 있었다. “우리 도련님은 집에 있소?” 진해댁의 너스레에 춘천댁이 웃는다. “집에 있기는. 진해집이 오기 전에 벌써 외출했다.” “학교는 마쳤소?” “아니, 학교는 인자 막바지지.” “그렇담 졸업은?” “아마 명년에 할 테지.” 춘천댁의 양아들 서진은 전쟁 전부터 대학을 다녔던 상태였지만 때마침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있는 채 전쟁을 맞이하였기에 학업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웠다. 그런 그가 막바지 대학생활을 청산하러 서울로 갈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히히히……” “왜 웃어?” “성님 아들이 참으로 미남인갑소.” “새삼스레 왜?” “하마 세상을 떠날까 불안으로 잠을 못 들고 하던 성님이 이리 편히 지내실 줄 뉘 알았을까?” 진해댁이 춘천댁보다는 나이가 아래인지라 춘천댁을 연장자로서 대하는 거다. “그나저나 수동댁이 걱정이네.” “걱정이라니요?” 어느덧 빨간 고추를 담은 대바구니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고추 말리기 작업은 막바지에 다다랐다. “연심이 아버지가 자리에 누워있다던데.” “쯧쯧쯧. 그 집 아저씨가 참 딱하게 되었네요.” “……” “전쟁 통에 정혼하게 된 사윗감을 잃질 않나, 두 아들을 전쟁으로 앞세워 보내질 않나 마음이 오죽인들 아팠을까.” 잔정이 많고 성정이 깊기로 유명한 진해댁이다. 이때 집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엄마.” 밖을 내다보며 지씨네 집으로 시집 간 막내딸이 춘천댁을 부른다. “응.” “지금 뭐하는 거예요?” “미리 김장 준빌 하려고 고추를 말리고 있다.” “아이고 이게 누꼬.” 진해집이 기척을 내자 막내딸이 어리둥절해하며 바라본다. 이때 춘천댁이 고추들을 다 펴서 말리고 나서는 일어나자마자 진해댁을 손으로 가리키며 “아, 이 사람은 진해댁이라고, 이웃에 사는 사람이다. 이 사람아, 저 색시는 내 막내딸이라네.” 서로를 소개시켜 준다. “안녕하세요?” “아이구마, 시집을 갔다는 그 막내딸이구나. 반갑데이.” 막내딸은 부끄러워하며 수줍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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