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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선안] 종이꽃 제15편
그래서 이 순사의 백수 생활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이 순사는 가족에게는 물론, 주위 동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한 몸에 받고 말았다. 장기를 두는 방법도 모르고 그렇다고 궂은일을 할 줄 모르고 오직 경력이라고는 왜정 때 순사 자리에 앉은 것뿐이니 아무도 반겨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시간은 그저, 그저 야속하게만 흘러간다. 이 순사는 정처 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마치 망망대해 한 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한심스럽게 바라본다. 그래서 그는 마치 거리의 건달들처럼 이 거리 저 거리를 하염없이 하릴없이 헤맨다. 그러거나 말거나 두 훈장은 밤이 되도록 장기만 둔다. 이 순사가 돌아간 뒤에도 상가는 북적거렸다. 그나마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마중 나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옥선은 위안을 받는다. 다음날 이른 새벽. 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할 때다. 이때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두 자매는 서로를 부여잡고 오열하기만 했다. 마땅한 묏자리도 없는 마당에 화장(火葬)을 하여 유해를 강가나 아니면 바닷가로 뿌리기로 했다. 날이 저물어 가는, 열기가 차츰 시들어가는 햇빛을 받으며, 맏이는 출렁이는 바닷물 위에 한줌의 재가 되어버린 유해를 뿌리기 시작했다. 인적 없는 바닷가 바위 위에 서 있는 두 자매는 마지막이 된 아버지의 인연을 끊었다. 세월의 흐름은 유수 같아 삼년 뒤에 강토는 휴전선이라는 이름으로 두 갈래가 되어 쪼개졌다. 더는 고향으로 갈 수 없다는 소식은 부산 판자촌에 전해지자 어떤 사람들은 낙담하며 울부짖고, 또 어떤 사람은 전쟁이 끝났다는 것만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이 순사는 특히 신이 났다.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전쟁이 끝나자 경빈의 마음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휴전 소식을 듣고 오빠의 귀환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전사들이 숱하게 나왔을법한데 다행히 오빠의 이름 석 자가 나와 있지 않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다. 집에 돌아온 오빠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오빠의 왼발이 절룩거리는 것이다. 아주 심하지는 않았지만 미세하게나마 절룩이는 정도였지만. “오빠, 어쩌다가.” 경빈이 염려스러운 나머지 오빠에게 물어보았으나 대수롭지 않은 듯. “걱정 마라. 관통상(貫通傷)은 아니니.” 원조의 왼다리가 작년 전투에서 얻은 상처의 후유증이었다. 다리뼈가 관통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대가 파열되어 거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때문이다. 자칫 뼈마저 관통되었더라면 영영 다리를 쓸 수 없는 불구로 살아야만 했다. 어쨌든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라며 어머니는 연신 기쁨의 눈물을 뿌려댔다. 방씨네 자제도 무사히 귀환하였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마당에 버선발로 나오며 하늘에 대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천지신명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늘의 운이 통함에 어머니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마누라의 기분은 아랑곳 않고 헛기침하며 “아녀자가 그리 나서서야.” 하며 점잔을 빼지만 내면은 기쁨이 더욱 컸으리라. 원조는 아버지에게 찾아가며 큰절을 하였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고 기쁨의 그림자가 만연해 있었다. 험한 일을 겪고 돌아온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명예를 한 아름 짊어진 듬직하고 든든한 아들. 그 누구에게 손색이 없을 정도의 아들이 제 눈앞에 나타났다는 사실이 꿈이었다면 어땠을까. 사회주의자라는 혐의로 전쟁 통에 총살된 동생의 넋을 위로해주지 못한 죄책감이 명암처럼 석형 영감에게 자리하고 있었다. 얼마 전 작은댁 심씨가 자리를 펴고 몸져누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쟁이 끝났건만 한 순간에 일어난 사건이 이렇듯 일가로 하여금 불신이라는 갈등을 일으키어 둘로 쪼개지다니. 아버지가 임종하실 때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는 당부가 계셨건만. 아버지의 당부를 거슬러야만 하는 불효를 어찌 씻을 수 있을까. 석형 영감의 두 눈에는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린다. 이래저래 원조의 큰절을 받고 난 뒤 석형 영감은 “돌아와 준 것만도 고맙구나, 고마워.” 아들의 등을 토닥이며 아버지는 기쁨과 슬픔의 쌍갈래를 즐기고 있었다. 그 한편에 수동댁은 경빈이네 집에서 파출부로 일하고 있었다. 경찰 출신이라 있는 집이기도 했고 틈틈이 집안일을 살뜰이 맡아왔기에 빌어먹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그 안에 딸인 연심이도 같이 묻어서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가씨네 집에서 살아가다가 옥선과 희진 자매가 갑자기 서울로 올라간다는 얘기를 꺼냈기에 불가피하게 이씨네 집에 얹혀살고 있는 거다. 어쨌든 반가운 식구가 돌아오는 줄 모르고 영문도 모르게 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연심은 마당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광경이 낯설어 기웃거리다가 마침 왼편에 서 있는 경빈을 속삭이듯 불러내보았다. 경빈과 연심이 동갑이기에 친구로 지내고 있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니?” 경빈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는지 눈물자국이 선명하다. “저기, 우리 오빠가 돌아오셨어.” 울먹이는 말투로 연심의 물음에 대답한다. “그래?” 연심은 기뻐해주며 “그래, 잘 됐다. 한시름 놓았네.” 연심의 격려를 받은 경빈은 오빠가 있는 큰방으로 눈길을 보낸다. 방씨네 집에 서진이도 돌아왔다. 방씨네 집은 부산 판자촌 어귀 즈음에 위치해 있었다. 전쟁 통에 살림은 궁핍했다지만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씨네와 호형호제하며 지내는 사이기도 하다. 그의 집안은 상업에 이골이 나 있는 집안 내력 덕분에 한때 상공회의소(商工會議所)에서 임원으로 지내기도 했을 정도로 재력이 막강하기도 했다. 그런 집안 내력 속에서 서진은 난초같이 자랐던 거다. 그런 그가 전쟁으로 인해 징병되었다는 소식에 온 가족들이 통곡하였는데 이렇듯 살아 돌아오니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계세요?” 서진은 원조와는 다르게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집안이 떠나가라 외친 기척에 바깥에서 웬 기척이 나더니 화들짝 놀라며 갓 스물이 될 법한 처녀가, 아니 경빈이와 나이가 또래인 것 같은 처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도 놀라며. “아니, 혹시 오라버니?” 꿈인지 생시인지 되묻는 누이동생을 보는 서진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빠의 귀환이 갑작스러웠던지 경황없이 부모에게 동네 떠나가라고 알린다. 그러자 방씨네 식구들이 우르르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서진은 그제야 아버지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 혹여 아들의 생사가 잘못되었을까 짐짓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던 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들의 무사귀환을 어찌 기뻐하지 않을까. 마치 개선장군과 같이 돌아온 아들의 모습에 만면에는 해방감에 넘친 환희로 넘쳐나고 있었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서진아, 서진이 네가 서진이냐.” 만개한 웃음으로 아들이 그렇다고 말하자 어머니는 기쁨의 눈물로 아들의 귀환을 받아들였다. 서로 부둥켜안은 채 울음바다다. 그 한편에 누구보다 오빠의 귀환을 고대했을 순이(順伊)의 눈에서 하늘의 섭리가 통했음을 느끼며 기쁨의 눈물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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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