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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사제(司祭)
십자가(十字架)가 어두운 밤에 불에 휩싸이고 재가 되어갈 제, 땅으로 꺼져가듯 떨어졌다. 남녀들이 불이 나는 것을 본 듯 저마다 비명소리가 들려오고 온 성전(聖殿)은 그곳에 휩싸이고 말았다. 아비규환(阿鼻叫喚)이란 이를 두고 하는 소리리라. 그 비명소리를 듣고 그는 놀랐다. ‘오, 주여! 제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그는 이렇게 절규하는 심정으로 되뇌었다. 그의 이부자리는 땀범벅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그는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잠시 뒤 꿈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갑작스레 가슴을 부여잡고 피를 토하였다. 이를 보고서 남녀가 어김없이 비명을 질렀다. 이에 아랑곳도 없이 사제는 쓰러졌다. 거룩한 성전에서―성스러운 성전을 더럽히려는 마귀의 우스운 장난이었을까. 다음날 하느님의 목자들을 만나러 가기 전에 그는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눈만 감으면 꿈에 나타나는 것들이 나타났다. 피를 토하고 불길에 휩싸이고 왜 내게 이런 몹쓸 광경이 펼쳐지는가. 그는 깊은 고뇌에 휩싸였다. 그에게 어떤 시련이 닥쳐왔기에 저토록 괴로워하는가. ‘가롤로. 가롤로.’ 피로에 지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잠든 모양이다. 가롤로는 깊은 악몽에서 벗어나는 한줄기의 빛을 받은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에는 식은땀이 넘치고 있었다. 그의 본래 이름은 배형근. 나이는 서른 되었다. 배형근, 아니 가롤로가 이런 일에 휩싸인 건 한 여인을 만나면서부터다. 그는 평소에 부모의 독실한 신앙을 바탕으로 사제로서의 꿈을 꾸는 부모의 뜻에 들어선 사제의 길이었다. 한데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사제로서의 길은 너무나 힘든 여정이었다. 곁에 누구의 사귐도 없이 오직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 했다. 형근은 그런 자신을 사랑하느니만큼 결코 싸울 수만은 없었다. 게다가 자신과 은밀하게 결혼을 약속한 애인을 두고 사제가 된다는 건 그의 진심에서도 그렇고 자연의 섭리에서조차도 있을 수도, 아니 있어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젊은 시절에 다른 형제도 없이 자란 그는 부모의 기대에 힘입어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두루 거치면서 학교의 수석을 놓치지 않을 수 없었고 학교 학생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학교 안팎에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화려한 이력이 있었다. 그 이력 가운데에 형근에게 운명의 여인이 나타났다. 바로 형근의 중학교 친구 누이동생이었다. 이들은 여느 평범한 청소년의 시절을 지냈다. 평범하게 친근히 사귀었다. 그런 이들에게 위기는 찾아왔다. 거의 6년 정도 사귀었던 시점에서였다. 어느 날 밤 부모님이 형근을 불러들였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불러들였다. “형근아. 네가 장래에 어떤 직업을 생각하고 있니?” 무턱대고 자신의 장래를 묻는 부모의 의견도 의견이었지만 영문도 모르게 장래를 고려하여 학교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만을 받으며 자라왔던 데다 어느 누구 하나라도 베풀 줄 모르는 철부지 학생이었다. 뜬금없이 장래를 생각했느냐는 갑작스런 물음이 형근으로 하여금 큰 혼란을 일게 한 것이다. 누군가의 가장이 될 준비를 해야 하건만 그럴 마음가짐도 가져보지도 못한 채 부모로부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눈치보아가면서 살아가는 제 자신이 고달프고 매년 명절마다 친지들을 만날라치면 부모님과 같은 마음으로 이야기를 꺼내드니 형근의 마음은 착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부모님의 신앙은 신앙대로 돈독하지만 정작 자신의 신앙심은 부모의 신앙심보다 뒤처지다 못해 넘어서지 못하니 부모의 마음에 부응하기 어려워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형근의 이런 마음의 속내를 헤아릴 줄 모르는 것만 같아 형근이 자신은 고립무원(孤立無援)에 지나지 않음을 몸소 느꼈다. 그런 형근의 마음에 나타난 여자는 일종의 샘터와 같은 곳이었다. 마치 목마른 사슴과 같이 샘을 찾아가고자 이리저리 방랑하는 마음과 같은 형근에게 그녀는 오아시스 한가운데에 자리한 샘터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형근이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그녀를 만나는 날이나 시간이 되면 마음은 한결 설레기도 했고 사랑의 싹이 트이는 느낌을 받은 것만 같아 매우 좋았다. 학교 앞에 항상 만나며 학원에 갈 시간을 쪼개서 근처에 있는 카페나 빵집에 들어가 간식을 먹고 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유일한 데이트였다. 밤 11시가 되면 귀가하는 형근은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권유를 따를 수밖에 없었고 한창 자랄 나이에 제때 먹고 제때 자야함에도 여자를 제 자신의 품에 안기려면 이를 악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마음이 너무 메말라있었다.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잠을 청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여자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밤이면 밤마다 잠이 들라치면 자신과 여자가 단 둘이 마주 앉아 마치 신방을 차린 신랑신부의 심정으로 제 몸들을 내보이면서 애욕을 채우는 모습을 꾸곤 했다. 이건 전형적인 사춘기에 지나지 않다. 그렇다. 하지만 이런 짝사랑과 같은 마음을 형근은 수능을 치르고 난 뒤에도 갖고 있었다. 영락없는 짝사랑이라고 할까. 그러나 형근은 마음을 애써 다잡지 못하고 지켜보다 못한 부모가 “형근아, 네가 왜 말이 없니? 차라리 누구의 가장노릇을 할 필요 없이 사제의 길에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의중을 물어보는 것이었다. 보통 같으면 제 나이에 맞게 독립해야 할 나이다. 그런데 아무런 내색을 않으니 부모의 마음인들 오죽 답답하지 않으랴. 부모의 넋두리를 들어야만 하는 형근이 자신은 정말 앞이 캄캄해질 수밖에 없었다. ―부모의 성화에 따라 형근은 신학을 전공하였다. 사제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물론 자신의 의지가 박약한 때문이다. 아무런 준비도 못한 채 오직 여자를 취해야만 한다는 것에만 치중하여 생긴 인식의 오류인지도 모른다. 그런 자신을 부정하듯 형근이 연락을 취하였다. 신학대학에 입학한 그는 세상과 밀폐된 공간 안에서 그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편지를 적어내기 시작했다. 그 편지를 보면― A! 나는 A를 잊지 못합니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꿈속에서도 나는 A, 당신을 잊지 못합니다. 부모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내가 언젠가 당신을 품에 안을 수 있다면, 당신을 품에 안을 수 있다면 나는 여한이 없으련만. 나는 누군가의 꼭두각시도 아니건만 사제라는 길목 앞에서 서성일 수밖에 없는 내 현실이 너무나 저주스러워요. 하루라도 빨리, 하루라도 빨리 A를 본다면 당장에 죽어도 여한이 없으련만. A. 당신이 이를 보면 내게 답을 주셔요. 하루라도 빨리. 자나 깨나 보고픈 마음뿐인 한 사내의 애끓는 붓장난에 지나지 않을까. 형근이 큰맘을 먹고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으나 일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 말일이 지나가도 편지는 오지를 않았다. 그녀가 행여 변심을 하지 않았을까. 만일 변심하였더라면, 변심하였더라면 안 된다. 안 돼! 신학대학에 입학한 대로 신학생이 된 그는 곧바로 군대에 자원입대하여 2년을 지낸 뒤 다시 복학해 오년이라는 긴 시간 끝에 사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는 동안 그의 용광로(鎔鑛爐)와 같은 불은 잠잠해져 타다 남은 잿더미가 되어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디선가 낯이 익은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필이면 사제로 처음 부임한 성당에서였다. 그가 미사를 집전(執典)하는 자리에서. 미사를 드리는 동안 그는 온 몸과 온 마음을 다해 하느님을 찬미하는 의식을 치렀다. 그러나 마음 한 편에 꺼진 것 같은 불씨가 다시금 피어나기 시작했다. 안 된다 안 돼! 욕정의 불씨가 쉽사리 꺼질 줄 몰랐다. 몸은 영락없는 사제의 옷매무새지만 마음은 영락없이 그녀의 곁으로 가고 있으니 내면 안에 일어나는 갈등의 골은 갈수록 깊어져만 갔다. 이윽고 미사가 끝나고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제 몸을 침대에 뉘인 형근이 이때부터 현재에 이르도록 이상한 꿈에서 헤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직을 담았던 자신이 사모하는 여자를 두고 진실함을 감추어야만 하는 현실이 너무나 처참했다. 그 처참함 때문에 형근은 하루하루를 지옥과 맞먹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다음날 새벽이 되어 어김없이 형근이 그가 미사를 집전해야 하는데 수녀(修女) 한 사람이 신부의 부재를 알고 그가 기거하는 방문을 열어 들여다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의 잡동사니는 그대로였으나 편지 한 장 쪽지 한 장도 없이 종적을 감춘 채 사라진 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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