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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시대_01 (제42화)
좌근 영감의 부름을 받은 조카들은 모두 한자리에 앉았다. 불러다놓고는, “새로이 상감이 보위에 오르신 마당에 무슨 넋두리냐 만은 지금은 시국이 시국이니만치 젊은 너희들이 우리 집안을 살려내야 한다. 나와 같이 영악한 이하응이를 미워한 사람들은 죽어 마땅하다지만, 너희들은 모두 흥선군이 신임하고 있으니 내 한시름은 놓은 셈이다. 그러니 이 못난 숙부의 전철을 따르려 하지 말고 첫째도 흥선군, 둘째도 흥선군, 셋째도 흥선군에게 충성으로 받들어야 한다.” 좌근 영감의 곁에는 병기가 있었으나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조카들이 흔쾌히 대답하자 좌근의 입가엔 안심한 모양이 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튿날 저녁에 병졸들이 좌근의 집에 들이닥쳐 가택수색하기 시작했다. “웬 놈이냐!” 하며 외치는 청지기의 말에 아랑곳 않고 짓밟다 못하여 집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잡동사니들은 폭격 맞은 것처럼 어지러이 늘어서고 여종들은 모두 비명 지르기 일쑤였다. 이윽고 월선의 처소에도 병졸들은 들이닥쳤다. “웬 놈이냐!” 앙칼진 소리로 양씨가 소리치자, “죄인 양씨를 끌고 오랍 시는 전하의 어명이오!” 포도대장(捕盜大將)의 엄포가 쩌렁쩌렁하였다. “무, 뭐라? 새 상감이 나를 잡으라고 했다고?” 양씨의 앙칼진 소리에 아랑곳 않고 대장의 명대로 병졸들이 그녀를 끌고 간다. “이놈들―! 놓지 못하느냐? 이놈들아―! 놔라, 놔라―!” 서울 장안 떠나가라 외치는 양 모의 목소리에, “어머니.” 병기는 지켜보며 흐느껴 울뿐, 아무런 말이 없고 좌근은 애첩의 끌려가는 모습에 이끌려 세상무상함을 한탄하듯 헛웃음만 칠뿐이었다. 병졸들에게 끌려간 월선이 당도한 곳은 의금부(義禁府)였다. 의금부에 당도하니 형틀은 이미 갖추고 있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권력이 이렇듯 자신의 목숨을 헌신짝 버릴 수 있는 지경에 다다랐던가. 월선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이제 내 인생사가 마지막이로구나. 대감의 품에 단 하루라도 안길 것을. 후회가 막심하다. 끌려 나온 월선은 패대기쳐졌다. “죄인 양씨는 고개를 들어라.” 양씨는 코웃음 쳤다. ‘나가 춘향이다냐. 칫.’ 그러나 왕명이 지엄하여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보니 흥선군과 조대비가 들어 있다. 모두 근엄한 얼굴로 자신을 째려보았다. 이제는 세상사 다 누리고 이렇게 죄를 달게 받누나 생각하노라니 눈물이 차마 떨치지를 못한다. 이내 형틀에 앉은 월선에게 주리가 틀려졌다. 종아리가 찢어지고 살이 타는 냄새가 고약하니 비명소리가 앙칼지기는 당연하다. 그런데 이를 보던 대원군의 눈에서는 저승사자의 눈웃음이 보였다. 국문하던 것을 손수 멈춘 대원군은 월선에게 말한다. “양씨는 정녕 모르는가. 그대의 죄는 삼천리강산을 피로 물들여도 성치 않거늘.” “나는 모르겄소.” “모르겠다.” “그렇소.” 그때 대왕대비의 호통이 일어났다. “네 이년!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놀려 대느냐!” 웃음 터진 듯 월선이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오직 하옥 대감의 사랑에 보답하였을 뿐. 백성이 무얼 어떻게 사는지 나는 모르오.” 대원군은 표정이 굳더니 “저것을 매우 조지거라.” 포졸들은 월선이의 이실직고를 위해 주리를 틀었다. 의금부에 끌려갔다는 소식에 좌근은 날이 밝은 즉시 아랫것에게 시켜서 직접 대원군을 만나겠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대원군이 만남을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다음날 저녁에도 국문은 계속되었다. 김좌근의 행차는 이어졌다. 좌근은 몸소 의금부에 당도하고 보니 앙칼진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간담 서늘하다. 권세가 무엇이건대. 애지중지한 애첩이 저렇게 엄하게 죄상을 달게 받는고. 서둘러 좌근은 국청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대원위(大院位) 대감―!” 흥선군에게 국문 받던 월선이의 비명소리는 사그라지고 실신했다. 애처로이 외치던 좌근이의 소리에 대원위는 두 모양을 보고 고소해하며 웃었다. 붉은 빛에 비쳐져서 저승사자의 얼굴처럼 보이니 섬뜩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나마 자신을 우롱해대던 일개 상갓집 개가 저렇듯 상감을 보위에 세우고 천하를 호령하던 힘이 생겨나다니. 겉으로나마 판단하려고 했던 무지한 자신을 책망하고야 말았다. “대원위 대감, 부디 우리 안사람 좀 살려주시오. 내 다시는 흥선군에게 아니 대원위에게 해하지 않으리다.” 애걸하는 영감의 청을 하응은 제안한다. “하옥 대감, 제안 한 가지가 있소.” “말씀하시오.” “월선이 저 아이는 김씨네에서 있으면서 무수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소. 그뿐이오. 전국 팔도에 탐관오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설쳐댔으니 일일이 일러 말해 무엇 하리오. 헌데 월선이의 어느 면에 반했기에 대감의 창자가 끊어질 정도의 지경이 됐소. 양귀비 마냥 경국지색(傾國之色)이 되기라도 하나.” 대원군의 비아냥대는 소리에 병졸들이 일제히 키득키득 거리며 웃는다. 한때나마 좌근의 서슬 퍼런 권력 밑에서 숨죽인 민중들의 한이기도 했다. 흥선대원군과 좌근이 이후에 밀담을 나누고 난 뒤 월선은 김좌근의 집에서 나왔다. 이후의 행적은 전무하나 월선이 비상(砒霜)을 먹고 죽었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다. 좌근은 월선을 버린 대가로 네 차례 영의정을 지낸 것을 고려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지내도록 했다. 이제 이하응의 세상이 도래(到來)했다. 김씨의 일가는 권좌에서 내려왔지만 이하응의 밑에서도 호의호식하며 명문가로서의 체면을 많이 차릴 수 있게 되었다. ―대미(大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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