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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시대_01 (제37화)
흥선군이 벌여놓은 잔치에 진절머리를 앓기 시작하자 김병국이 하응에게 다가가서, “이보게 하응이. 그만 하시게나. 자네 너무 취했나보네그려.” 달래기 시작했다. 그러나 흥에 도취된 하응이 되려, “나 술 안 취했네. 생사람 잡지나 말게.” 하며 발뺌하고 나섰다. 그러나 어른들이 계시고 하여 무안해진 병국이 더 부추기지 않았는가. “이보시게, 석파.” 바로 이때, 달래려는 병기의 두루마기에 멱살 부분을 잡아가며 “아니 이 사람이!” 호들갑떠는 것이었다. 그때 좌근의 품에서 술시중을 들던 월선이 웃음을 터뜨린다. 까르르 웃는 그녀를 따라 일제히 김씨네 떨거지들도 웃어젖힌 것이었다. 흥선군이 이때에 이르러 ‘그래, 이놈들. 네놈들이 언제까지 영화를 누리는지 두고 보자. 일이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육십년 가까이 누려온 권세이니 제 세상 만난 듯 춤추고 노래하고 싶었겠지. 아니 왕실의 안녕이 아닌 네놈들의 만세를 노래하겠지. 네놈들 사이에 왕손이 태어났으니 맘껏 쓰다가 제 맛에 들지 않으면 헌신짝 버리듯 하겠지. 하나 네놈들의 뜻대로는 안 될 것이다. 어디 두고 보자! 김씨 너희들의 몰락을 기필코 지켜볼 테다!’ 병국의 멱살을 잡던 하응의 눈에서는 비분강개함이 역력했다. 자신의 기행(奇行)에 마치 짝 맞추듯 비웃어대는 저 안동김씨의 만행. 그것은 하응의 가슴에 타오르는 분노라는 불꽃에 기름을 더 끼얹는 꼴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저들은 미처 모르는 눈치였다. 그 부류 중에 하나가 닭다리 하나를 집더니 그걸 땅바닥에 내던졌다. 이하응이 그걸 들자 안필주가, “안됩니다!” 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하응은 아랑곳없이 그걸 뜯더니 먹어댔다. 이때였다. 순식간에 연회는 파안대소의 파도에 잠겨 있었다. “가자!” 갑자기 무안을 당한 탓인지 하응은 자리 피하듯 달아났다. 부하들도 뒤따르듯 하건만 비웃는 소리들은 그칠 줄 몰랐다. 병학은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옆에 병기가 웃어제끼자, “형님, 지금 웃음이 나오시오?” 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병기가 웃음을 거두며 “웃어야지. 나보고 울라고 하는 겐가?” 도전장 내미는 식의 모습을 용납하기 어려운 그였다. 그 모습을 보기 어려워 낯간지럽게 느꼈는지 월선이 “어르신이 계시는데 조카님들이 왜들 싸우시는 게요.” 점잔을 빼자 울컥한 병학이 제 술잔을 들며 월선의 얼굴에 술을 뿌렸다. “이 무슨 짓이냐!” 조카의 무례함을 참다못해 좌근이 소리쳤다. 월선은 쏟아낸 술을 닦는데 열을 올리고 잔치는 찬물 끼얹은 듯 조용했다. “네깟 기생 따위가 어디서 나서는 게냐!” 그때 노익장(老益壯) 과시하듯 좌근이 벌떡 일어나 병학의 뺨을 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터라 사람들은 어쩌지 못했다. 삽시간에 잔치는 아수라장 되었다. 월선은 월선대로 흐느끼고 김씨네는 김씨네대로 입을 다물었다. 적막이 흐르고 나서였다. “형님!” 병학이 격앙되게 입을 열었다. “형님은 대체 사람이오, 짐승이오?” 병기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일개 왕족으로서 누더기 옷 좀 입었다 기로서니 이리 푸대접을 하시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요?” “…….” “형님, 두고 보시구려. 만에 하나 흥선군이 권세를 잡는 날엔 우리는 꼼짝없이 죽고 말게요.” 하며 병학은 월선에게 손가락질해대며, “이 사단은 저 계집이 자초해서 생긴 게요. 나이든 숙부님의 눈을 흐리게 해놓고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일군 것들을 마치 제 것 인양 가로채놓더니, 이제는 왕족을 푸대접하는 꼴이 되다니. 세상에 이런 법이 있소?” 병학의 분노는 깊었다. 깊이 있는 분노였다. 김씨의 세도가 지속되면서 김좌근이로 대표되는 세력들은 위로는 임금에서부터 아래로는 방백과 수령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일이라도 돈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황금만능(黃金萬能)에 취하여 월선에게 빌붙기까지 하는 지경이 되었고,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그들에게 시달리며 무리한 세금을 내어야 하는 불가항력이 미치니 근래에 와서는 민란(民亂)이 일어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임금도 모르고 정작 실력자라 일컫는 좌근조차도 모른다. 일부 고을에서는 수령을 잡아 가두는가 하면, 백성들이 지켜보는 데서 수령의 목을 베는 등 민심은 겉잡을 수 없이 흉흉해지고 있었다. 어쨌든 김병학은 그 길로 김병지네 집에 다다랐다. 이리 오너라― 하는 기척에 병지네 몸종이 굽신 대며 사랑방으로 안내하였다. 이미 약속이 잡힌 모양이었다. ―한편,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흥선군은 며칠 동안 두문불출하며 그림 그리기와 글씨 쓰기로 소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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