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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시대_01 (제33화)
대왕대비의 생전에 한껏 누려온 권력이고 보니 김좌근은 자신의 몰락을 예견하지 못하고 깊은 수렁에 빠져가고 있었다. 병지는 이런 숙부의 무모함에 대해 막아보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다른 한편으로는 섭섭함이 밀려왔다. 조부님의 반을 닮기만 하셨어도 이렇듯 집안이 등갈이 나지 않았을 텐데…… 아직은 생전에 계시는 어머니가 이런 말을 꺼내셨다. “하옥 숙부는 워낙 중구난방하신 양반이신지라. 우리 시아버님의 강직함을 물려받지 못하신 게다. 두 분 형님이 계시고 하다 보니 아버님께선 하옥을 소홀히 대한 것이니라. 그 덕에 다른 피붙이의 양자가 되어 출가하셨는데, 생가로부터는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하고 했으니 그 한을 권세로 돌려 그 앙갚음을 한 게 아니겠느냐? 그것도 모르고 철모르는 것들이 당숙에게 반기를 들려 하다니.” 두 사촌형제의 간곡한 설득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사이에 짐짓 산만해지기 시작하던 찰나였다. 어머니 말처럼 철없이 당숙에게 반기들던 철없는 동생들을 지켜보아야 하는 자신의 설움을 풀 새도 없이 병지는 동생들의 응석을 받아 주게 되었다. 동생들이 내민 건 바로 흥선군 석파의 난초 그림과 김정희의 추사체를 본뜬 글씨 몇 점이었다. 사촌 아우의 닦달하는 소리에 자세한 내막을 알기 어려웠으나, 이하응의 그림들인지도 모른 채 시원시원한 필체며 그림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지난 날 할아버지의 작품을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지난날 자신이 보아온 필체보다 색다름을 간파했다. 병지는 탄식조로 물어보았다. “이 그림은 무엇이냐.” 어리둥절해하는 아우들에게 재차 물었다. “누구의 그림이냐.” 경계의 눈초리로 묻는 병지의 물음에, “석파, 아니 흥선군의 그림일세.” 병국이 재빨리 대답하였다. 병지는 그제야 이하응의 실력을 인정했다. 추사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왕족이라는 위험을 안고 사는 이하응이 그 위험을 무릅쓰고 야인(野人)처럼 온 팔도강산을 누비면서 자신이 품에 간직한 천추의 한을 기존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가려는 도전정신이 돋보이는 것이었다. 이하전만큼은 아니어도 자신의 응어리를 이렇듯 한 폭의 글씨와 그림으로 푸는 하응의 진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사촌들의 간절함도 이와 같음을 느끼고는, “이 그림들은 시정에서는 값을 매긴다지?” 물어보았다 아우 병학이, “그렇소.” 맞장구쳤다. “한 폭 그림을 얼마에 매겨판다던가.” “비싸게는 다섯 냥이고, 싸게는 석 냥이 되오.” 순간 병지는 이맛살 찡그리며, “허허, 그런 법이 어딨는가?” 다그쳤다. 두 사촌아우들은 입에 든 침을 꿀꺽 삼킨다. 병지는 두 사람의 의중을 간파하고, “그 그림들을 이리 주시게. 한 폭에 십 냥씩 해서, 아홉 폭일세그려. 그림 내 구십 냥을 줄 것이로되, 우리 집이나 자네 집에 은신하도록 하세.” 그리고 “내가 직접 숙부에게 찾아가 자초지종 고하여 석파를 구명할 것이니 자네들은 잠자코 물러가시게.” 하며 병국 ․ 병학 형제에게 확답(確答)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자신은 직접 이하응을 보지 못하였지만, 소문만으로 익히 알아온 필부에 지나지 않았건만, 직접 흥선군의 그림들을 마주보고 하니 가히 천지를 진동할만한 실력임을 깨우쳤다. 이후 병지는 묵묵히 좌근의 패거리와 김병학의 패거리를 구분해내었다. 어떤 패는 썩은 동아줄을, 어떤 패는 단단한 동아줄을 움켜쥐었다. 이를 깨우쳤을 때 자신의 집안이 표면화되지 않았지만 두 패로 갈라짐을 느끼게 되었다. 사사롭게는 ‘구(舊)’와 ‘신(新)’, 더 넓게는 ‘보수(保守)’와 ‘진보(進步)’라는 두 개념이 충돌하는 국면에 속한 것이다. 사촌형제 두 명이 다녀간 뒤, 흥근의 손자 김병덕(金炳德)이 나흘 만에 찾아왔다. “아우님, 엊그제 등정 안하셨나?” 능청스레 병지를 떠보듯 물었다. “골치 아프고 몸도 안 좋고 하여 못 갔소만.” 병지의 대답에 “이하전이 사사되었네.” 재까닥 답했다. “뭐요?” 병지는 놀라고 말았다. 아차! 하였다. “뭘 그리 놀라시나?” 병덕이 전하던 청천벽력의 소식을 병지는 애써 피했다. 아니 피해야만 했다! “이하응은 어찌 되었소.” “이하응이 어찌 되다니?” “이하응이, 이하응이 그 사람만은 아니 되오!” 병지는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아랫것에게 좌근네 집에 가자고 닦달했다. 그러고는 쏜살같이 숙부에게로 가는 것이었다. 아우님! 외마디 소리치듯 아우님 하며 찾는 병덕이를 뒤로 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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