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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시대_01 (제29화)
한편 전권을 시어머니에게서 빼앗기다시피 한 조씨는 자신의 일가붙이들을 모두 죽인 안동김씨네에게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눈 밖에 나서 대궐에서 쫓겨난다면 그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끝끝내 인내의 세월을 지내는 것이다. 또, 보통의 일 같으면 일가족을 몰락시켜 버렸을 것을 시어머니는 당사자에게만 죽음을 내리고, 그 자손에게 살길을 열어주게 하셨으니, 왕대비 조씨로서는 곧이 절치부심(切齒腐心)하게 김씨의 몰락을 고대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런 그에게 한 차례 사건이 터진다. 상감의 승은을 입은 숙의 범씨가 아기씨를 생산한 것이다. 그러나 왕실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으니 왕실의 불행의 씨앗이 여기서 뿌려졌다. 더구나 옹주마마였기에, 간신히 얻은 귀한 아기씨였기에 상감의 깊은 상심은 하해를 아우르고도 넘침이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대왕대비는 어느 날 문안인사를 드리러 온 왕대비에게 푸념조로, “이게 다 내 탓이로다. 내 탓이오.” 하소연하였다. 그러자 왕대비가, “어마마마 탓이라니요. 당치 않사옵니다.” 시어머니를 다독거렸으나, 예전의 대왕대비가 아니었다. 한때는 헌종대왕과 상감을 연이어서 수렴청정을 행하여 놓고서 이제는 복에 겨워서 며느리에게 푸념하다니. 속으로 왕대비는 그예 노망드셨구먼. 하였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한 조씨였다. 만약 입 밖으로 나오면, 수많은 궁녀들이 듣고 입을 나불거려 밖으로는 김좌근 일파가 눈치라도 채어 아는 날에는 조씨 일가에게 더 큰 회오리바람으로 몰살시키려 들 것이기에 묵묵히 듣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하응의 청탁을 받은 월선이 어떻게 되었나? 월선이에게 탄로 날 것을 일찍 간파한 그였기에 자신의 아들 재선이를 대신해 자신의 맏조카 재원(載元)을 벼슬길에 있도록 하였다. 기실은 이랬다. 흥선군이 천하장안 네 사람을 거느리어 판을 벌리는 가운데 월선의 집사가 나타남을 직감하여 여보란 듯 조카 대신 아들을 벼슬에 청탁하겠노라고 지나가는 소리로 공안한 건데, 집사 박 서방이 곧이듣고 월선에게 고자질한 것이다. 다음날로 아무 일 없이 월선에게로 하응이 찾아오자 월선은 그런 이하응의 행동거지가 못마땅하여 “왜 거짓말했는?” 하고 물었다. 그런데 무슨 말이냐고 의아하게 하응이 맞받아치며 “잘못 듣지 않았습니까. 이건 아마도 쇤네의 목소리하고 닮은 작자가 있사온데 그 자가 제 흉내를 낸 모양입지요.” 그러나 월선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를 모를 리 없는 이하응이었다. 연신 땅바닥으로 통곡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자, 월선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하응의 소원을 이루어주었다. 그리하여 하응의 장조카 이재원이 직부전시(直赴殿試)하여 조정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하응에게는 회생할 수 있는 첫 기회였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이하응이다. 막내로 태어났지만 먼 미래를 바라보는 천리안(千里眼)을 가지고 장차 자신이 권력을 움켜쥘 수 있는 그날을 고대(苦待)하였다. 그런 그에게 왕실의 소식은 너무나도 갑작스레 찾아온 천재일우(千載一遇)에 가까운 소식이었다. 바로 상감의 유일한 혈육인 옹주의 급작스러운 하세 소식이었다. 더구나 왕자 아기씨가 아니니 다행이기는 했으나 안동김씨네들의 속내를 깊이 알 수 없으니 난감한 노릇이었다. 만에 하나 후사를 두지 못한다면 안동김씨들은 전국 방방곡곡 샅샅이 뒤져가면서 새로운 왕족을 찾아다니기 분주할 터이고 그리되면 왕실은 물론이고 나라 역시 안동김씨의 손아귀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더 깊은 탁류(濁流)에 휩쓸릴 지도 모른다. 탁류 속으로! 순간 하응의 눈은 불안에 얼룩지고 말았다. 과연 하응의 예지(銳智)는 맞아떨어졌다. 대왕대비가 후사에 대한 근심과 자신의 늙어감에 맞물려 병들어 눕고야 말았다. 대왕대비전에 들어선 어의가 왕실 여인네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진맥을 하였는데 고개를 가로 젓더니 “마마께오서는 소생하기 어려울 거 같사옵니다.” 하고 바로 아뢴다. 그러자 왕대비는 물론이고, 대비 홍씨와 왕비 김씨는 옷소매를 훔치며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에 급급하였다. 어떤 이는 애증의 관계로, 어떤 이는 왕실의 큰 어른을 잃는다는 슬픔으로 제각기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어의가 황급히 물러나는 틈을 타 상감은 대왕대비의 병환을 지켜보러 왔다. 마마의 위중함을 들은 터라 경황이 없었다. “어마마마.” 힘겹게 뱉은 임금의 말이었다. 대왕대비는 병환에 힘든 몸임에도 상감이 왔음을 알고 그제야 그 손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상감이 없었더라면 언제 어떻게 변할지 생각만 하면 앞이 캄캄해져왔다. 그렇기에 자신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다스리는 지금이 더욱 낯설게도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누려보지 못한 권세를 대신하여 누릴 수 있게 되다니. 꿈일지도 생시일지도 모르는 이 현실. 이 현실을 두고 자신은 눈을 감아야 한다. 하지만 마치 한낱 미완성으로 끝나는 것과 같은 헛헛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후계자 문제였다. 자기가 죽기 전에 후계자를 세우고 가야만 하건만 그건 자신의 힘으로는, 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다. 그렇다고 왕대비에게 섣불리 맡기다가는 자신의 뜻대로 다 할 수 없을 거 같다. 하기야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사람의 깊은 속을 모른다는데, 어떻게 며느리에게 후사를 맡기고 갈까. 앞이 캄캄해짐을 느낀다. 자신이 죽고 나면 상감에 버금가는 왕실의 후계자들이 눈에 환히 보이도록 왕좌를 두고 덤비지 않는가. 대왕대비는 곰곰이 생각해보고 생각해본다. 우선 이하응 형제를 떠올려본다. 그런데 형제 중 유독 이하응이만은 워낙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나대는 통에 왕위에 설사 올라간다손 치더라도 안동김씨들에게는 오히려 골칫덩어리로 취급되어 왕좌와는 거리가 꽤 멀 것이다. 다음에 이하전이 있다. 이하전은 제법 총명하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왕실과는 방계(傍系)에 지나지 않으니 설령 순조대왕의 양자로 입적될 뻔 했다손 치더라도 대왕대비의 눈에는 성에 차지 않을 존재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대왕대비는 점차로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옴을 몸소 느끼게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내 손으로, 내 손으로 후계자를 지명해야한다. 아니 된다!’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치며 대왕대비는 싸움을 벌인다. 숨을 헐떡거리는 대왕대비의 곁에 때마침 왕대비가 있었다. 고부(姑婦) 사이에 있는 두 사람이지만 한때는 경쟁자였고 한때는 쌍과부로서 같은 아픔을 나눈 동지나 다름없게 살기도 했었다. 그랬기에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 처지에 있건만 대왕대비는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치며 “대, 대비……” 다급하게 조대비를 불러댔다. 대비 조씨는 시어머니 곁에 차츰 다가왔다. 시어머니는 “이, 이하응을 조 조심하시구려!” 하였다. 조대비는 무슨 내막인지 모른 채 그저 듣기만 하고 이를 알 리 없는 대왕대비는 “이하응은, 이하응은 본시 기 깊이를 알지 못하는 위인이오. 어떨 땐 원한을 가진 듯 하고 어떤 때는 변화무쌍하게 사람을 묘하게 교활하게 처세를 잘하는 모양이오. 그 와중에 미치광이로도 지내는 모양이던데 그 미치광이는 참인지도 아닌지도 모르겠소. 한데 요 근래에 와서 보니 하 하응이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오.” 숨을 헐떡이며 뇌는 것이다. 어떻게 맞아떨어졌는지 먼 훗날 이하응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움켜쥐어 안동김씨 세력을 혁파하는데 일조하고, 안동김씨의 손아귀에 의해 신음하다시피 한 조선을 중흥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인 혁혁한 공로를 지닌 그였건만, 자신의 무소불위에 지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권세에 못 벗어나 권력욕(權力慾)에만 집착하게 되는 인상을 드러내게 되니 명경대왕대비의 예언은 적중한 셈이었다. “그 그러니 대비, 대비께서는 하응이에게만은 보위를 물려주지 않으셔야 합니다. 아시겠소. 대비?” 횡설수설하는 대왕대비의 명에 그저 왕대비는 네 하고 대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상감.” 속삭이듯 대왕대비는 상감을 불렀다. “상감.” “네 마마.” 울음 섞인 채 상감이 대답한다. “상감은 이 나라의 지존이시오. 그러니 지존답게 온 금수강산을 잘 다스리시어야 합니다. 상감, 상감은 스스로 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으십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는데.” “마마, 말씀하소서.” “후 후사를, 후사를 이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왕실이 삽니다. 하루 속히 후사 후사를 두셔야 합니다. 상감.” 이제 대왕대비의 운명은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상감, 부디 이 어미의 말을 들으시오.” “……네 마마.” 상감의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상감…… 부디 이 나라를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하루 속히 후사를 두시어 강건한 군주가 되시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상감……” 대왕대비는 이 말을 남기고 창덕궁 양심합(養心閤)에서 예순여덟을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훗날 그녀를 순원왕후(純元王后)라 불리니 상감이 내린 시호이기도 하다. 대왕대비의 하세를 계기로 안동김씨는 위기를 맞이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야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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