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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 시대_01 (제28화)
"나이가 더 들어서야 수렴청정을 거둘 까닭이 없으니까 자중하세요. 무지한 아녀자가 언제까지 정사에 관여하겠습니까. 한두 살 갓난아이도 아니고 약관보다 훌쩍 넘은 상감이거늘. 이 늙은 몸으로 나라를 운영하였으니 이만하면 됐습니다." 대신들을 타이르며 대왕대비는 정중히 사양하는 것이었다. 하기는 그랬다. 영조의 계비로서 정조 사후에 정권을 잡아 어린 순조를 앞세워 섭정한 예순대왕대비(睿順大王大妃)가 수렴을 거두다 다시 나선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김조순이 국구로 우뚝 선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고, 그 주위에 김조순을 따르는 신료들이 포진되어 있었기에 마지못해 거두었다지만, 현 시국은 그 누구 하나도 반대하는 이 없고, 김씨의 틈바구니에서 튀면 곧바로 멸문지화 당하는 형국이니 제 앞에 것에만―제 일신에만 얽매어 "예!" 하고 대답만 할 뿐이다. 이러한 나라 사정을 보다 못해 왕족들, 그 중에서도 왕의 후계자로 점철된 왕족들은 제각기 다른 행보를 보였다. 우선 흥선군 이하응은 밖으로 활보할 때 항상 누더기 옷을 입고 김씨와 그에 아부하는 실력가의 집으로 가 걸식을 일삼아 주위의 원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이하응의 속내는 무엇인가 감추어진 진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하응에게 부인 민씨와의 슬하에 네 남매를 두었다. 첫째와 둘째는 딸이고, 셋째와 넷째는 아들인데 그 중 첫째와 둘째는 장성하여 출가하고, 셋째이면서도 맏아들인 이재면은 이제 갓 열 살이고, 막내이며 아들인 명복은 이제 다섯 살로 마당을 휘젓고 뛰놀 수 있는 상태였다. 이것이 그의 참 진실이었다. 자신은 헌종대왕 생존 시에 임금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아 조정의 대소사를 관장할 뿐만 아니라 종친의 한 사람으로서 왕실의 안정에 도모하고자 많은 노력을 해온 자신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이번 행보는 주위 사람들로부터는 당혹을 넘어 불안과 혼란, 그리고 공포로 다가온 것인지도 모른다. 서방―아니 지아비의 갑작스런 돌발행동에 실성했다며 울부짖었던 부인은 이제 그런 서방의 의중을 간파하게 되었다. 그 역시도 무지한 아낙이라지만 서방의 깊은 뜻을 그제야 깨우친 것이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모른다. 어쨌든 흥선군의 이런 돌발행동에 웃음으로 답한 김씨들 틈바구니 속에서 부인은 그저 서방의 무사하기만을 빌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하나 위안이 있다면 다행한 일이나 조정에서는 한때 금기시하던 서학을 믿는 독실한 신도였다. 천주님을 믿는 독실한 신도였다. 그래서 남몰래 다른 반가의 부인 몇몇을 불러다가 그 교리를 깨우치고 하며 하느님의 섭리를 차츰 알아가기 시작했다. 서방의 돌발행동도 행동이지만 무엇보다 그 속에서 지내야만 하는 아들들에게 풍파 없는 세상이 오기를 고대하는 간절한 마음이 매우 앞선 것이다. 이런 내막이 있기에 이하응은 이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문전걸식을 일삼아왔다. 물론 일부 대신들은 그런 그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김좌근의 양아들인 병기였다. 하루는 병기가 대놓고 흥선군의 미치광이 행위를 두고 욕지거리를 해대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보다 못한 김병학이 "그래 실컷 욕지거리를 하시니 속이 후련하신가?" 비아냥거리는 게 아닌가. 병기는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자네가 하도 문전박대를 일삼고 해대니 그 양반의 심정이 오죽이나 답답하셨을꼬." 하고 병학이 헛기침을 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찾아간 곳은 뜻밖에도 운니동의 흥선군 집이었다. 전날부터 줄기차게 내리치던 빗줄기가 오전에 가서 차츰 가라앉더니 대낮이 되고부터는 날이 개었다. 그 덕에 공기는 상쾌하기 그지없고 조용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그 집 문 앞에 다가가 "계십니까." 하고 기척을 내어 보았다. "뉘시오?" 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리고 "김병학이올시다." 하고 다시 기척을 내니 안에서 놀란 듯 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구, 이 누추한 곳에 어인 일로." 민씨가 반가워하며 맞이하자 "안에 대감 계시오리까?" 미소가 만개한 채로 병학이 대감을 찾는 것이다. "우리 대감께서는 잠시 출타 중이시기는 합니다만." 하고 민씨가 서 서방을 찾는다. 서 서방은 이하응의 집에서 잠시 심부름꾼으로 부리는 사람이었다. "네, 마님." 서 서방을 부른 민씨는 대감을 뫼시고 오라고 재촉하였다. 이윽고 서 서방이 들입다 밖으로 나가자 민씨는 대감이 머무시는 방으로 안내한다. 안내받은 김병학은 집을 휘―둘러보았다. 집안 규모는 여느 왕족들의 집과는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흥선군이 자신의 재산들을 오직 자신의 기행으로 일삼아 가며 탕진하듯 쓴 바람에 일전에 있던 몸종들은 하나둘 나가떨어지고 지금은 사분의 일에 차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처지가 딱해 김병학은 은밀히 흥선군 이하응의 집을 마치 제집인 것처럼 수시로 드나들었던 거다. 드나들면서 남몰래 흥선군 부인에게 엽전도 몇 푼 쥐여 주고 집안 아이들에게는 다정한 삼촌처럼 대하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병학의 동생 되는 김병국(金炳國) 또한 성정이 따뜻하기에 흥선군 일가에게 솔선수범(率先垂範)으로 자신에게 있는 재산의 일부를 하응의 일가에게 주기도 한 것이다. 그런 형제의 마음을 민씨를 비롯해 그 부군 되는 하응도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지만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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