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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 시대_01 (제27화)
월선은 참고로 좌근과 살림을 달리하여 따로 집을 마련했기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본처와 문중에서 성화를 내어 얼떨결에 얻어낸 병기(炳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좌근에게 병지는 안부를 물으며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것이다. "제가 만약 과거에 급제한다면 숙부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참이옵니까?" 조카의 물음에 영문을 모르고 놀라던 좌근은 태연함을 잊지 않고, "그러는 조카님께서는 어찌할 참이오?" 갑자기 숙부님이 존댓말을 하니 당황스럽기 그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의중을 밝힌다. "제가 벼슬을 하게 된다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숙부님과 같은 삶을 살지 않도록 모범을 보일 겁니다." 공연히 질문을 던진 좌근이 조카의 본색을 보고,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던 조카가 자신을 견제할 세력이 될 싹수가 보임을 알고 난 뒤 등뒤에 식은땀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간담이 서늘하다. '병지가 제 아비를 잃어버리고 나더니 이제는 간이 배밖으로 나왔구나. 이 ×××× 같으니.' 병지를 대하는 자신을 어리석게만 바라보았다. 좌근은 조카에게 놀아나는 자신을 한심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병지는 갑자기 파안대소를 하는 게 아닌가. "하하하하……" 집이 떠나가라 웃어 제끼는 조카를 좌근은 한심스런 눈초리로 "이×! 네가 웃어른인 나를 하찮게 대하려 드느냐!" 비아냥거리게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런 조카를 한집에 두게 할 수는 없으니 썩 물러가거라, 이×!" 좌근은 푸대접을 하려고 용쓰는 게다. 하지만 병지는 제가 앞장서서 좌근에게 잘못함을 고한 뒤 단 하루만이라도 자신이 머물 수 있도록 허락받고자 하였다. 핏줄은 부정하고 싶어도 당기는 법. 좌근은 마지못해 미우나 고우나 조카이니만큼 악감정을 거두고 조카에게 다른 방으로 안내하여 머물도록 했다. "누추한 방이다만 우리 조카님이 지나가는 객손이고 하니 너그러이 이해하시게." 웃음기 띤 얼굴로 좌근은 조카 병지에게 한마디하고는 밖을 나섰다. 좌근의 말마따나 누추한 방이기는 했다. 하지만 숙부 좌근이가 아랫것을 시켜서 방바닥을 뜨뜻하게 데우도록 명한 까닭이 있었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방 안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눈앞에는 촛불이 쉽게 꺼질 줄 모르는 기세로 켜져 있어 방을 밝히고 있고, 자기가 앉은 그 앞에는 서안이 놓여 있고 그 위에 이름 모를 서책이 놓여 있었다. 자리 맞은편에는 이불장만이 소박하게 있으며 이불은 이제 갓 사들인 듯 새것으로 놓여 있었다. 병지의 집은 할아버지 조순의 무덤인 경기도 광주 땅 한적한 시골에 있었다. 누추한 살림이지만 어머니는 양반가의 규수였지만 삯바느질로 살림을 근근이 이어나가는 실정이었었다. 아랫것 몇몇은 다른 친척에 보내버리고 두세 사람의 하인들만을 거느린 채 광주 땅으로 서둘러 내려가고 말았다. 그 때문에 병지는 한양 근처에는 얼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거다. 푸대접을 받을 것만 같았던 좌근의 집에 들어선 병지는 방을 나서서 좌근의 집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예전 할아버지 생전에 사시던 집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고품스러움은 여전하였다. 빗질하던 남종 하나가 굽신거리며 도련님에게 인사한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인사를 받은 병지는 시종일관 집들을 휘―둘러보는 걸로 소일을 삼았다. '아버님, 장차에 제가 벼슬을 하게 된다면 이만한 집인들 못 구하겠습니까. 아버님께 큰 보답을 해드릴 것을 거듭 맹세하옵니다.' 병지의 두 눈에서는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날 밤부터 병지는 밤새도록 촛불을 끄지 않고 자신이 손수 준비해둔 서책으로 차근차근이 과거 공부를 하고 있었다. 문밖에 밝힌 병지의 거처방에 흐뭇한 모습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바로 좌근이었다. 좌근의 집에 당도하고 이틀도 채 안 돼 숙부 좌근의 집을 나선 병지는 자신의 의지대로 조정에서 치러진 과거에 응시하였다. 자신 있게 과거장에 들어가 자기 자리에 앉은 그는 영의정 김좌근의 음덕에 힘입은 까닭도 있었지만, 오직 자신의 역량으로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과거의 시험장에 빽빽이 들어선 유생들 틈바구니에서 치른 병지는 초지일관 정신을 올곧게 하여 치른 뒤에 당당한 마음으로 과거 시험장을 나섰다. 이후 병지는 곧장 좌근에게 인사를 아뢰지도 않은 채 곧장 광주 땅으로 향하였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에 대사성을 지내는 당조카 김병학(金炳學)이 하인을 불러다가 당숙인 좌근이 계시냐고 묻고 계시다는 대답을 들은 뒤에 사랑에 들어섰다. "당숙님. 좋은 일이 있어 이리 긴히 찾아왔습니다." 좌근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시시때때로 찾아 드나드는 병학이니만큼 그저 경청만 하는 것이 능사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신가?" 태연히 병학의 대답을 들으려고 하자 홧김에 "병지가 과거에 급제했다 하더이다." 대답해버리자 좌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조카의 말에 놀라며 거듭 물어보았다. 그렇다니까요 하며 병학이 큰웃음을 터뜨리자 좌근은 그제서야 흐뭇한 웃음을 띠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내 조카가 당당한 안동김씨의 자손이어늘. 벼슬인들 못할 손가. 장하시군. 우리 조카님. 유일한 우리 집안의 장손.' 병지의 새로운 길을 빌어주는 좌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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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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