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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안] 종이꽃 제04회
『신문요―』 『찹쌀떠억― 메밀무욱―』 배달꾼들의 외치는 소리가 적막한 이곳을 에워쌌다. 달동네하고도 중간턱에 자리한 엄광숙의 집에서는 아침을 준비하려는 준비로 늘 분주하다. 광숙은 이곳 부산에 온 지 이년이 채 안된 앳된 처녀였다. 그는 하동읍내에서는 진사 어른으로 통하는 엄훈장의 비호 아래 외동딸인 광숙을 금지옥엽으로 길러냈다. 본디 아들이 귀하기로 소문난 그곳 양반가에 있어서 이 상황은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노릇이었다. 그런 광숙의 처지를 어머니 되는 선산댁이, 『저런 인품이면 사내아이로 낳아도 손색이 없으련만.』 푸념하고는 했다. 그러나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광숙은 아버지의 의중을 잘 알고 있던 터로 부인의 사랑 이상으로 대해왔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상잔이 터지고 나서부터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빨치산을 숨겨주었다는 혐의로 잡혀가 그만 국군에게 끌려가 강가에서 총살당하고 말았다. 이런 갑작스런 일이 벌어지자 모녀는 장례를 치를 새도 없이 제 몸을 피해 이곳 부산에 이른 것이다. 부산에서 광숙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막판노동까지 했다. 이제 귀하게 대해주었던 아버지가 없음이리라. 해서 그는 어머니를 먹여 살리고자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녔다. 하지만 쥐꼬리만한 돈으론 모자가 먹고 입기에는 한없이 부족했다. 『쯧쯧쯧…… 모녀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 텐데 젊은 처자가 시집은 가야』 역시 철딱서니 없는 정자관을 쓴 채 혀를 끌끌 차던 한초시의 입방정에, 『저놈의 영감탱이, 지보다 뭐가 좋다고 잔소리고.』 빈정대던 선산댁은 부엌으로 달려가선 두레박에 담긴 굵은 소금을 한바가지 들어다가 한초시의 면전에다 뿌려댄다. 『이, 이런 고얀! 양반가 규수라고 오냐오냐 했더니 이것이 실성했나.』 늙어 힘이 없는 한초시에게 한판 벌인 선산댁은 그날로 자리에 몸져누웠다. 흰 천으로 만든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서 말이다. 이 사실이 온 달동네에 전해지자 동네 사람들은 그의 집에 다다랐다. 사립문에서, 『허허, 한초시한테 분풀이하고 자리에 눕다니.』 『하기야 한초시가 너무했지.』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광숙네 집은 그저 적막할 뿐이었다. 일파만파로 한초시의 원성이 자자한 거리에서, 송의원은 대낮에 난데없이 길거리에다 동이에 든 물을 뿌려댔다. 이때 공교롭게도 길을 지나가던 한초시의 모시 바지에 물이 튀고야 말았다. 『이 이런, 아둔한 놈 같으니!』 선산댁에게 한바탕 시비를 걸다가 졸지에 봉변을 당한 한초시는 심통이 난 채로 송의원을 노려본다. 『어허, 내 미안하이. 내 눈이 거의 멀어서 근처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지라. 어쩔 수가 없었네.』 『구놈의 앞을 못 알아본 게 벼슬을 한다더냐!』 앙칼진 목소리를 치켜 올리며 한초시가 화를 냅다 낸다. 『아니 미안하다면 잠자코나 있지. 왜 나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가.』 덩달아서 송의원도 화를 낸다. 『이, 이런 죽일……』 하고 의지하던 지팡이를 냅다 들어다 송의원의 머리 정수리를 때리려다 그만 제풀에 죽고 만다. 결국 송의원이 한초시가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 물어보니 선산댁에게 봉변을 당한 이야기를 구구절절 읊조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사단이 났구먼. 자네가 너무한 것도 사실이네만 거 훈장 마누라라는 선산댁도 그보다 더했으니.』 곰방대를 피워물던 송의원은 제 방에 들어가서 흰 두루마기를 들고 왔다. 『자네 입은 그 두루마기를 이리 내주고 내가 입었던 두루마기를 가져가게나.』 한초시가 입은 두루마기보다 더 고급인 모양이었다. 『사실 내 조카사위가 몇 년 전에 큰 공장을 했다네. 그러니까 그 전에 찾아와서는 내게 이 두루마기를 준다는 게야. 그래서 받고나서 입어보니 이 쌀쌀한 날씨에는 좋더구먼. 그래서 입던 것인데 자네가 그리 누추하게 다니니 내 보기가 안쓰럽지 않나.』 눈시울을 붉힌 채 드러낸 송의원의 태도에 초시는 그만 넋을 잃었다. 『자네한테 장가를 들지 않은 노총각인 아들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자네가 너그럽게 그 선산댁을 이해해주게나. 내 내일 그 집에 가서 담판을 지으리다.』 그래서 한초시는 울화가 치미는 것을 잠재운 송의원의 너그러운 성품에 그만 덩치 큰 아이 못지않게 울어버린다. 이 소문을 들은 공참봉의 부인과 조서방댁의 안주인인 혜산부인(惠山夫人)이 덩달아 광숙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님, 이게 워찌된 일요?』 공 참봉네 부인 나씨(羅氏)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넨 가만히 있게.』 교양이 별로 없는 나씨에 비해서 혜산부인은 보다 침착한 어조로 선산댁에게 물어본다. 『광숙이가 집에만 돌아오면 공장일 헌다고 누워 뻗잖여. 그걸 보고서두 한초시란 인간이 내 딸을 시집보내려고 혈안되어 있으니. 내가 어디서 입에 풀칠을 한단 말요.』 순간 발끈한 건 나씨였다. 『그거사 성님 팔자가 아뇨. 밖에 나서가 날품이라도 팔아내려고 함스로 악착겉이 살아야제. 요로코롬 콕 백혀 있음 죽은 서방님이 오신다요!』 전라도 말씨의 그 거친 말투에 광숙이 어머니는 입에 거품을 문다. 『나가 스물에 청상이 되어서 이날 이때껏 살아보지도 못했드니만.』 『그게 벼슬이오? 그렇담 당상이나 걸타나 앉았것소!』 덩달아 나씨도 거품을 문 채 대꾸한다. 『거 시끄럽지 않던가.』 나씨를 말리고서, 경우가 바른 반가의 며느리답게 혜산부인은, 『한초시가 문제이긴 하나 가장 큰 문제가 광숙이 엄마 자네에게 있는 듯하니, 광숙이 그 고운 손으로다가 살림을 떠맡기기만 하지 말고 이녁도 일을 해보고 그러시구료.』 『일은 무슨 일요?』 눈이 뒤집히듯 광숙어머니는 덤벼든다. 『베틀을 짜는 것도 일이고, 인부들 먹이는 것도 일이지 않던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애써 혜산부인이 달래고 으르기도 했으나 우이독경(牛耳讀經)인 양 광숙어머니의 말에는 하나의 희망도 없어보인다. 『성님 갑시다.』 나씨는 들입다 문밖을 나섰다. 하지만 제 꽁무니를 감추었던지 나씨는 다시 방에 들어오질 않았다. 대략 한 시각이 지나서야 혜산부인은 일어나 밖을 나섰다. 마당에는 나씨가 갔는지 적막하기만 하다. 엄훈장이 반가 출신으로 노비만을 부려먹기만 했던 광숙어머니에 비해서 혜산부인 자신은 오직 살림이 좋아서 살림을 꾸려갔더랬다. 그는 머나먼 이북에서 상민이라는 신분으로 시집을 와 시어머니의 고초당초 맵고 맵다는 시집살이에 지치기도 했지만 제 자신만을 바라보고 좋아했던 지아비를 바라보고 살아왔다. 그런 그녀였지만 대대로 뼈대가 있는 양반가에서 자라난 조봉구(趙鳳久) 영감은, 오히려 노름에만 눈이 팔려 처자식들을 먹여살릴 새도 없었더랬다. 하지만 혜산부인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때마침 전쟁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이들의 본디 고장인 황해도 해주에서 피신을 해와 부산에 이르렀는데 그녀는 닥치는 대로 삯바느질서부터 못하는 일이 없을 정도로 돈을 벌어모았다. 그 죄업(罪業)을 감당하기 힘들었던지 조봉구 영감은 그만 자리에 몸져 누워버렸다. 병명은 반신불수(半身不隨). 그럴 때마다 혜산부인은 「저 영감이 하루빨리 죽어야지.」 속으로 속삭이고서도 봉구 영감을 돌보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외아들인 웅규(雄奎)는 늦게 얻은지라 겨우 초등학교에 졸업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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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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