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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안] 종이꽃 제03편
동란이 일어난 지 2년이 될 즈음. 부산 한복판에 자리한 이 마을의 사람들은 서로를 왕래하지 않기도 하고 왕래하려고도 한다. 이곳 마을은 바닷가가 훤히 보이는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따로 없을 정도라고 생각할 정도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므로 이곳에 살기는 힘들지만 새로운 희망을 안고 개척해야만 하는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언덕배기 아래에 훤히 보이는 푸른 바다물결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로, 엊그제 몸을 다친 한서방의 집이 유명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한서방은 딸 영이의 도움으로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영이의 나이 올해 열여덟. 최근에 송의원네 부인인 이씨가 중매를 제의한 일이 있었다. 마음이 너그럽기로 이 마을에선 네 손가락으로 꼽히는 이씨는 음식솜씨가 매우 좋아 주변의 마을사람들을 불러다 잔치를 벌이곤 했었다. 이에 한 서방은 그런 부인을 둔 송의원을 존경은 하면서도 도리어 신세를 짊어지고 싶지 않은 터에 오로지 양의에게 치료받는 것으로 고집을 대신하는 터였다. 하지만 같은 동료인 윤서방의 말마따나 송의원에게 신세를 져야만 했다. 변변찮은 살림에 송의원의 베푸는 삶을 그는 본이라도 받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버지, 괜찮으시당가요.』 딸 영이는 아버지의 병시중을 잘 들어주었다. 무엇보다 한서방의 근심은 다른 데에 있었다. 그에게 마누라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전라도하고도 목포에서 마누라를 중매로 만나 결혼을 하였는데, 해방 직전에 태어난 아들 동이와 그 이듬해에 난 딸 영이를 두고 처가에 있는 순천에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삼년이 넘어간 즈음에 폭동이 일어나자 여러 번 죽을 고비에 부딪쳐야 했다. 「졸지에 전쟁이 일어나겄네!」 오로지 자식을 보호해야만 한다는 것에 얽매인 이들 부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무사히 목포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전쟁이 터지고 순식간에 공산군이 남하하자 이들은 하는 수 없이 피난을 하고야 말았다. 그래서 흘러내려온 곳이 부산이었다. 부산은 한서방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이곳은 전라도에 비해서 비옥하지도 않고 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힘깨나 쓰는 노동자로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풍진 세상에서 그는 끼니를 걸러 가면서 식구들을 극진히 키워내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했던지 마누라를 여의고, 연이어 아들도 장례도 채 끝내기도 전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놈으 세상아! 워쨌기에 죄없는 내 자식들꺼정 빼앗는당가.」 방바닥을 치며 울부짖고 말았다. 걸핏하면 술을 마셔댔고 자포자기의 삶을 이어갔다. 하지만 딸 영이가 의젓하게 큰 까닭인지 한서방은 비로소 다시 일어섰다. 한서방의 단 한가지 소원이라면 하루 빨리 시집을 가는 것이었다. 「아가야, 제발 이 애비 걱정 허덜 말드라고」 해서 영이는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주려고 노력하였다. 맘씨가 좋고 손맵시가 고운 영이는 그러나 집안이 기울어진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이 가장인 상황에서 갑작스레 시집을 간다는 것이 일종의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한서방에게 천우신조 같은 일이 생겼다. 집 근처에 살고 있는 주 대감네에서 자신들의 집에서 일하던 아낙 하나를 보내주었다. 마누라를 잃어버렸던 한서방에게는 큰 행복이었다. 화순댁이란 이름의 이 아낙은 일찍 남편을 여의고 청상으로 살던 가엾은 이였다. 나이는 갓 서른이고보니 영이한테는 못내 미안스럽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적적허신듸 아주머니가 오신다고 투덜거린다요. 걱정 하시지 마셔요」 딸이 아버지의 심정을 읽어주니 감개가 그저 무량했다. 이튿날로 혼사 치를 날을 잡기로 했다. 이때 기뻐한 건 주대감네 집이었다. 「아이구 한서방이 자네헌테 시집을 간다고 하다니. 다 신령님 덕이다.」 주대감네 집 마나님인 민도숙이 기뻐했다. 민도숙은 여수에서 어업으로 갑부가 된 아버지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학업을 마쳤다. 십여년 전에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부군인 주봉호 씨를 만나 결혼하였다. 그러고는 연년생으로 세 자식을 두었다. 맏이 호범은 친정인 여수에서 총격사태가 벌어진 바람에 친정 식구들과 같이 모두 몰살당해 죽고 말았다. 그래서 딸만 둘이 남았다. 대가 끊긴 바람에 주씨 집에서는 몸종을 두지 않기로 했다. 그런 터에 이곳 부산에서 딸 정희의 도움을 간신히 받고 살았다. 하루는 어둑해질 무렵이었는데 정희가 일찍 집에 돌아오고서 집안일을 하고 있었더랬다. 『계란 사려―』 그때 언니의 심부름을 받고 영화가 밖으로 나서던 차에 계란장수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문밖으로 갔다. 좁은 골목을 지나가는 계란장수를 불렀는데 등에 지고 있는 짐을 지고는 『계란 사렵니까?』 하였다. 그러자 영화는 제 바른손에 움켜쥔 몇 푼 안 되는 지폐를 펴서 주고는, 『하나만 주세요.』 하고 주었다. 그때 『예, 여기』 하려다 계란장수는 고개를 들고서 낯이 익은 아이를 바라본다. 열 세 살의 이 아이는 누군가 하고 싶었다. 『저 혹시』 하더니, 『작은 아기씨 아니당가요?』 영화를 바라보며 장수가 물어보는 것이었다. 이 장수가 제 이름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영화는 멍하니 그를 바라본다. 『그, 그럼. 봉달이 아저씨?』 그러자, 『아, 아씨, 저를 기억하시어라.』 하며 계란장수는 기쁨의 눈물을 뿌렸다. 그리고 놀란 영화가 그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서더니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로 『엄마― 아빠― 언니― 여기 봉달이 아저씨가 왔어요―!』 그러자 온 집안 식구들이 우르르 마당에 달려갔다. 정희는 설레발로 아저씨를 맞이했다. 이때 봉달이 무릎을 꿇은 채 『아기씨. 그간 강녕하셨으라.』 하며 전라도 억양의 그는 정희에게 넙죽 절했다. 『아저씨, 이러지 말구 아버님을 뵈어요.』 울음을 그치지 못한 봉달은 두 아기씨의 부축을 받으며 주인인 봉호 영감에게로 다다른다. 정희가 아저씨가 왔다고 하자 봉호 영감도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않았다. 『아이고, 영감님―』 눈물을 채 토해내지도 않은 듯 시원히 토해낸 그는 안부를 물었다. 『나야 별 탈 없잖은가. 그나저나 내 아들놈이 없으니 그게 천추의 한이다.』 영감의 이 말에 마누라는, 『밤이면 밤마다 영감은 아들을 잃었다고 원통해하지 않을 수 없으셨으이.』 거들어주었다. 그러잖아도 봉달은 일용(日傭)으로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못해 부산 한복판에 다다랐다. 부산에 있는 모처에서 계란장수가 필요하다는 것에 이끌려 그는 이렇게 이곳저곳을 찾아가며 계란을 팔아먹으며 살곤 했다. 그러나저러나 봉달은 그저 주 대감네 집에서 기숙(寄宿)하는 것이 더욱 좋았더랬다. 나이는 불혹을 갓 넘긴 그는 어디 출신인지도 모르는 ‘마희’라는 여자와의 사이에 갓 두 살이나 된 딸 하나를 두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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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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