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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안] 종이꽃 제02편
그 어미에 그 자식이러니 생각하고 있었다. 연심이네 셋방은 이층집인 옥선네 집의 윗방이었다. 옥선은 계단에서 내려와선, 『여긴 웬일이야?』 하고 물었다. 진해댁이, 『부탁한 것 땜에 왔소만.』 진해댁은 요새 돈이 궁하여 옥선에게 찾아오곤 했다. 타지에서 몰려온 노동자들로 인해 요즘에는 돈을 주기가 궁핍한 터였다. 노름도 하지 못하는 석덕으로서는 난감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때려치울 수도 없는 노릇이기도 하니 그는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옜다!』 그런데 『성님, 우리 만국이 일자린』 그러자 옥선이 『노가다 밖에 더 되냐.』 비아냥거리듯 옥선의 입에서 말이 떨어졌다. 진해댁은 하는 수없이 돈만을 얻은 채 터벅터벅 그 집을 빠져나왔다. 이로부터 사십 미터 쯤 떨어졌을까. 그곳에선 어수선함의 기운이 감돌았다. ‘송의원’이란 간판이 내걸린 점포에서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급한 발걸음으로 달려오는 나그네가 있었다. 『선생님요!』 경상도 말씨의 이 사람은 등에 누군가를 업은 채 급히 송의원에게 찾아왔다. 『어쩐 일요?』 송의원이 그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이 사람이 다리를 삐었나본데.』 다급하게 답하고는 업힌 사람을 마룻바닥에 눕혔다. 송의원도 이를 거들면서 환자를 진맥하고 진찰했다. 양팔을 진맥했다. 여기저기 둘러보고 만지고 하자 환자가 인상을 찌푸린다. 『팔이 빠졌구먼.』 하며 기가 차서 혀를 끌끌 찼다. 『아 이 사람아, 저쪽 양의원엘 갈 일이지.』 때마침 가게 옆을 지나던 정자관(程子冠)을 쓴 한초시란 사람이 소리쳤다. 『아 양의원이 닫았으니 예로 온 게 아뇨.』 퉁명스럽게 나그네가 답했다. 그러자 송의원이 이에 아랑곳없이, 『침만 잘 놓고 팔을 맞추면 되니 마음 놓으시오.』 환자를 안심시키고 침을 몇 방 놓고 뼈를 덜그럭 맞추었다. 끙끙 앓던 환자는 그제야 기분이 편안한 듯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이 잊겄소.』 하며 전라도 말씨인 환자가 고마움을 표했다. 『어이구, 별 말씀을.』 송의원은 항상 웃으며 『약 몇 재 드릴 테니 잘만 먹는다면 나을 게요.』 하여 한약 몇 재를 손수 싸주었다. 돈은 물론 받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안심하고 걸음을 옮겼다. 『어이구, 한서방. 그나마 다행이다.』 경상도 말씨의 사내가 던진 말이었다. 이렇게 송의원은 비록 한의사이지만 그의 치료하는데 있어서 효험을 보았다는 이들이 수두룩하였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그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도 한 것이다. 물론 치료비는 싸게 해주기는 한다. 그나마 한서방과 같이 항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삯을 받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여느 양의사나 한의사는 이를 마다하고 돈을 받겠지만 송의원의 그 강직함에 주변 사람들은 그를 의성(醫聖)으로 받들 정도다. 이를 항상 지켜본 한초시는 그런 송의원을 시샘어린 눈으로 바라보곤 한다. 그래서 티격태격하기도 한다. 아무튼 한초시와 송의원은 모두 한동네서 나고 자란 이들이다. 저 멀리 지리산에서부터 부산에 흘러온 것은 순전히 돈 때문이었고, 이들 모두가 외아들을 얻어놓던 터에 아들들이 사업을 한다고 해서 돈을 대준 것이 화근이 되어서일 뿐. 각자 소일거리 삼아 본업에 충실한 것뿐이다. 송의원은 그래도 지리산에서 배운 의술로 이렇게 돈을 벌어먹고 살지만 한초시는 한량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송의원은 곰방대를 꺼내어 담뱃잎을 꾹꾹 눌러 담아서는 불을 지피며, 『자네 다 된밥에 재를 뿌릴 텐가.』 하며 느긋하게 말을 걸었다. 『내 미안하이.』 한초시는 그런 송의원의 강직함을 제 고집으로는 꺾지 못함을 깨달았다. 하지만 한초시는 송의원의 내막을 잘 알고 있기에 가급적이면 입밖으로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아들 세복은 외아들이지만 평소에 밖으로 나서기를 꺼려하여 송의원 내외의 가슴에 근심을 심어준 업보에 지나지 않았다. 「도대체가 저 녀석이 어떤 머리로 하기에.」 어른들의 잔소리로 골치를 앓고는 몸저 눕곤 한 그였다. 그런 아들을 송의원은 한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아들을 연민으로 볼 뿐. 『그나저나 자네 아들은.』 『요새 바쁜가보이.』 『뭐가 바빠?』 『제 동무들하고 바깥바람을 쏘이고 오겠다고 몇 시각 전에 나갔으이.』 『자네 아들이 집안을 잘 일으켜야할 텐데.』 『근데 봉주는 뭐하나.』 『며칠 전에 직장을 얻었다는구먼.』 직장을 얻었다는 말에 송의원의 귀가 솔깃해진다. 『어딜?』 『아들놈이 통 얘기를 하지 않으이.』 아버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봉주가 못내 의심스러운 한초시의 심경. 그 심경을 같은 아버지로서의 송의원은 이해할 수 있었다. 어렴풋이. 그날 밤 한초시는 송의원의 가게를 나서서 제 집으로 찾아갔다. 송의원네 상점에서 거의 오십여 미터나 자리한, 거의 무너지기 직전인양 기둥으로 겨우 지탱하는 초가집이었다. 세 칸 방에 자리한 이 한초시네 집에서는 봉주네의 푸념이 들려왔다. 『저놈은 여태껏 배아파 낳아주고 키워주기만 하면 뭐하나. 어, 이 어미 허리가 기울어져가는구먼.』 빈둥거리며 살고 있는 아들 봉주에 대한 잔소리였다. 초시의 마누라인 봉주네는 하루에도 수십 번 아들에게 푸념을 늘여놓는다. 『마누라, 백날 푸념만 해봤자 소용없어. 보약이 다 닳았나보군.』 『영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저 여편네는 열녀가 되기는커녕 귀신이 되겠구먼.」 한초시는 혀를 끌끌 찬다. 『어딜 갔다 인제 오쇼』 마누라가 묻자, 『송의원네 갔다 오는 길일세.』 한초시는 무심히 답했다. 『그놈의 송의원이 밥을 주기라도 하우.』 마누라가 차려준 밥상을 마주하던 차에 퉁명스런 말투를 들은 한초시는 그나마 남아있던 입맛마저 떨어지고야 말았다. 『에잇!』 밥상을 마주하고 숟가락을 들던 그는 냅다 밥상에 들던 것을 내동댕이친다. 마누라는 놀란 눈치다. 어안이 벙벙한 채 다신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곁에 누운 채 잠든 아들을 보고 못마땅한 듯 발길을 걷어찬다. 『밥 먹는 상에 눕는 법도는 어디서 배웠누!』 아들은 벌떡 일어난다. 짜증도 날 법하건만 엄격하고 엄격하기로 소문난 한초시의 성질을 자식으로서 모를 이유가 있으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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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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