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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박 판사 제45화
봉암은 박 판사의 집을 나섰다. 그를 마중나온 박 판사의 마음은 점점 의성댁을 향했다. 어린 의성댁을 어떻게 대할 지 두려움만 앞설 뿐.그는 삼 년동안 인고의 세월을 지내야만 했다. 그러는 와중에 봉암은 장가를 가게 되었다. 한때 걸인이라 불리는 봉암이 어떻게 장가를 갔는가. 박 판사의 후원이 없었으면 봉암은 영원히 알거지가 되어 조선팔도를 싸돌아다니다 객사할 운명이었다. 박 판사가 봉암에게 재미거리로 이렇게 말했다. “내 집 근처에 중추원의장을 한다는 양반이 하나 있을 것이오. 그곳에 가서 구걸하듯 행패를 부려 눌려사는 것이 어떻소? 그것도 갑수를 죄의 수렁에 빠지게 만든 장본인이잖소.” 이 말은 곧 계략이었다. 이를 믿어 봉암은 밤낮으로 박 판사와 술을 마시고 저녁이 되어 봉암이 박 판사의 집에 보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봉암은 이 의장의 집에 이르렀다. 이 의장이 철천지원수인 이형중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물론 알았다. 이 의장의 집은 한옥과 양옥이 결합된 형태였는데 담장을 으시시하게 만들어놓았다. 성북동은 한적한 동네인지 개가 왈왈 거리는 진풍경은 성북동의 참맛이다. 아무튼 그 집에 이른 봉암이 고래고래 소리지른다. “이형중아. 내 왔다! 내가 왔다! 문 좀 열어라 이 개짐승만도 못한 철천지원수야!” 그러면서 봉암은 으시시한 대문을 부수듯 발길을 걷어찬다. 이에 놀란 하인 하나가 문을 열어놓고 말하길, “저, 뉘시오?” “본인은 이형중이하고 잘 아는 사람이외다!” 하며 집안으로 들어가는데 하인들이 이를 저지하는데도 옹고집인 봉암은 하인들을 밀쳐내고 마침내 응접실 역할을 하는 대청에 이르러 그곳에 있는 최고급 격인 소파에 벌러덩 누워버리고 말았다. 그러더니 일어서서는 주인장인 이 의장에게 굽신 인사랄 것도 없지만 인사를 한다. “아이고, 주인영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에, 이형중이 그 사람을 보려고 왔는데.” 이때 마루에 나오는 안성안씨부인이 놀라면서, “아니, 저 사람. 저 사람이 뉘기에 이렇게 오는거요?” “아이고, 주인마님. 송구스럽습니다.” 이를 두고 버럭 안씨부인은, “죄송스러우면 당장 나가!” 지르고. 봉암은 이에 아랑곳없이 다시 벌러덩 소파에 누워뻗었다. 이 봉암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이 의장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이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인 데모를 한다는 식인지. 그러면서 이 의장이 대뜸 한다는 소리가, “이제는 질렸다! 질렸어!” 하더니 이 의장 왈, “형중이 이 자식 언제까지 오나! 이런 빌어먹을 자식이라고!” 이형중이 들어서는 기척이 들리고 마루에 올라오자마자 이 의장은, “저놈 데리고 나가! 여기에 어슬렁거리면서 네놈을 찾는다는데 이렇게 벌러덩 누워 술 취한 채로 그렇게 있는 꼴을 더는 못 보겠다! 이 사람이 누구냐!” 이형중은 웃으면서 말했다. “제 친굽니다. 한데 하루 묵어야할 듯 싶은데.” “뭣이! 네놈이 내 친구면 호랑이랑 친구하겠다!” 그러더니 이성을 잃은 봉암이 벌떡 일어나 형중의 멱살을 잡았다. “내가 무슨 놈의 친구야! 이놈의 새끼가!” 이에 놀란 이 의장은, “우리 형중일 제발 때리지 말게나! 이 부덕하고 못난 이를 용서해주게.” 이제는 애원조도 통하질 않는다. 결국 봉암은 형중을 내동댕이치고 찬모를 부르게 하였다. 찬모가 오자 봉암은 막걸리를 시켰다. 이에 찬모는 순순히 막걸리를 가지고 왔다. 막걸리를 벌컥 마시고는 찬모에게 말했다. 찬모는 갓 서른이다. “나랑 같이 日之出町(일지출정 : 남학동)에 있는 우리집에 갈까?” 순간 찬모는 말을 잃었다. 결국 봉암은 찬모의 손을 덥석 잡더니 문을 벅차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일제히 이 의장의 집안은 비상이었다. 이윽고 저녁이 되고보니 찬모가 돌아왔다. 그런데 찬모의 모습이 그야말로 우스꽝스럽고도 안쓰러울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옷이 찢겨지고, 아이고, 아이고 하는 신음소리, 얼굴을 보니 멍자국이 선명하고 코에서는 피가 나온다. 걸음걸이는 물론 비실하고. 이런 모습을 한 이 의장은 놀란 채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고!” 찬모의 손에는 부러진 비녀가 있었다. 이를 보고 안성안씨도, “아이고, 잘도 한다! 웬 남정네에게 이끌려서 저런 만신창이가 되어서 왔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누! 이 빌어먹을 계집애야!” 하며, “어째서 이 모양이 되었어!” 그러자 찬모가 봉암에게 겁탈을 당하다시피 했노라고 말하자 이 의장은, “아이고! 이내 신세!” 하며 통곡하였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 안 되어 봉암의 결혼 소식이 신문지상에 나왔다. 1923년 10월 며칠에 실린 신문에서는 이렇게 이들의 결혼식을 소개했다. 당대 마르크스주의자인 모봉암이 지난 10월 11일 A교회 예배당에서 지인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결혼식을 치렀다. 이 결혼이 처음에 서대문 모 봉사가 이번 혼인을 두고 반대하였지만 봉암의 완고한 선언에 감읍하여 이 결혼을 승낙시켰다한다. 이 결혼식의 신부인 千××(23)은 본래 중국인이었으나 어머니가 조선인인 관계로 조선에서 살아가며 귀화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의 모 군벌의 휘하에서 맹활약을 벌인 천○○(49)로서 한때 만주에서 살았다 한다. 그의 조상들은 대개 여진족이었으므로 고향산천을 그리며 조선에 온 것으로 알려졌다. 결혼식 이후 봉암의 부친 모 봉사에게 전갑수의 매제인 이기진과 갑수의 아내 주희의 부친인 이 모 봉사가 다가가서 축하해주었다. “결혼을 진심으로 감축드리오.” “하고 많은 조선여자들을 두고 웬 되놈의 여식을 받아들이다니.” 이에 이 봉사가 웃으면서, “하하하하, 되놈의 여식이 조선말만 잘 하면 되잖습니까.” 이렇게 옳게 말해주니 모 봉사는 이 봉사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후 이 봉사가 물러가고 봉암 부부를 불러들여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살 집은 마련해두었다. 그 집이 西四軒町(서사헌정 : 장충동2가)에 있는 자그마한 한옥이란다. 그곳에서 편안히 너희들이 잘 살아보거라.” 이렇게 두 사람은 어른의 말에 따라 서사헌정에 살림을 차렸다. 이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하루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며느리에 대한 반감이 생겨났지만 봉암의 부인이 쌍둥이를 임신한 까닭에 모 봉사가 그런 며느리에게 아낌없이 시아버지의 칭찬을 받으면서 아이들을 낳았다. 이 아이들이 모두 여자이기는 했지만 일란성이 아닌 이란성이었다. 얼굴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 두 아이를 두고 봉암이 月蓮(월련), 香蓮(향련)이라고 지었지만 모 봉사의 의견에 따라 맏이를 紅花(홍화), 둘째를 朱花(주화)라고 이름했다. 물론 월련과 향련은 가명으로 하였다. 한길도 많은 위안을 얻었다. 친구들의 결혼 소식에 축의금을 주기도 하였다. 자신의 조카인 이형중에 대한 수치를 갚을 길이 없는 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한편 한길에게서 편지가 한 통 배달되었다. 한글로 된 편지였다. 사할린스크에서 고생을 하는 전갑수 라는 이름이 적혀져 있었고 한길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져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편지를 뜯고보니 이렇게 써져 있었다. 이보게 한길이, 자네가 보고 싶은 심정이 이리도 저리게 아플 줄은 알지 못했네. 하하하하. 자네가 조선에서 고생하는 마음을 이해하는 바이지만 내 자네를 보면 강인함이 물론이요 나로 하여금 사랑을 주는 그런 인자한 성모 마리아와 같다네. 나는 지금 가톨릭을 믿지만 여기서는 정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네. 나는 강희에게 세례를 시켜줄 생각이었지만 강희 엄마가 들어줄 지 모르는 일이고. 가슴이 답답하다네. 사할린에서 낳은 康姬(강희)는 태어난 지 3년 후인 현재 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어려서 그 아이는 총명하게 생겼는데 이렇게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는 가운데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편지글에는 적혀 있었다. 그리고 길호도 전 참봉의 양녀로 들어간 基華(기화)와 결혼하여 서대문에 살고 김독하는 이미 결혼하여 홍정한의 재종질인 용석과 동갑인 아들 낳았는데 이름을 陽浩(양호)라고 하였다. 조강동과 강동희는 잠시 중국으로 망명갔으며 송영국은 여동생인 玉蘭(옥란)과 같이 구라파에 가서 조선의 혼을 노래하기 위해 구라파의 음악의 웅장함을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그로부터 삼 년이 지난 1926년 순종임금이 붕어한 이후다. 이 시기에 박 판사는 요새 일이 바쁘기 시작하여 일을 보다 캄캄한 밤이 되어 집에 돌아오니 어떤 꼬마 도련님이 뛰어나오면서, “아빠―!” 하며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박 판사가 꼬마 도련님을 품에 안은 채 말했다. “아빠 보고 싶었니?” “네! 아빠 보고 싶었어요.” 또박또박 병기의 말이 점점 늘어났다. 박 판사가 말했다. “아빠가 그렇게 보고 싶었구나. 그래, 앞으로 일찍 오마.” 하며 병기를 방에 데려놓고 박 판사는 어리광을 부린다. 이때 병기는 히죽 웃더니 헤헤 거리며 재밌어한다. 이 모습을 보던 영자는 남편의 자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병기가 과연 자라서 변절된 집안의 사정을 이해해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 것은 사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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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송 621('12)-03-3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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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님은 문학 실력이 좋으시네요. 조선문학회 회원이시기도 하시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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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송 621('12)-07-08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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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 님 잘 봤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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