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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근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더구나 국상 중에 벌어진 사건인지라 좌근은 몰래 이하전을 색출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이는 비변사 내에서 주관하였으므로 상감의 명이라고해도 따를 수 없게 되었다. 비변사는 왜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임시기구로서 책무를 다했으나, 순조 이후에 와서 권력 남용이 만연했으니, 훗날 대원군이 된 이하응이 손수 그것을 혁파할 정도였다. 그 덕으로 이하전은 역적으로 몰려 전국적인 수배령이 내려지고 말았다. “대비전에 망극지변이 일어난 것도 모르고 제 주제를 넘게 세치의 혀로 대비전을 우롱하다니. 괘씸한지고!” 이제는 퇴기가 되어버린 월선이 노망나고 실성한 좌근 영감의 곁에서 넋두리를 거들어주었다. “영감, 이참에 하전을 잡으시거든 군문에 효수하시지요. 호호호.” 노망난 영감의 옆에서 음담패설을 늘여놓는, 월선의 거침없는 말에 순간 권력의 깊은 맛에 취하고 말았다. 금년 정월에 월선의 치마폭에 빠져 있는 영감을 뒤로하고 본댁 이씨 부인이 하직했다. 월선과 좌근이 곁에 있고부터 푸대접 받아온 것도 서러운데 그에 한 술 더 떠 영감의 신임에 신이 나 벼슬청탁하고 있는 덜 떨어진 사내들의 비리들을 보고 받아먹어대는 모양을 보며, 지켜볼 수밖에 없는 지라 화병으로 앓아눕기까지 하였다. 양아들 병기의 처가 병수발을 든다고 했지만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않으니 이 신통치 않은 병은 열 가지 약이 있더라도 소용없노라고 며느리에게 일장 훈도하더니 그만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때부터 월선은 본처 자리에 넝쿨째 굴려온 호박 같이 받아들이고 주저앉고 말았다. 이 덕에 월선은 좌근의 사랑을 한층 더 받게 되고, 나아가선 지아비의 일에 간섭을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때 월선은 서방을 졸라다가 자신의 기적에서 빼달라고 조르기도 하였기에 늙은 영감이 감언이설에 속아 기적을 지우기도 했다. “참, 섭섭하우. 우리들의 의리는 다 어디다 버리시구, 늙어빠진 영감의 시중을 드신단 말요?” 어느 날 월선이 자기가 운영한 기방을 물려준 기생이 나타났는데 그녀가 한 말이었다. “어디 영감이 좋다 뿐이냐? 뒤에서 받쳐주고 있는 뒷배가 있기에 거기에 혹한 거지.” 퉁 치듯 한 월선을 두고, “화무는 십일홍이라 했소. 권세는 하루아침에 망하는 법인데 무섭지 않수?” 말하니, “이애, 계매(桂梅)야. 너랑 말장난 할 생각도 없다. 집어치워라.” 하며 월선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 뒤 월선은 자신들의 동기인 설향(雪香), 매향(梅香), 채월(彩月), 영산홍(映山紅)을 불러다 자신들의 연회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동안 기생이 되기까지의 역로(歷路)가 생각난 나머지 참지 못한 채 눈물을 터뜨렸다. 한때 연산군의 후궁으로 총희(寵姬)라면서 나라의 국운을 주름잡은 장녹수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나, 자신 또한 나주의 시골뜨기 노비의 딸로 태어나 기생이 되고 장차에 한 나라의 만인지상(萬人之上)에 오른 하옥 대감의 곁에 앉아 온 나라를 쥐락펴락하니 일장춘몽과 같은 꿈이리라. 이때 월선은 이제야 지난날에 대한 삶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곁에 기생들도 꼴 보기가 싫어졌다. 자신을 ‘나합’, ‘나주 합하’라고 부르는 현재에 만족하는 것이다. 하옥의 영으로 이하전을 잡으라는 방문이 전국적으로 뿌려짐을 알게 된 하응은 김씨네 중에서 온건한 편인 병학 병국 형제에게 당분간의 신세를 지게 되어 화를 면하였다. “살려 주시오, 살려 주오 대감!” 울며불며 한밤중에 찾아와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던 하응을 보고 두 형제는 그를 은신하도록 구석진 방에 잠시 숨게 되었다. 숨는 동안에 하응은 두 세 해 전에 하세한 추사(秋史)의 제자답게 수려한 필체와 일취월장한 난초를 여러 장 그렸다. 이때 병국이가 그 그림을 보더니, “형님. 병지 아우에게 찾아가서 당숙께 흥선군의 목숨을 구명해달라고 조르지 않으시렵니까?” 이때 아우의 말에 공감한 병학이 “그 그림은 뭣허게?” 하응의 화폭을 보고 묻자 “석파가 그린 그림을 어찌 버리겠습니까? 조선팔도에 내로라하는 이가 드물건만. 석파가 죽으면 나라가 망함과는 진배없지요.” 병국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니 병학도 흔쾌히 병지를 찾아갔다. 병지는 공교롭게도 김좌근 일가에서는 유일한 장손이었기 때문이다. 병지에게 찾아가서 하응의 구명에 매달리는 사이 시어머니 순원왕후의 뒤를 이어 새로 대왕대비 자리에 오르게 된 조씨는 김좌근 부자로부터 협박을 받기 시작했다. 이하전과 연락을 취했다는 이유를 들먹이며 구실을 삼고는 만일 죄가 밝혀지게 되면 자신은 물론, 왕실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며 엄포를 늘어놓는 것이다. 그러나 조대비는 대단치 않게 생각했다. ‘흥, 그까짓 왕족의 목숨 끊는 거야 어디 어렵겠느냐? 내 부모의 일가 피붙이들을 가져다 비명횡사시키고 거의 멸문시킨 네놈들이 아니더냐. 어디 이하전이 뿐이냐. 이하전이 할아버지라도 죽이어 보아라. 내가 깜짝하나.’ 어제 예전의 조대비가 아니었다. 지엄한 시어머니 밑에서 눈치를 보며 살아온 삼십 여년의 세월이 엊그제 같건만, 이제 시어머니가 안계시고 이제 자신이 대왕대비가 되어 있으니 왕실의 웃전이고, 삼천리금수강산의 주인이나 진배없는 어른이다. 온갖 것을 트집 잡듯 하여 제 가족들을 죽인 안동김씨가 웃어른을 잃고 나니 위기를 눈치 챘는지도 모른다. 이제 김씨의 몰락이 차츰 가까워오고 있음을 알았던 조씨였건만, 자신의 뜻에 맞는 동지를 찾는 것이 쉬운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지밀에서만 있어 온 조씨로서는 마음 터놓고 말할 상대조차도 못 구했으니 홀로 독수공방할 수밖에 도리 없었다. 그 중에 조대비는 조카 조영하(趙寧夏)에게 신임하고 있었다. 얼마 전 장원급제했던 만큼 조씨 집안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든든한 지원자를 두었다. 그뿐인가 조성하(趙成夏)도 역시 든든한 버팀목이다. 그는 당상관의 지위를 가지고 조정을 나서게 되니 조대비로서는 양날개를 달고 승천할 지경이었다. 그랬기에 김씨의 협박에도 한 치의 두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김씨네들이 으르렁거리는 자체가 그녀로서는 기가 찰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기에 하응의 구명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변수는 도사리고 있었다. 좌근이 대왕대비가 하세하였음에도 비변사라는 기구에 수장으로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이상 조대비만 아니라 그 먼 친척의 할아버지의 자손이라도 거스를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이하전의 역모도 이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것 중에 하나였을 거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대왕대비 조씨건만, 자신의 뒷배만으로는 과연 이 난국을 수습할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앞이 캄캄해왔다. 그런데 “마마. 이 난구글 수습할 수 있는 이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이하응이가 유일합니다. 이하전을 대체할 사람이 이하응 밖에 없습니다.” 뜻밖에 조카 성하의 입에서 생각하지 못한 이름을 접할 때 처음에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성하가 자세히 하응이 사람됨을 알려주니 그제야 수긍하는 것이다. “대신 조건이 있다. 절대로 안동김씨의 귀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되니라.” 조대비의 엄명을 듣고 성하는 몸을 더욱 낮추었다.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는 새 김씨네도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그중 젊은 축에 속한 김병국 형제들이 일제히 계동으로 거처를 옮긴 병지네 집에 들이닥쳤다. 병지네 집은 비록 아흔 아홉 칸의 기와집은 아니지만 나름 양반가의 품위를 살릴 만한 정도의 크기였다. 어두운 저녁. 두 형제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사랑채에 “아우님, 계시는가.” 하고 소리쳤다. 방문을 열어젖힌 병지가 둘을 맞이하여 자기 방에 안내하였다. 병지가 엷은 미소를 띠며, “여기는 어인 일로 오시었소?” 물어보는데 사촌형들의 곁에 있는 짐들을 바라보았다. 형들의 의중이 더욱 궁금하다. “다름이 아니라, 이하응이 문제로 해서.” 그러자 “이하응이는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잖은가.” 병지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형제는 이하전 사건으로 인해 생기는 사건은 장차에 이하응에게 불똥이 튈 것을 염려해서였다고 주장했다. 그 중심에 김좌근이 있음도 예의주시하여 일러주었다. 병지에게 형제는 밤이 새가는 줄 모르고 설득해댔다. 당대 이름 있는 명사의 제자도 제자지만 스승의 값있는 인품을 묻어나와 세속과의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기에 그의 삶에 철학이 묻어 나옴을 역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종대왕의 문체반정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생기기 시작하기 직전부터 이미 서민들로부터 물려받은 여항(閭巷)의 기운이 이미 풍고(김조순)에게 각인이 되어 있었기에 쉽게 시류(時流)에 영합되어 왔기에 서민들의 희로애락을 몸소 체험한 전력이 있었다. 그것을 직계손인 병지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숙부인 하옥과 병국 병학 형제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놓이게 되고 보니 갈피를 잡기가 매우 어려울 뿐이었다. 대왕대비의 생전에 한껏 누려온 권력이고 보니 김좌근은 자신의 몰락을 예견하지 못하고 깊은 수렁에 빠져가고 있었다. 병지는 이런 숙부의 무모함에 대해 막아보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다른 한편으로는 섭섭함이 밀려왔다. 조부님의 반을 닮기만 하셨어도 이렇듯 집안이 등갈이 나지 않았을 텐데…… 아직은 생전에 계시는 어머니가 이런 말을 꺼내셨다. “하옥 숙부는 워낙 중구난방하신 양반이신지라. 우리 시아버님의 강직함을 물려받지 못하신 게다. 두 분 형님이 계시고 하다 보니 아버님께선 하옥을 소홀히 대한 것이니라. 그 덕에 다른 피붙이의 양자가 되어 출가하셨는데, 생가로부터는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하고 했으니 그 한을 권세로 돌려 그 앙갚음을 한 게 아니겠느냐? 그것도 모르고 철모르는 것들이 당숙에게 반기를 들려 하다니.” 두 사촌형제의 간곡한 설득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사이에 짐짓 산만해지기 시작하던 찰나였다. 어머니 말처럼 철없이 당숙에게 반기들던 철없는 동생들을 지켜보아야 하는 자신의 설움을 풀 새도 없이 병지는 동생들의 응석을 받아 주게 되었다. 동생들이 내민 건 바로 흥선군 석파의 난초 그림과 김정희의 추사체를 본뜬 글씨 몇 점이었다. 사촌 아우의 닦달하는 소리에 자세한 내막을 알기 어려웠으나, 이하응의 그림들인지도 모른 채 시원시원한 필체며 그림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지난 날 할아버지의 작품을 떠올려보았다. 하지만 지난날 자신이 보아온 필체보다 색다름을 간파했다. 병지는 탄식조로 물어보았다. “이 그림은 무엇이냐.” 어리둥절해하는 아우들에게 재차 물었다. “누구의 그림이냐.” 경계의 눈초리로 묻는 병지의 물음에, “석파, 아니 흥선군의 그림일세.” 병국이 재빨리 대답하였다. 병지는 그제야 이하응의 실력을 인정했다. 추사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왕족이라는 위험을 안고 사는 이하응이 그 위험을 무릅쓰고 야인(野人)처럼 온 팔도강산을 누비면서 자신이 품에 간직한 천추의 한을 기존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가려는 도전정신이 돋보이는 것이었다. 이하전만큼은 아니어도 자신의 응어리를 이렇듯 한 폭의 글씨와 그림으로 푸는 하응의 진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사촌들의 간절함도 이와 같음을 느끼고는, “이 그림들은 시정에서는 값을 매긴다지?” 물어보았다 아우 병학이, “그렇소.” 맞장구쳤다. “한 폭 그림을 얼마에 매겨판다던가.” “비싸게는 다섯 냥이고, 싸게는 석 냥이 되오.” 순간 병지는 이맛살 찡그리며, “허허, 그런 법이 어딨는가?” 다그쳤다. 두 사촌아우들은 입에 든 침을 꿀꺽 삼킨다. 병지는 두 사람의 의중을 간파하고, “그 그림들을 이리 주시게. 한 폭에 십 냥씩 해서, 아홉 폭일세그려. 그림 내 구십 냥을 줄 것이로되, 우리 집이나 자네 집에 은신하도록 하세.” 그리고 “내가 직접 숙부에게 찾아가 자초지종 고하여 석파를 구명할 것이니 자네들은 잠자코 물러가시게.” 하며 병국 병학 형제에게 확답(確答)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자신은 직접 이하응을 보지 못하였지만, 소문만으로 익히 알아온 필부에 지나지 않았건만, 직접 흥선군의 그림들을 마주보고 하니 가히 천지를 진동할만한 실력임을 깨우쳤다. 이후 병지는 묵묵히 좌근의 패거리와 김병학의 패거리를 구분해내었다. 어떤 패는 썩은 동아줄을, 어떤 패는 단단한 동아줄을 움켜쥐었다. 이를 깨우쳤을 때 자신의 집안이 표면화되지 않았지만 두 패로 갈라짐을 느끼게 되었다. 사사롭게는 ‘구(舊)’와 ‘신(新)’, 더 넓게는 ‘보수(保守)’와 ‘진보(進步)’라는 두 개념이 충돌하는 국면에 속한 것이다. 사촌형제 두 명이 다녀간 뒤, 흥근의 손자 김병덕(金炳德)이 나흘 만에 찾아왔다. “아우님, 엊그제 등정 안하셨나?” 능청스레 병지를 떠보듯 물었다. “골치 아프고 몸도 안 좋고 하여 못 갔소만.” 병지의 대답에 “이하전이 사사되었네.” 재까닥 답했다. “뭐요?” 병지는 놀라고 말았다. 아차! 하였다. “뭘 그리 놀라시나?” 병덕이 전하던 청천벽력의 소식을 병지는 애써 피했다. 아니 피해야만 했다! “이하응은 어찌 되었소.” “이하응이 어찌 되다니?” “이하응이, 이하응이 그 사람만은 아니 되오!” 병지는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아랫것에게 좌근네 집에 가자고 닦달했다. 그러고는 쏜살같이 숙부에게로 가는 것이었다. 아우님! 외마디 소리치듯 아우님 하며 찾는 병덕이를 뒤로 하고. 좌근의 집에 당도한 병지는 서둘러 청지기 길 서방에게 대감마님을 뵈옵기로 했다고 아뢰도록 했다. 순간 계동 서방님의 갑작스런 행차에 어리둥절하던 길 서방은 갸우뚱해가며 좌근에게 일렀다. “나리, 계동 서방님께서 급히 뵙자고 청하는뎁쇼.” 안에서 늙은 노인의 소리가 들리었다. “병지 말이더냐.” 힘없는 노인네의 소리를 어림잡듯 길 서방이 대답했다. “네.” “그럼 안으로 뫼시어라.” 간만에 조카의 방문을 받은 좌근의 얼굴에선 화색이 만연했다. 고요하고 깊은, 하다못해 개 짖는 소리 없이 부엉이 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야심한 밤에 조카님께서 방문해주시다니 좌근이 입가엔 웃음이 감돌았다. 마치 설레발로 나와 맨발로 조카를 맞이할 성싶었으나, 조카가 공손히 들어오자 이내 거두었다. 매양 웃음을 띠던 하옥 대감은 조카의 방문 이유를 물었다. “우리 조카님께서 어인 행차신가?” 숙부의 따뜻한 물음에 병지는 머뭇거리듯 대답이 없더니, 이내 심호흡 몇 번 하고서야, “숙부님.” 하며 병지가 비로소 입을 떼었다. “응, 말해보아라.” “다름이 아니라, 이하전이 문제로 찾아왔습니다만.” 의외의 대답에 좌근은 어리둥절하였다. “그게 무슨 소린고? 이하전이와 네가 무슨 관련이 있느냐?” “저, 실은.” “응.” “병국이가 이번 사건으로 말미암아 저를 찾아왔는데, 이하응이 그 자가 제게 찾아와서는 자신을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더랍니다.” 조카의 얘기를 들은 좌근은 제 무릎을 치며 파안대소하였다. 너털웃음으로 좌근이 “흥선군이, 그 자가 상갓집 개 노릇을 또 했구먼.” 하며 당연시 여겼다. 숙부의 의외의 반응에 병지는 영문을 모른 채, “네?” 하며 물었다. 그러자, “그래, 병지 너한테 왜 찾아왔다더냐?” 되물었다. 김좌근의 물음에 병지가 자초지종을 답하니 좌근은 그제야 가볍게 한 숨 쉬며, “자기가 역모에 걸릴까봐 벌벌 떤 게야. 흥선군 그 사람은 보기보다는 약삭빠르게 대처하는 사람이야. 그러니 우리들에게 누더기 옷을 입은 채 여러 번 구걸하지 않았느냐. 미친 척 하고 덤빈 게지. 그러니 미친 종친이라고 하는 게야.” 병지는 좌근의 속내를―숙부의 속내를 알면서도 모른 척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좌근의 예지가 뛰어났던 거다. 이를 깨우친 병지는 숙부의 말씀에 경청한다. “그랬기에 하응이 화를 면한 거다. 그이는 처세술이 뛰어나단다. 그래서 이번 역모에서만큼은 면한 게다.” 이하전이 죽은 이유를 병지는 비로소 알려주었다. 이하전이가 하응의 처신대로 굽신하기만 했어도 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 순간의 실수로 죽음을 자초했을 줄 누가 알았으랴. 이를 모를 리 없는 좌근은 이런 말로 병지를 안심시켰다. “걱정 말아라. 더 이상 이하응이를 죽이지는 않겠다. 그러니 애들한테 마음 푹 놓아도 된다고 일러라.” 흐뭇한 웃음기로 하명한 좌근은 조카에게 “흥선군의 그림 받으셨는가?” 물었다. “네.” “보기에 어떤가?” 병지는 웃음 지으며 말이 없더니 “재주가 아주 뛰어나더이다. 죽기엔 아까운 재주가 아니옵니까?” “그도 그러하이.” 좌근은 웃음 하나로 이하응의 목숨을 지켜주었다. 병지도 비로소 안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는 얼마나 값을 치르셨나.” “한 폭에 십 냥입죠.” “그래?” 좌근의 사랑방에는 밤이 깊은 줄 모르고 이야기꽃이 만발했다. 김좌근의 너그러운 은전(恩典?) 덕분인지는 몰라도 흥선군은 역모사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었다. 이 소식은 대왕대비 조씨에게도 전해지니, 뜻밖의 일로 흥선군이 소생함을 보고 들은 성하가 손수 전해준 까닭이었다. 평소 신임하던―흥선군이 신임하던― 김병국 병학 형제가 구명해 주었음을 알아챈 성하가 흥선군을 조심하라고 이른 것인데, 조대비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이하전이 죽구 지금에 와서는 누가 대통을 잇겠는가. 조카님 바로 이하응일세. 이하응이 아니고는 이 난국을 수습하기가 어렵다.” “마마, 그는 미치광이로 소문난 작자이옵니다. 그자의 속임수에 넘어가셔서는 안 됩니다.” 성하도 이하응과 교분이 두터운 사이라지만 하루아침에 실성하듯 처신하는 이하응이 처사가 매우 언짢았기 때문에 의심의 눈초리로 대하던 것이다. “자네는 줏대도 없는가 보구먼. 쯧쯧쯧…….” 하며 조대비는 물러가라며 성하를 내보냈다. 그 뒤에 성하에게 들은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아보고서야 대비가 상궁을 불렀다. “지금 당장 가서 김병학을 불러 오너라.” 대비의 엄명이고 하니 거스를 수 없었던 김병학은 대왕대비께 인사드렸다. “어서 오세요. 영초(潁樵) 대감.” 김병학이 아직도 대왕대비께서 어인 연유로 자신을 찾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불안에 찬 눈망울로 대비에게 응시한다. 이제 대왕대비는 예전의 굴종(屈從)의 세월을 보낸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이 아님을 비로소 실감했다. “소인을 어인 연유로 부르셨는지 하문하옵소서.” 대비는 웃음 띤 얼굴을 거두지 않았다. 김씨네 중에서도 가장 온건한 부류에 속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호흡을 같이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에 그 기쁨을 만끽하려고 한 것이었다. 마치 그동안 오랫동안 찾지 못한 보물을 얻은 심정이라고나 할까. 어쨌건 대비는 웃음 띤 얼굴로 “대감께서는 영상 대감의 당조카시라던데 사실이오?” “네?” “이런 답답한 사람 같으니. 하옥 대감이 대감한테는 당숙이시지 않느냐 그 말이오.” “네, 마마. 그러하옵니다.” 변덕을 부리는 대왕대비의 물음에 그만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봉변은 면했으니 그제야 한숨을 내쉬는 김병학이었다. “한데 대감께서는 그러 시면서도 어째서 이하응과 가깝게 지내시는 거요? 영상 대감께서 꺼리시는 종친을 말이오.” 대왕대비의 지엄한 물음에 병학은 제 속 도려내듯 이실직고를 않을 수 없었다. “사사롭게는 죽마고우 이옵고, 같은 서당에서 동문수학 했고, 혈기가 방장해서는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한 사이가 되었나이다.” 웃는 낯으로 대비는 병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흥선군이 비록 왕손이라 하더라도 제게 격의 없이 다가왔기에 적이라고 할지라도 솔직하고 털털한 성품을 좋아할 뿐. 그 이상을 넘어서지는 못하나이다.” 그때였다. “영초 대감.” “네, 마마. 하명하소서.” “대감께서 몸소 흥선군과 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시지 않겠소?” 갑작스런 대왕대비의 물음에 어쩔 줄 몰랐다. 어인 연유인지도 몰랐다. 어리둥절하면서, “네?” 되묻는 병학의 모습에 태연히 대비는 제 얘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흥선군과 연결해주시지 않겠느냐 그 말이오.” “예, 마마. 그리하긴 하옵니다만.” 김병학의 두려운 눈망울을 보던 대비―조대비는 “왜, 싫으시오?” “…… 아, 아니옵니다만…….” “하옥 대감이 무서워서 그렇소?” “…….” “정히 무서우시다면 염려하지 마세요. 내가 그대의 목숨을 지켜주도록 보장하리다.” 배짱이 두둑하게 대하는 대왕대비의 변한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지만 대비의 명이니 거스르기 어려운 노릇이다. “하오시면, 그리 따르겠습니다.” “좋소.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소.” “하명하옵소서.” “대궐에 보는 눈도 많고 하니 되도록 야심한 밤에 만나도록 주선해주시오.” “네, 마마. 분부 받들겠나이다.” 뜻밖에 대왕대비의 명을 받은 병학은 서둘러 흥선군에게 찾아가 이를 고하니, 흥선군의 눈에서는 보석 같은 광채가 빛나기 시작하였다. 왕실의 큰 어른인 대왕대비를 뵌다하니 흥선군 이하응은 주체하지 못해하며 기쁨의 눈물을 마음껏 쏟았다. 이틀 뒤 하응은 병학에게 더러 대왕대비전을 뵙겠다고 약속하여 바로 그날. 기척이 없는 깊은 밤공기를 마시며, 가마에 몸을 실어 대궐로 향하였다. 창덕궁의 어두운 정적. 간만에 찾은 대궐. 벼슬을 때려 치고 뒤돌아보지 않던 대궐이었다. 궐문 앞에 이른 하응은 큰절을 하였다. 지금 상감이 아닌 선왕을 향해 절을 올렸다. 이윽고 그의 든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넘쳤다. 절을 마친 그는 궐에 기별을 넣어 내관과 상궁의 인솔을 받으며 대왕대비전에 다다른다. 대왕대비의 거처는 낙선재에서는 과히 멀지 않은 전각에 있었다. 일행은 걸음을 멈추었다. “마마, 흥선군이 들었나이다.” 내관이 안에 고하니, “흥선군이?” 안에서 화색이 만연하다. “네, 마마.” “뫼시어라. 정중히 뫼시어라.” 하응은 조심조심 조대비 앞에 다가갔다. 이윽고 하응의 모습이 드러나자 먼저 대왕대비가 반겨주며 “어서 오시오, 흥선군.” 하응의 손을 덥석 잡았다. 흥선군은 몸 둘 바를 몰랐다. 선왕의 생모인 분을 만나게 되니 감정이 북받쳐 울분을 토했다. “마마―” 덩달아 조대비도 슬픔이 북받쳐서 말문이 막혔다. “그만 진정하세요. 앉으시구.” 조대비는 하응을 앉히고 자신의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는 흥선군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비로소 말로만 들은 그의 본모습을 발견하였다. 대비가, “흥선군께선 이하전 일을 아시오?” 짐짓 물어보았다. “네, 마마.” 그러자 대왕대비가 “흥선군, 그대가 다시 조정에 돌아올 수 없소?” 재기하기를 기대하며 짐짓 물어보는 것이다. “없사옵니다.” “왜 그러하오?” “신은 오직 난과 글씨 쓰는 걸로 족하옵니다.” 하지만 결코 물러설 조대비가 아니었다. “그대에게 장성한 자녀들이 있다던데.” “어인 말씀이신지.” “실은 그대를 보위에 올릴까? 하며 내심 고민했었소.” 순간 하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나, 아시다시피 흥선군 대감은 나이가 차기도 하나 그대에게 장성한 자녀가 많지 않소.” “마마, 무슨 말씀을 하시옵니까?” “만약 금상이 자식을 여의고 한다면 그대의 자제 중에 하나를 골라 대통을 이을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하오.” 자신에게 천재일우의 행운이 닥쳐오자 흥선군이 대왕대비에게 그 은혜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꾸벅 절하고는, “이르다 뿐입니까. 그보다 더한 것도 바치겠습니다.” 자신에게 굽신 하는 흥선군을 미소하던 대왕대비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흥선군은 재치가 있으십니다. 과연 상갓집 개다우십니다.” 연방 웃음을 터뜨렸다. 흥선군과 조대비는 은밀히 흥선군의 자손에게 보위(대통)을 넘기도록 하는 밀약에 합의 보았다. 흥선군이 물러난 뒤 조대비는 비로소 자신의 손으로 보위를 점지할 수 있음에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조씨에게는 흥선군이 필요했겠지만, 아직 시기상조였다. 중전이 공주에 이어서 원자를 낳았기 때문이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쩌자고 왕통을 잇게 해주신단 말인가. 무슨 조화를 부리시는고?’ 조대비로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하전이 죽은 것으로 끝날 줄 알았던 일이 다시 거론되고 다시 왕실에 대한 우환이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김좌근은 다시 기세등등하여 왕실의 씨가 마를 때까지 허수아비를 앞세워 정권을 갖고 놀아서, 장차에는 자신들의 손으로 왕실을 박살내어 새로운 왕조―자기네의 왕조―를 만들 것이 뻔하다. 그것을 생각할 때 무기력할 때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었다. 어머니 밑에서 숨죽이며 지내는 동안 지아비와 아들인 상감을 살려내지 못하여 통한의 설움을 겪어냈다. 그 와중에 흥선군이라는 종실을 만나게 되었다. 흥선군은 누군가. 익종대왕은 물론 헌종대왕의 신임을 받은 아래 조정의 대소사를 잘 관장한 덕으로다 종정경이라는 막중한 위치에 오른 이가 아닌가. 그걸 볼 때 조대비는 하루라도 빨리 흥선군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은 심한 갈증과도 같이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김병국과 김병학이 손수 신경써준다고 하니 조대비로서는 참을 수 있는 인내가 생긴 셈이었다. 그 뒤에 조카인 영하와 성하더러 “흥선군을 너무 의심하지 마라.” 하며 이하응에게 의심을 하지 않도록 명하였다. 그러고 나서 조대비는 성하로 하여금 김병국과 김병학과 자주 연락하여 만일에 대처를 하도록 지시했다. 하여 조성하가 김병국과 연락을 취하게 되자, 김좌근의 애첩 월선이가 거닐던 집사가 언제 어디서 감지한 모양인지, 제 주인에게 보고하였다. 순간 월선의 얼굴에는 흙빛이 되어 있었다. ‘대비전에서 무슨 꿍꿍이일까?’ 하룻강아지 범 무섭지 않아 보였던 조성하가 활동을 보인다고 하니 궁금하기도 하면서도 그까짓 벼슬아치쯤이야 눈에 거슬리지는 않겠지. 월선이 위안을 삼는 것이다. 깊은 밤. “작은 어머니.” 나이든 남정네 소리가 밖에 들린다. 그러자 “자넨가. 무슨 일이신가.” “소자가 긴히 의논할 일이 있사옵니다.” “드시게.” 월선이 맞이한 남자가 좌근의 양자 병기다. 병기는 흥선군 이하응이와는 앙숙지간이었으나, 근래에 와서는 병국 병학 형제와도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지금은 병기의 편으로 기울였지만, 그 누구도 권력의 변화무쌍함을 모르고 있었다. 월선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고 병기는 입을 연다. “어머님, 상감마마께서 세자를 보셨답니다. 그에 대한 답례도 의논해야 하고, 겸사겸사 축하잔치도 베풀어야 하는데 혹 기생들을 불러주실 수 없을는지요?” “기생을?” “네.” 월선이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더니 “굳이 서울 장안에 있는 기생들을 부르랴? 약방기생들을 부르랴?” 병기는 고개를 저으며, “아닙니다. 어디 서울 장안 기생뿐입니까. 방방곡곡에 이름난 기생들을 수소문해서라도 꼭 잔치에 참석케 해야지요.” “그도 그러하이.” 두 사람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절로 났다. 이들은 모두 집안 잔치를 성대하게 치를 건가 보다. 다음날 월선이 집에서 집안 잔치가 열리기 시작했다. 월선의 묵인 아래 서울의 기생은 물론, 팔도에서 이름난 기생들을 불러다 김씨네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술시중을 들게 했으니, 싫어도 좋은 척해야만 하는 기생의 운명을 누군가 탓하랴. 이 소식은 흥선군의 귀에도 전해졌다. 안필주가 지나다가 우연히 김씨네 청지기가 거지들에게 적선을 베푼다는 선전을 하는 모습 보고는 부리나케 달려와 전하였다. 흥선이 옳다구나 하며 필주에게더러, “이애, 필주야. 네가 청계천에 가거들랑 거지 패거리들을 데리고 오너라. 내 그놈들이랑 한패가 되어 김씨네 대들보든 무엇이든 거덜을 낼 터이니 어서 이리로 데려 오너라.” 대감의 말 한마디에 필주는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윽고 필주가 거지패들을 데리고 오니 이를 보고 하응은 부리나케 누더기 옷을 차려입고 한 패거리들을 거느리며 김좌근의 첩실 월선네 집에 다다랐다. 얼씨구 씨구 들어간다 저절씨구 씨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왁자지껄 김씨네 앞마당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더니 조용해지고, 이윽고 청지기가 서둘러 좌장인 하옥 영감에게 고하니 좌근의 눈에서 휘둥그레지며 당황함이 역력했다. “뭬야, 이하응이 왔다고? 그것두 광교 다리 밑에 거지패들 하구. 이런 고이얀.” 가뜩이나 잔치가 무르익어 가는데 이하응이 잔치의 흥을 깨뜨리고 하자 괘씸해하였다. 좌근이의 말 한마디에 김씨네와 그 곁에 아부하는 무리들은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아이구야!” 남종의 비명―외마디 비명소리에 맞춰 “어얼씨구 씨구 들어간다―” 하며 떼거리로 들어서는 이하응 일행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살다 살다 저런 별종은 처음이라는 듯 찡그리며 좌근은 시선을 회피했다. “하옥 대감!” 쩌렁쩌렁 집 떠나가라는 듯 하응이 소리치자, “웬일이신가?” 좌근이 물었다. “이 집에 아주 큰 잔치가 있다기에 하옥대감 문안드리러 왔소이다.” 그러자 떼거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병학과 병국 형제가 있었으니 시종일관 무표정했고, 이 자리에 병지가 오지 않았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병덕이 물었다. “당숙께 문안드리러 왔다면서 웬 거지들을 데려 오셨나?” 하응이 파안대소하며, “우리 애들 재롱이나 보실까 하구요. 상감께서 원자를 생산하셨것다, 안동김씨가 무궁하도록 축원드리기 위함입지요. 얘들아.” 네이―하며 필주와 거지들이 나서자, “대감께 어서 재롱을 부려보아라.” 대감의 명에 맞춰 거지들은 무리를 이루어 한껏 흥을 돋우어 춤추고 있었다. 이때 무표정한 병국 병학 두 형제가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고, 나머지들은―기생 포함― 애써 무안함을 감추지 않을 수 없었다. 소식깨나 밝은 성하가 고모뻘인 대왕대비께 고하니, 대왕대비는 배꼽 빠지게 웃어대며, “흥선군이 꽤나 재치가 넘치는구먼.” 하고 좋아했다. 비로소 조대비는 서서히 흥선군에 대한 참맛을 느끼기 시작했다. 흥선군이 벌여놓은 잔치에 진절머리를 앓기 시작하자 김병국이 하응에게 다가가서, “이보게 하응이. 그만 하시게나. 자네 너무 취했나보네그려.” 달래기 시작했다. 그러나 흥에 도취된 하응이 되려, “나 술 안 취했네. 생사람 잡지나 말게.” 하며 발뺌하고 나섰다. 그러나 어른들이 계시고 하여 무안해진 병국이 더 부추기지 않았는가. “이보시게, 석파.” 바로 이때, 달래려는 병기의 두루마기에 멱살 부분을 잡아가며 “아니 이 사람이!” 호들갑떠는 것이었다. 그때 좌근의 품에서 술시중을 들던 월선이 웃음을 터뜨린다. 까르르 웃는 그녀를 따라 일제히 김씨네 떨거지들도 웃어젖힌 것이었다. 흥선군이 이때에 이르러 ‘그래, 이놈들. 네놈들이 언제까지 영화를 누리는지 두고 보자. 일이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육십년 가까이 누려온 권세이니 제 세상 만난 듯 춤추고 노래하고 싶었겠지. 아니 왕실의 안녕이 아닌 네놈들의 만세를 노래하겠지. 네놈들 사이에 왕손이 태어났으니 맘껏 쓰다가 제 맛에 들지 않으면 헌신짝 버리듯 하겠지. 하나 네놈들의 뜻대로는 안 될 것이다. 어디 두고 보자! 김씨 너희들의 몰락을 기필코 지켜볼 테다!’ 병국의 멱살을 잡던 하응의 눈에서는 비분강개함이 역력했다. 자신의 기행(奇行)에 마치 짝 맞추듯 비웃어대는 저 안동김씨의 만행. 그것은 하응의 가슴에 타오르는 분노라는 불꽃에 기름을 더 끼얹는 꼴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저들은 미처 모르는 눈치였다. 그 부류 중에 하나가 닭다리 하나를 집더니 그걸 땅바닥에 내던졌다. 이하응이 그걸 들자 안필주가, “안됩니다!” 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하응은 아랑곳없이 그걸 뜯더니 먹어댔다. 이때였다. 순식간에 연회는 파안대소의 파도에 잠겨 있었다. “가자!” 갑자기 무안을 당한 탓인지 하응은 자리 피하듯 달아났다. 부하들도 뒤따르듯 하건만 비웃는 소리들은 그칠 줄 몰랐다. 병학은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옆에 병기가 웃어제끼자, “형님, 지금 웃음이 나오시오?” 하며 소리쳤다. 그러자 병기가 웃음을 거두며 “웃어야지. 나보고 울라고 하는 겐가?” 도전장 내미는 식의 모습을 용납하기 어려운 그였다. 그 모습을 보기 어려워 낯간지럽게 느꼈는지 월선이 “어르신이 계시는데 조카님들이 왜들 싸우시는 게요.” 점잔을 빼자 울컥한 병학이 제 술잔을 들며 월선의 얼굴에 술을 뿌렸다. “이 무슨 짓이냐!” 조카의 무례함을 참다못해 좌근이 소리쳤다. 월선은 쏟아낸 술을 닦는데 열을 올리고 잔치는 찬물 끼얹은 듯 조용했다. “네깟 기생 따위가 어디서 나서는 게냐!” 그때 노익장(老益壯) 과시하듯 좌근이 벌떡 일어나 병학의 뺨을 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터라 사람들은 어쩌지 못했다. 삽시간에 잔치는 아수라장 되었다. 월선은 월선대로 흐느끼고 김씨네는 김씨네대로 입을 다물었다. 적막이 흐르고 나서였다. “형님!” 병학이 격앙되게 입을 열었다. “형님은 대체 사람이오, 짐승이오?” 병기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일개 왕족으로서 누더기 옷 좀 입었다 기로서니 이리 푸대접을 하시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요?” “…….” “형님, 두고 보시구려. 만에 하나 흥선군이 권세를 잡는 날엔 우리는 꼼짝없이 죽고 말게요.” 하며 병학은 월선에게 손가락질해대며, “이 사단은 저 계집이 자초해서 생긴 게요. 나이든 숙부님의 눈을 흐리게 해놓고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일군 것들을 마치 제 것 인양 가로채놓더니, 이제는 왕족을 푸대접하는 꼴이 되다니. 세상에 이런 법이 있소?” 병학의 분노는 깊었다. 깊이 있는 분노였다. 김씨의 세도가 지속되면서 김좌근이로 대표되는 세력들은 위로는 임금에서부터 아래로는 방백과 수령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일이라도 돈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황금만능(黃金萬能)에 취하여 월선에게 빌붙기까지 하는 지경이 되었고,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그들에게 시달리며 무리한 세금을 내어야 하는 불가항력이 미치니 근래에 와서는 민란(民亂)이 일어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임금도 모르고 정작 실력자라 일컫는 좌근조차도 모른다. 일부 고을에서는 수령을 잡아 가두는가 하면, 백성들이 지켜보는 데서 수령의 목을 베는 등 민심은 겉잡을 수 없이 흉흉해지고 있었다. 어쨌든 김병학은 그 길로 김병지네 집에 다다랐다. 이리 오너라― 하는 기척에 병지네 몸종이 굽신 대며 사랑방으로 안내하였다. 이미 약속이 잡힌 모양이었다. ―한편,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흥선군은 며칠 동안 두문불출하며 그림 그리기와 글씨 쓰기로 소일하고 있었다. 공연히 망신만 당하다시피 했던(?) 하응은 돌아가고, 이후의 풍악은 그치고 말았다. 월선이는 뺨 맞은 것에 대해 토라져서 울고 있었다. 좌근은 그런 모습이 딱해 위로한답시고 토닥였지만, “내 살다 살다 조카님한테 뺨 얻어 맞구 정말 분하고 원통하외다. 영감!” 한 술 더 떠 월선은 영감님 품에 얼싸 안겨 푸념만 늘여놓았다. 김씨네 집이 아수라장이 되고 5개월 뒤. 대궐에서는 한바탕 불행의 회오리가 몰아치고 있었다. 바로 엊그제만 해도 왕실에 큰 홍복(洪福)이 있었던 때에, 태어난 세자가 돌연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의원의 손도 거치기도 전에 세상을 떴다. 이것은 상감 원범과 왕비 김씨 이하 내외명부는 물론이고 김씨네에게도 큰 슬픔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조대비는―조대비만큼은― 덩실덩실 춤추고 싶었다. 어두운 밤 천둥이 내려치고 모진 비바람이 불어왔다. 대비 앞에 놓인 촛불 하나가 바람에 사라질 듯 간간이 제가 살고 싶다는 듯 몸부림을 치며 꺼지지 않으려고 저항하고 있었다. 조대비는 소리 없이 김씨를 비웃으려고 하였다. 죽은 시어머니 김씨의 덕만 믿고 빌붙는 김좌근과 그 무리들 그들이 제 앞에 다가와서는 마마, 소인들의 무례함을 용서하옵소서. 하며 제 앞에 무릎을 꿇어 치마폭을 움켜쥐며 잘못을 뉘우치려 드는 모습이 간간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만일 그날이 온다면, 그날이 오면 네×들의 피를 받아다 삼천리금수강산에 흩뿌리겠노라. 하며 악의에 받친 의지를 다진 뒤, 비웃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하늘두 무심하지 않군. 김씨네가 이제 천벌을 받는구먼. 아니 받을 때가 온 게야. 하하하하……” 대비의 웃음이 온 전각을 휩싸이고, 이에 맞장구치듯 거칠게 밀어닥친 바람은 더욱 강하게 회오리바람으로 덩달아서 전각 밖을 휩싸이도록 불어댄다. 언제 멈추었는지 다음날이 되고 보니 날씨가 쾌청했다. 대왕대비전은 언제 회오리바람이 왔느냐는 듯 단 하나의 먼지는 눈을 비벼 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정의 일각에서는 세자의 독살을 주장하는 움직임이 보였다. 이것은 김좌근이에게 아부하는 무리들이 저지른 조작극이었다. 저들은 하나같이 대왕대비전에서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해대었다. 그러나 조대비는 이에 대한 답변도 내놓지 않았다. 조정신료들이 보는 앞에서 부군과 아들을 잃었을 때만큼은 대놓고 울었지만, 남몰래 내색하며 울지를 않았다. 그렇기에 조대비는 뒤에서 아무리 자신을 험담하더라도 앞에서, 정면으로 나서는 것을 자제하고 있었다. “대왕대비마마가 범인이라고 하는데.” “떽! 그런 소리일랑은 말어. 마마께서도 입 다물고 계시는데 공연히 초칠 일이 어딨니?” 어여쁜 항아(姮娥)들의 주고 받는 것을 대왕대비는 엿듣고 있었다. 때마침 대비전 상궁이 이를 듣고 꾸짖고자 나가려는 찰나였다. 그때, “그만 두어라. 내 나이들만큼 들었다. 잠자코 있게나.” 계속되는 항아들의 입방아에 대왕대비는 희색이 만연했다. 그러면 그렇지. 그래 좀 더 입을 다물도록 하자꾸나. 만일 경거망동이라도 하면 김씨네가 당장에라도 제 꼬투리 잡고 할테니 좀 더 참자! 흥선군도 있겠다, 든든한 조카들도 있겠다, 무슨 미련이 남겠는가. 비로소 자신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여느 여염집에서도 흔하지 않은 쌍과부나 다름없는 처량한 신세가 두 어깨에 날개가 펼쳐질 것 같은, 깊은 격동의 감정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 대왕대비의 춘추는 막 쉰 중반에 접어들 즈음이었다. 오랫동안 영상 자리를 맡던 김좌근이 웬일인지 칭병을 구실삼아 사직을 하고 후임에는 상감의 즉위에 관여한 바가 있는 정원용에게 넘어갔다. 정원용이 인사하러 조대비 마마께 인사를 드리고 막 대전에 들러 가려는데, “영상 대감! 큰일 났습니다!” 갑작스레 승지가 헐레벌떡 영상을 찾다가 그예 맞닥뜨렸다. “무슨 일인가?” 정원용의 물음에 “진주에서 큰 민란이 일어났다 하외다.” 승지가 답하였다. 그러자 정원용의 늙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주에서 벌어진 민란은 백낙신(白樂莘)의 학정에 의해 빚어졌다. 조정에서는 장계(狀啓)가 올라와 있었으나 그 누구하나 입바른 소리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탐관오리의 학정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구제할 수 있는 방도가 없소?” 상감의 물음에도 아랑곳 않고 그저 먼 산 바라보듯 대답도 않으니 기막히지도 않던가. 이번 민란도 기실은 김씨 육십년 세도가 낳은 큰 비극의 하나임에는 타의를 추종한 대목이었다. 조대비는그런 무기력한 조정에 싫증을 안낼 수 없었다. 하지만 진주민란과 관련해 박규수가 장계를 올린 당사자이므로, 상감은 몸소 박규수에게 청을 넣어 대궐에 오도록 했다. 그러나 박규수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고사하기도 했으나 마지못해 상감의 체면도 헤아릴 요량으로 안핵사(按使)로 임명되어 경상도 진주 땅으로 가고, “대체 조정의 대신이라는 작자들이 무슨 낯짝으로 상감을 알현한단 말요!” 드디어 입 다물고 있던 조대비가 호통을 쳤다. 이때 조정 대신 몇몇은, ‘저 중늙은이가 왜 저렇게 고성을 올리는고.’ ‘누가 뒷배를 봐주려나?’ 당황하고 경황이 없던 조정대신들은 무슨 뒷배가 있어서 저렇게 설쳐대나 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조대비의 호통에 신료들 일부는 당황해하였지만 김좌근은 그런 조대비의 모습이 못마땅했다. 영상 자리에 비록 물러났다손 치더라도 실권자는 어디까지나 그이기 때문이다. “마마, 자고로 아녀자는 정사에 간여할 수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정서이옵니다. 한데 이리 정사를 관여를 하신다면 신민이 어찌 나라의 종사를 따르겠나이까.” 바로 그때였다. “하면 하옥대감께서는 순원왕후께서 생전에 수렴청정을 하실 때 그리 직언을 하셨습니까.” 조대비가 좌근의 말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때 좌근이 발끈한다. “마마!” 조정의 기류는 한층 살벌함을 더해가고 있었다. 대왕대비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좌근의 비위를 더욱 비틀기에 충분했다. 제 세력에 빌붙는 것 같았던 이가 어쩌다가 저런 자신감이 생겼을까.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하루아침에 저리 변하다니. 기막힌 일이로세.’ 그도 그럴 만 했다. 바로 흥선군 이하응의 힘이 서서히 세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걸 김좌근은 어리석게도 모르고 있었다. 한편 진주의 민란은 겉잡을 것 없이 되어버렸다. 안핵사도 조정에 백성들이 생계의 막연함을 들어 수습하고자 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오히려 자신의 집권에만 집착함으로써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지 않았다. 하다하다 못해 김좌근은 상감을 윽박지르다시피 하여 진주의 민란 주동자를 수색하여 죽일 것을 요청하였다. “전하! 민심을 선동하여 백성들에게 역모를 꾀하게 하였으니 하루 속히 주동자를 찾아내어 국법으로 엄히 다스릴 것을 감히 주청 하옵나이다!” 김병기도 덩달아서 주청하고 나서니 상감은 감히 입을 벌리고 싶어도 벌릴 수 없었다. 생색내기로 왕위에 올랐으나 민심의 고달픔을 몸소 체험하였던 상감 자신이 솔선수범을 보이고자 함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나라는 있으나 따로 따로 노는 꼴이 되고 말았으니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자무식한 상감인지라 저들의 비위를 맞추지 않을 수 없고, 또 그러자니 고달픈 백성들의 삶을 찾아 해결할 마음이 있으나 마땅한 방도를 찾아내지 못하고 하니 양날의 칼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그런 때에 조대비가 직접 나서서 다그친 것이 아닌가. 한데 신료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문다. 그런데 김좌근 부자가 발끈하여 반란의 진압을 주청하니 신료들이 덩달아서 “그리 하옵소서!”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깜짝 놀란 상감은 “그, 그리하시오.”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어 마지못해 승낙했다. 한데 신속하기도 했다. 진주에 급파된 군사들은 일제히 민란의 주동자를 찾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들을 찾아내어 본보기로 국법으로 군문에 효수하기에 이르렀다. 비로소 백성들은 조정의 무능과 함께 바른 소리를 못하는 살벌한 상황에 부딪혀 입을 벙긋 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상감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이를 보다 못한 조대비가 나섰다. 그때였다. “마마! 가시면 아니 되시옵니다.” 김병기가 대비의 걸음을 가로막아 무릎을 꿇은 것이다. “아니 가다니요.” “마마께서는 왕실의 어른이실 뿐. 정사에까지 관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사옵니다.” “무어라?” 대비는 김병기에 호통을 쳤다. “네 이×! 감히 나를 윽박지를 성싶으냐?” “마마!” 눈을 부릅뜬 병기는 “마마, 지난날의 사건들을 잊으시옵니까?” 하며 대들자 조대비는 섬뜩하였다. “마마께서 오늘날 이 자리에 앉으신 것은 조씨 집안이 아니고 우리 김씨 집안인즉, 김씨의 말에 토씨 하나 달지 않고 저희의 깊은 뜻을 헤아리시어 오래도록 왕실의 어른으로서 계시기만 하오면 되옵니다. 아시겠습니까, 마마.” “……” “마마의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 것은 아시고 계시지요? 선왕이 계시는 동안 대왕대비께서는 조씨 집안이 저지른 일들을 보고도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지켜보실 수밖에 없으신 그 심정을 헤아리시기라도 하셨사옵니까?” 대비의 입은 말문이 막혔다. 나이는 자신보다 더 어린 것이 지난날의 얘기를 꺼내다니. 네가 감히.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그러니 입을 다물 수밖에. “그러니 대비마마, 조용히 물러나십시오.” 어금니 악무는 투로 병기는 대비에게 물러나기를 권한다. 물러나는 시늉을 하더니 뒤돌아보며 조대비는 말한다. “내 오늘은 경이 강권하여 물러나오. 하나 만에 하나 흥선군이나 그 이하의 왕족, 그리고 백성들을 털끝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내 왕실의 어른으로서 경을 두고만 보지 않을 것이오.”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조대비는 김병기를 상대로 안동김씨에 대한 선전포고를 선언한 것이다. 득의양양하게 조대비가 제 처소로 들어가는데 김병기는 자신도 모르게 양 다리가 덜덜 떠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눈이 서슬 퍼런 것을 느꼈던 것이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함을 느낀다. 한낱 물정을 모르는 왕실의 아녀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대왕대비가 한낱 안동김씨의 하수인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에게 대항할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저쪽에게 새로운 판도를 넓힐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 된 것이다. 갑작스런 일에 병기는 깊은 밤인데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람의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닌 것이 이치라지만 이렇듯 자신이 조대비로부터 간담이 서늘한 경험을 처음 겪은 뒤로 줄곧 안동김씨와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어쩌다 저렇게 자신 있는 어투로 저를 제압하는지 종내 알 길이 없으니 캄캄하기 이를 데 없다. 좌근의 교활한 재주는 어느덧 녹슬어버린 지 오래고,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던 방백수령들은 어느덧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다. 백낙신이 이후로 진주의 민란이 발발하자 한낱 무지하기 그지없게 여겼던 백성들의 모양을 과소평가한 채 안일하게 살아온 조정 관리들에게 큰 타격을 가져왔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했다. 그러나 상감은 이를 만류하는데 급급했다. 하지만 좌근의 고집이 워낙 완고한지라 마지못해 승낙했다. 상감은 장인 김문근(金汶根)이 병으로 세상을 하직했음을 아랫것에게 전해 들었다. 그동안 상감의 몸은 더욱 쇠약해져갔다. 안동김씨의 손에 놀아나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도 서러운데 장악원에 기생들을 데려다가 향락에만 치중하니 왕비의 근심은 말할 것도 없고 주위 궁인들도 이를 근심하는 바가 컸다. 하지만 다른 일각에서는 이런 상감의 행태를 반겨하는 이도 있었다. 바로 이하응이었다. 이하응은 암암리에 대왕대비 조씨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다. 그는 평상(平常)에는 난을 치는 걸로 소일을 삼고 때때로 바깥바람을 쐬며 사대부집이라는 사대부집에 벌집 쑤시듯 찾아가 누더기 옷을 입은 채로 구걸을 하며 연명하고 살았다. 초반에 근심으로 한동안을 살았던 군부인 민씨는 덤덤하게 지아비를 마중 나가기도 했다. 세자도 없고 그렇다고 서출로 나올 법한 왕자도 있는 것도 아니니 상감의 처지가 매우 딱하다 못해 측은하기 이를 데 없다. 대왕대비의 진언만 있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하응이다. “대감, 몸조심 하시어요.” 부인의 염려가 담긴 말로 전송하는 것을 하응은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밤이면 밤마다 하응은 곤히 잠든 처자식들을 깨워서 구걸하여 얻어온 음식을 바가지에 담아가지고 와서 직접 먹이기도 하며 지냈다. 투정을 부릴 법한 어린 아들이 군소리 않고 목구멍을 넣어대며 먹으니 흐뭇하게 쳐다보는 하응의 얼굴에선 기쁨의 눈물이 솟구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상감의 뒤를 이어 즉위할 아들을 보는 하응의 눈에선 이제 뜨거운 눈물이 내린다. 대망의 1864년이라는 해가 밝아왔다! 상감의 병세는 차츰 악화일로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어의를 불러다가 진맥해보았으나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정도였으니 왕실과 조정의 근심이 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조대비는 달랐다. 자신에게는 명분이 필요했다. 상감의 직계는 죽은 명경대왕대비, 아니 순원왕후의 직계인데 반해, 자신에게는 아무런 핏줄이 없다. 지아비와 자식을 모두 잃은 청승스런 자신의 삶이 서럽건만 믿고 의지할 수 없는 자식이 없음에 속상해한 조대비였다. 그런 것을 자신의 비위에 맞추고자 하는 이하응의 설득에 넘어가 자신의 대를 이을 아들을 바치고자 함을 알고 이를 승낙했다. 그런 것이 결실을 보게 되었다. 설레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저주라도 내리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상감, 상감은 이제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권좌에서 벗어던지실 날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 그래요, 상감.’ 야심한 밤중에 대왕대비는 침전에 눕기도 전에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촛불에 비친 그녀의 얼굴에선 서슬 퍼런 웃음이 파문을 일으키니 그 섬뜩함은 타의를 추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다음날 오후 상감의 병상을 찾아간 대왕대비. 대왕대비는 상감의 병상 맞은편에 앉아 빤히 쳐다본다. 그러더니 상감의 머리맡으로 기웃거리더니, 그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하였다. “상감, 상감은 이제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짐을 훌훌 털어버리시고 그 죗값을 톡톡히 치르셔야 할 겁니다. 그래야 안동김씨의 손아귀에 놀아난 왕실의 업보를 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주상. 이제 그 죄업을 달게 받으셔야 합니다.” 저주가 담긴 말을 들었던 모양인지 상감의 눈이 번쩍하고 떠졌다. 그러더니, “마, 마마. 사, 살려주시오, 살려주시오!”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대왕대비의 손을 부여잡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 않고 대비는 냉정히 그 손을 뿌리쳤다. 소리치는 상감을 모르는 척 하던 대비였다. 대비의 손에 뿌리쳐진 상감의 양손은 허공을 향하여 손사래를 하더니 이내 상감이 혼절하여 고꾸라지고 말았다. 이를 본 내관이 서둘러 어의를 불렀다. 어의가 찾아왔다. 그러나 손으로 진맥을 해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마마, 전하께서 소생하시기는 매우 어렵사옵니다.” “그게 참말이오?” 대왕대비의 호들갑스런 대답에 어의는 몸 둘 바를 모른다. “물러가시오.” 점잔을 빼는 대왕대비를 뒤로하고 나가는 어의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까딱하다가는 안동김씨의 손에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왕실의 안팎에 안동김씨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대왕대비는 김씨의 힘이 이렇듯 크고 막강하였단 말인가. 하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대왕대비에게는 유일한 희망의 빛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모를 따름이었다. 하여 대왕대비는 외척인 조씨네의 젊은 인재를 수시로 불러들이고는 새로운 일을 도모했다. 자신들이 비록 김씨네에게 수모를 당한다지만 저들은 저들대로 약점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더구나 몇 해 전에 원자가 태어났으나 일 년을 간신히 채우고 세상을 떠났다. 아무리 날고 기는 김씨네라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이 왕가의 큰 어른으로 군림하는 이상 자연히 왕통을 지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거다. 이를 모를 리 없는 대비는 그날 밤. 성하와 영하 두 조카에게 기별을 넣어 자신의 처소로 불러들였다. 불러다 모아 놓고는 “상감이 오래 살 것 같지 않다. 그러니 너희가 수고해주어야겠다.” 하며 속내를 밝히려 하자, “네, 마마.” 일제히 조카가 대답하고 대비는 한숨 가벼이 쉬고 명령을 내린다. “너희들은 가서 흥선군네 집에 다녀오너라. 가서 흥선군이 있거든 거두절미하고 대왕대비전에서 대감이 오시기를 빗발같이 독촉한다고 전하여라. 연유를 묻거든 지금 상감의 병세가 위중하여 그러니 차후(此後)의 일을 의논코자 한다고 여쭈어라.” 대왕대비의 분부대로 조카들은 이하응이에게 가고 있었다. 때마침 하응이 문을 열며 인기척을 느꼈다. 두 사람이 보이자 하응이 버선발로 맞이한 뒤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들의 얘기를 듣고 나서 대궐로 들 차비를 하였다. 궁궐로 향하는 세 사람의 발길은 조급하면서도 빨랐다. 김좌근이네 집은 고요하기만 했다. 다만 좌근의 사랑에는 좌근과 그의 후처 양월선이가 있었다. “나리. 오늘따라 너무 기괴하외다.” “그게 무슨 소리냐?” 간간이 졸린 것을 참던 좌근이 묻는다. “소식이 근래에 없으니 그럴 밖에요.” 그때였다. “나리.” 청지기가 부르는 소리에, “무슨 일이냐?” 늙고 쇳소리 나는 목청으로 좌근이 묻는다. “대궐서 기별이 왔습니다.” “대궐에서?” “네.” “어인 일로 그러더냐?” “…….” 이때 김병기가, “어서 고하지 못할까?” 밖에서 재촉했다. “상감께서 위중하시니 서둘러 대궐로 오시라는 대왕대비의 전갈이랍니다.” 그러자 “뭐라고?” “서둘러 대궐로 듭시라는 대왕대비의 전갈이옵니다.” 이에 좌근의 표정이 낭패에 다다른 얼굴이었다. 병기가 안으로 들어가며, “우선 대궐에 들어가시어 사태를 관망하심이 어떠할지요.” 양아들의 의견대로 관복을 갖추어 대궐로 향했다. 좌근의 뒤를 부축하며 병기는 대궐로 떠날 채비를 차렸다. 60년 동안 권세를 누리던 김씨의 세상이 종말을 고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가마에 몸을 싣고서 서로 의견을 주고 받았다. “웬일로 대왕대비가 우리를 찾으신 걸까요?” “어디 우리뿐이겠느냐. 대신들도 오라고 한 게지.” “상감이 위중한 건 또 무엇이며.” “상감이 어디 하루 이틀 아팠겠느냐?” “하긴.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끝끝내 말이 없다. 대왕대비전의 분부를 받은 흥선군의 모습은 누더기 옷이 먼저였으나 이제는 예전의 비굴한 모습이 아니었다. 세상에 향하며 던진 원망과 분노와 불신이 오히려 자신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제 내일 모레면 대왕대비의 손에서 김씨네 권세는 박살날 것이다. 그걸 생각하노라니 그동안에 받았던 설움이 자신에게 짐이 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걸어서 대궐에 들어선 하응은 내관의 안내를 받아 조씨의 처소에 당도한다. “마마, 흥선군 대감 듭십니다.” “오, 뫼시어라.” 안에서는 대비의 반가워하는 기척이 들린다. 어인 영문인지 모르던 하응이 대비전을 바라보자, “앉으세요, 흥선군 대감.” 정든 님 만나 반가운 듯 조대비가 자리에 앉기를 권한다. 그러더니, “대감, 지금 상감의 병세가 많이 위중하답니다. 그래서 내 친히 후사를 정해야겠는데.” 대비가 하응의 시선을 응시한다. “하문하시옵소서.” 하응의 대답에 대비가 신이 났던지 친근한 눈길로 바라보며 결정적인 말을 꺼내는 게 아닌가. “대감의 아들들 중에 명복이라는 아이가 있다지요?” 순간 하응이 떨떠름해하며, “네, 그렇습니다만.” 대답한다. 그러자 대비는 웃으며, “그 아이를 내게 주세요.” 부탁했다. “네?” “대감의 차남 명복이를 제게 주시라는 겁니다.” 어인 영문인지 몰라 하응은 한동안 말을 못했다. 갑작스런 대비의 행보에 당황스러웠던 그는 “어인 연유로 그리 말씀하시나이까?” 하며 대비의 의중을 묻는 것이다. “방금 말했다시피 상감은 지금 병세가 위중하여 사경을 헤매는 형국입니다. 그뿐입니까. 그에게 세자가 나왔으나 단명(短命)하여 보위를 이을 수 없는 지경이니 차제(此際)에 대통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근엄하게 답하는 대비의 모습을 본 하응의 느낌은 숙연해져 있었다. “명복이가 금년에 몇이던가요?” “열둘이올시다.” “열둘이라.” 엷은 미소 뒤에는 무언가 확신이 차보였다. “대감도 알다시피 나는 일찍이 청상이 되었으나 헌종대왕이 하세하면서 참척을 겪은 사람입니다. 나는 내 아들이 보위에 오르기 전에, 무한한 사랑을 줘보기도 전에 시부모님의 엄한 분부가 있고 하여 따로 떨어져 살았습니다. 시아버님의 뒤를 이어 하나뿐인 아들이 보위에 올랐을 때는 매우 기뻤습니다. 하지만 시어머님의 간섭이 심한지라 나는 상감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 채 바라봐야 했습니다. 게다가 젊은 나이에 하세하고 나니 그때의 아픔을 말로 어이 형언합니까. 슬프고 원통하다 못해 생떼 같은 자식이 죽은 것을 모른 척 하다시피 한 김씨네에 대한 원한이 가슴 깊이 사무치고는 합니다. 그래서 이때까지 견디다보니 생각 드는 것이 미처 채워주지 못한 모정을 대감의 자제 하나만이라도 주고 싶은 맘이 있었습니다. 이내 맘 한편이 아려오기도 하니 견딜 수가 있어야죠. 대감, 나는 대궐의 한 귀퉁이에서 살아오다시피 했습니다. 시어머님과 그 곁에서 아부하던 김가네가 한참 권세를 누리고 용상을 농락하는 모양을 보며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치욕을 견디며 살아왔습니다. 하나인 자식을 잡아 죽인 이 원수를, 내 집안을 박살낸 이 원수를 어이 갚을까. 나는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김씨네를 박살낼까. 어떻게 하면 김씨네한테 빼앗긴 왕실의 명예를 되찾을까. 별 궁리가 다 들더이다. 그런데 인생사가 새옹지마라고 하던가요? 이렇듯 대감께서 내게 다시 오심을 알았을 때 그 기쁨이 말로 어이 형언하기가 어렵던지.” 대비의 말에 하응의 눈시울에는 뜨거운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하하하……. 이 사람 주책없이 넋두리만 늘어납니다그려. 대감.” 간신히 소회를 마친 대왕대비는 하응에게 약속한다. “네, 마마.” 하응의 대답에 대비는 “대감의 둘째아들 명복이를 내게 주시면 금상의 후사로 왕통을 이을 것입니다.” 하응의 눈에선 광채가 피어났다. “마마, 그게 참이십니까?” 하응의 격세지감에 찬 물음에 웃으며 “하하하하……. 거짓말이겠습니까? 그렇다니까요. 내 부군이신 익종대왕의 적통을 이을 겁니다. 염려마세요.” 대답하며 대비는 진실한 마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순간 하응의 눈에선 기쁨의 눈물로 흐르고 연신 그는 큰절을 해대었다. 깔깔거리며 대비는 즐거워하였다. 훗날 흥선대원군이 될 하응과 조씨의 밀담이 오고 가는 동안 조정대신들의 등청은 신속히 이루어져 어전에는 사람의 발 디딜 것도 없이 만원을 이루었다. 대왕대비가 어인 연유로 잣신들을 찾았을까. 의문이 든 채 서로 눈치 보기에 바쁘다. “대왕대비께서 어인 일로 우리들을 부르셨을까요? 대감은 아시는 게 있소?” “내야 알겠소? 오라고 하니 오지.” 신료들의 설왕설래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못한 김병기가 “거 조용히 좀 하소. 대비가 오셔야 알 일을. 왜 지레짐작하시오? 거 융통성 없는.” “융통성 없기는 김씨네가 더하는구먼.” 어느 노대신의 말에 발끈한 병기가 “뭐요?” 하며 소리쳐댔다. 이때였다. “대왕대비마마 듭시오.” 상궁이 먼저 와서 대왕대비의 행차하심을 알렸다. 그러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료들이 대비를 마주하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예전의 뒷방에서 칩거하던 조씨가 아니었다. 득의양양하게 편전에 든 조대비.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지금의 금상께선 자리보전만 하고 계시오. 그런 터에 후사가 마땅히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통을 이을 왕손이 없으니 이 어이 통탄할 일이 아니리오. 하여 신료들께서는 이 점을 각별히 유념하시어 만에 하나 상감의 변고가 일어난다면 어찌해야함이 좋을지 경들은 깊이 헤아려 주기 바라오.” 대왕대비가 구두로 내리는 지엄한 분부를 마다할 일이 없었다. 좌근이네 부자도 그러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안동김씨의 세도라 하지만 언젠가 대왕대비의 손에 결단이 나 몰락하고야 말 것임을 모를 리 없는 김씨네 부자였다. “예, 마마. 그리하겠나이다.” 좌근의 확답을 들은 조대비는 “내 경들을 믿겠습니다.” 인자한 미소를 띠며 조용히 물러났다. 대비의 행차에 대신들은 한패거리처럼 당혹스러워하였다. 예전의 전철대로 전국 곳곳에 수소문하여 왕손을 구해야 하는가. 생각할수록 앞이 캄캄하다. 조대비는 바로 이 점을 간파했다. 왕실에서 그것도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순조의 며느리로 와 궁중의 권모술수(權謀術數)를 몸소 겪은 그였다. 그렇기에 흥선군 이하응을 포섭할 수 있었다. 더욱이 하응의 일가는 시아버지와 지아비, 심지어 자신의 아들 헌종의 신임을 받아온 바가 있지 않던가. 그 점을 생각하면 흥선군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연못 속의 물고기처럼 먹을 만한 떡밥이 있나 하며 기다리는 아둔한 대신들의 본성을 세파에 시달리며 터득한 조대비 자신이었다. 그 떡밥을 던진 자신이 새삼스럽게 대단함을 느끼는 것이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는 하응이의 태도를 되새기고 떠올리며 그동안의 울분에 대한 쾌감―짜릿한 쾌감을 만끽해보는 것이다. 한편 조정에서 나온 김병기는 아뿔싸 하며 낭패를 보고 말았다. ‘이런 능구렁이 같이 교활한 것을 보았나. 대비가 그렇게 나설 줄 누가 알리오? 흥선군하고 죽이 맞아 좋다고 하더니. 이를 두고 한 개수작이렷다.’ 병기는 좌근에게 설득하였다. 하루 빨리 팔도에 수소문해 상감의 후사를 잇도록 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이겠느냐?” 좌근은 그예 단념했다. “그래도, 해야지요. 후사가 급한데.” 병기가 학을 떼며 대드는 것을 좌근은, “지금의 상감이 보위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우리 대왕대비마마의 의중이 있었기에 성사되었다.” 우리 대왕대비 마마는 명경왕후(순원왕후)였다. “…….” “하나 지금은 때가 아니니라.” “…….” “진작 세자빈 간택을 할 때 김씨네로 하지 않은 이상은 힘든 일일세.” “…….” “그러니 대왕대비의 말에 따르도록 하세나.” 병기는 양조부 김조순의 잘못된(?) 선택이 자신들에게 족쇄로 채워짐을 느꼈을 때 원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 좌근의 무기력함을 본 병기는 이제 육십 년 넘는 세도의 지는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보기는 이제 시간문제라는 것을 느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상감은 왕후 김씨의 곁에 하세하였다. 상위복― 처마 위에 오른 내시의 구슬픈 소리에 신료들은 일제히 오열하였다. 국상을 무사히 치른 직후에 조씨는 대신들을 불러들였다. “대감들께서는 왕족들을 수소문하지 않았소?” “네, 마마.” 대신들이 일제히 대답하자, “할 수 없군요.” 대비가 단념하였다. 보위는 이제 대왕대비 조씨의 손에 달려 있다. “내 직접 지명하오. 선왕의 후사는 흥선군 이하응의 이남 명복이로 할 것이오.” 망설임 없는 조씨의 결단에 대신들은 입을 다물었다. 한술 더 떠 대비는 “그 아비인 흥선군 이하응에게 대원군(大院君)으로, 그 어미인 군부인(郡夫人) 민씨는 여흥부대부인으로 높여 부를 것이니 그리 아시오.” 자신의 명분을 차곡차곡 쌓듯이 분부를 내린다. 대신들은 일제히 조씨의 편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식은 좌근의 후처 양씨(월선)에게 전해졌다. 양씨는 이제 이빨 빠진 호랑이인 김좌근의 곁에 있으면서 방바닥 치며 통곡하였다. “아이고, 분하고 원통해라. 조씨네 작자들한테 속았구랴. 아이고, 영감. 분하고 원통허요!” 이 집 당주 좌근의 시야에는 체념 내지는 자포자기에 젖어들었다. 김조순 일가의 몰락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대감, 인자 언제 어뜨케 요로크롬 산단 말이요.” 갑작스런 비보에 월선이의 눈은 불안에 휩싸인 눈빛이었다. 영상을 수차례나 지낸 영감의 후실로 군림한 것도 엊그제이건만 입지는 좁아지고 자신의 알 수 없는 미래가 먹구름이 몰리어 있어 진퇴양난이 아니고 무엇일까. 자신의 불안한 심사는 좌근이의 시선에서는 부담이 아닐 수 없다. 하기는 양씨 자신으로서도 자포자기의 심정이 아닐 수 없다. 자신도 좌근의 무한히 세질 것 같은 권력으로 여러 사람의 골통을 먹이기도 했다. 그 심사가 오죽이나 뒤틀리겠는가. 하다못해 그 알량한 솜씨로 수령방백의 넋을 빼내어 조선 팔도에다 썩어빠진 잡인(雜人)을 벼슬아치에 들어앉히니 이 어이한 꼴인고. 그뿐인가. 왕손을 없애고자 했을 뿐만 아니라 이하응이와 같은 총명한 왕족을 없이 여기기도 했으니 월선이의 머리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리라. ‘하응이 그놈만 아니었어도……’ 한참을 넋두리해대던 월선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노구의 몸이 된 좌근은 그제야 침구를 정리하여 잠자리를 마련했다. 좌근은 이제 육순의 나이에서 한참 지나간 나이였다. 이 고비만 간신히 넘긴다면 믿던 상감의 비보에 낙담하지 않을 수 없는 그였다. ‘아버님이 생전에 계셨으면 어떠했을까.’ 늙은 좌근의 시야에 아버지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아버지라면, 아버지라면, 아버지라면, 아버지라면……. 아버지라면 어땠을까. 자기도 모르는 새 잠들었다. 그런데 잠든 좌근이의 시야에서 웬 낯익은 노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버님!” 아버지의 모습에 반가워 어쩔 줄을 모르는데 노인의 얼굴은 근엄했다. 시신을 입힐 법한 옷을 차려 입은 모습으로 찾은 것 같은데 웬일인지 자신을 꾸짖으려고 하는 눈치였다. “아버님, 어인 일로 오셨나이까?” “몰라서 그러느냐?” “네?” 좌근은 영문을 몰라 쩔쩔 맸다. “네놈이 후취한테 바람나더니 이제는 아비가 일구어 놓은 수확을 대들보까지 들추어내어 바치기까지 했다. 그뿐인가. 집안에다는 뇌물을 사고팔고 해서 집안을 망신시킨 것도 유분수지.” 좌근은 아버지의 꾸지람을 듣고 있으면서 어쩔 줄 몰랐다. 등줄기엔 식은땀이 흥건해짐을 느낀다. “아, 아버님……” “이놈, 시끄럽다. 네놈을 손수 가르쳐주지 못한 나로다. 그러니 내 손에 죽어야겠구나.” 하며 기합으로 오른손에 들려 있는 긴 지팡이로 좌근의 머리를 후려치는 것이다. “아버님!” 외마디 비명을 지른 좌근 영감의 온몸은 역시 식은땀 투성이였다. 눈을 뜨고 보니 첫닭이 울며 아침햇살이 움트듯 밝아오는 것이다. 그제야 한시름을 놓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만남 뒤에 좌근은 시시때때로 식은땀이 안날 수가 없었다. 대체 권력의 존재가 무엇이건대 수많은 백성과 등져야 하며 믿는 동지의 배신을 맞으며 서로 갈구고 죽여야만 지킬 수 있는가. 오랫동안 권력의 중심부에 있으면서도 이 평범한 물음에 애써 외면하지 않았는지 다시금 되새기는 것이었다. ‘갑자기 보위에 올려놓고 자기는 어떻게 하려는 걸까. 흥선군이 덥석 조대비와 손을 잡은 것도 당황스러운데. 혹시 모종의 음모를 꾸몄을까? 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듯 능구렁이 담 넘어가듯 섣불리 보위를 이하응에게 넘겨줄 리가 없는데.’ 이런 저런 궁리가 좌근의 머리를 맴돌 즈음에 양씨는 영감의 비명소리에 놀라 사랑채로 들어온 것이다. “대감, 무사하시오?” 소스라치게 놀란 듯 부인의 눈에선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꿈을 꾸었나보이.” 좌근이 태연하게 부인을 대했다. 대원군으로 봉해진 이하응. 그는 조선 역사를 통틀어 유일하게 살아생전에 봉해진 ‘대원군’으로 오늘날 우리들에게 잘 알려지게 되었다. 대왕대비 조씨의 명에 따라 옥좌에 오르게 된 명복의 예복 입는 모습을 지켜본 어머니 민씨의 눈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솟아 그칠 줄 모르고 아버지 하응은 이렇듯 듬직하게 자라준 의젓한 아들을 보며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그저 기쁜 마음으로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감축 드립니다, 상감.” 예복을 잘 갖추어 입은 하응은 신하의 예로서 큰절을 올렸다. 민씨도 지아비를 따라 큰절을 하였다. 큰절하면서 명복과 인사를 말릴 정도의 실랑이가 잠시 있었을 뿐. 절차는 원만히 이루어졌다. 상감은 문을 나서면서 정든 집을 떠나 대궐에 들어가는 것을 알고 아랫것들을 거느리며 집 구석구석을 두루 살피었다. 그리고 대궐로 가기 전에 흥선군의 집 밖은 이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흥선군의 집은 훗날 운현궁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오늘에 이른다. 어쨌든 지엄한 신분이 된 명복은 동네 친구 녀석들과 눈물로 헤어진 뒤 가마에 올라 타 대궐로 향했다. 대궐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멀고 고되던지 새 상감 명복이 그만 졸린 채로 꾸벅꾸벅하는 것이었다. 이윽고 대궐로 들어서고 나서 왕실의 어른인 대왕대비―양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게 되었다. 대왕대비 처소 안에 들어간 명복은 불안한 마음을 추스르며 대왕대비 면전에 다다랐다. 이때 대왕대비가 인자한 얼굴로 그를 대한 것이었다. “대왕대비마마 이십니다. 어서 예를 갖추세요.” 근엄한 흥선대원군의 말에 새 상감은 대왕대비께 큰절을 올렸다. 그러자, “오, 네가 명복이냐?” 대왕대비가 물었다. 명복은 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확신을 얻은 듯 조씨는 양손을 벌리며 “이리 가까이 온.” 하며 제게 오도록 손짓했다. 이에 상감은 그 곁에 다가갔다. 상감이 자기 앞에 다다르자 조씨는 왈칵 그를 껴안더니, “잘 오셨습니다. 잘 오셨소.” 울먹이는 소리로 상감을 토닥이는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 본 모든 대소신료들은 “경하 드리옵니다!” 일제히 상감의 즉위를 축하했다. 그리고 곧바로 즉위식을 거행하니 이분이 훗날 ‘고종황제’로 잘 알려지게 된다. 이렇듯 새 상감의 등극은 곧 안동김씨의 몰락의 서막임과 동시에 이하응이 권력자로 군림하는 계기를 낳는다. 즉위식이 막 끝나고 그날 밤. 좌근은 서둘러 청지기를 불러놓고 병학, 병국 형제와 병지와 병덕을 데려오라고 이른다. 왜 네 명의 조카를 부른 것일까. 좌근 영감의 부름을 받은 조카들은 모두 한자리에 앉았다. 불러다놓고는, “새로이 상감이 보위에 오르신 마당에 무슨 넋두리냐 만은 지금은 시국이 시국이니만치 젊은 너희들이 우리 집안을 살려내야 한다. 나와 같이 영악한 이하응이를 미워한 사람들은 죽어 마땅하다지만, 너희들은 모두 흥선군이 신임하고 있으니 내 한시름은 놓은 셈이다. 그러니 이 못난 숙부의 전철을 따르려 하지 말고 첫째도 흥선군, 둘째도 흥선군, 셋째도 흥선군에게 충성으로 받들어야 한다.” 좌근 영감의 곁에는 병기가 있었으나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조카들이 흔쾌히 대답하자 좌근의 입가엔 안심한 모양이 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튿날 저녁에 병졸들이 좌근의 집에 들이닥쳐 가택수색하기 시작했다. “웬 놈이냐!” 하며 외치는 청지기의 말에 아랑곳 않고 짓밟다 못하여 집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잡동사니들은 폭격 맞은 것처럼 어지러이 늘어서고 여종들은 모두 비명 지르기 일쑤였다. 이윽고 월선의 처소에도 병졸들은 들이닥쳤다. “웬 놈이냐!” 앙칼진 소리로 양씨가 소리치자, “죄인 양씨를 끌고 오랍 시는 전하의 어명이오!” 포도대장(捕盜大將)의 엄포가 쩌렁쩌렁하였다. “무, 뭐라? 새 상감이 나를 잡으라고 했다고?” 양씨의 앙칼진 소리에 아랑곳 않고 대장의 명대로 병졸들이 그녀를 끌고 간다. “이놈들―! 놓지 못하느냐? 이놈들아―! 놔라, 놔라―!” 서울 장안 떠나가라 외치는 양 모의 목소리에, “어머니.” 병기는 지켜보며 흐느껴 울뿐, 아무런 말이 없고 좌근은 애첩의 끌려가는 모습에 이끌려 세상무상함을 한탄하듯 헛웃음만 칠뿐이었다. 병졸들에게 끌려간 월선이 당도한 곳은 의금부(義禁府)였다. 의금부에 당도하니 형틀은 이미 갖추고 있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권력이 이렇듯 자신의 목숨을 헌신짝 버릴 수 있는 지경에 다다랐던가. 월선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이제 내 인생사가 마지막이로구나. 대감의 품에 단 하루라도 안길 것을. 후회가 막심하다. 끌려 나온 월선은 패대기쳐졌다. “죄인 양씨는 고개를 들어라.” 양씨는 코웃음 쳤다. ‘나가 춘향이다냐. 칫.’ 그러나 왕명이 지엄하여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보니 흥선군과 조대비가 들어 있다. 모두 근엄한 얼굴로 자신을 째려보았다. 이제는 세상사 다 누리고 이렇게 죄를 달게 받누나 생각하노라니 눈물이 차마 떨치지를 못한다. 이내 형틀에 앉은 월선에게 주리가 틀려졌다. 종아리가 찢어지고 살이 타는 냄새가 고약하니 비명소리가 앙칼지기는 당연하다. 그런데 이를 보던 대원군의 눈에서는 저승사자의 눈웃음이 보였다. 국문하던 것을 손수 멈춘 대원군은 월선에게 말한다. “양씨는 정녕 모르는가. 그대의 죄는 삼천리강산을 피로 물들여도 성치 않거늘.” “나는 모르겄소.” “모르겠다.” “그렇소.” 그때 대왕대비의 호통이 일어났다. “네 이년!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놀려 대느냐!” 웃음 터진 듯 월선이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오직 하옥 대감의 사랑에 보답하였을 뿐. 백성이 무얼 어떻게 사는지 나는 모르오.” 대원군은 표정이 굳더니 “저것을 매우 조지거라.” 포졸들은 월선이의 이실직고를 위해 주리를 틀었다. 의금부에 끌려갔다는 소식에 좌근은 날이 밝은 즉시 아랫것에게 시켜서 직접 대원군을 만나겠노라고 하였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대원군이 만남을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다음날 저녁에도 국문은 계속되었다. 김좌근의 행차는 이어졌다. 좌근은 몸소 의금부에 당도하고 보니 앙칼진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간담 서늘하다. 권세가 무엇이건대. 애지중지한 애첩이 저렇게 엄하게 죄상을 달게 받는고. 서둘러 좌근은 국청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대원위(大院位) 대감―!” 흥선군에게 국문 받던 월선이의 비명소리는 사그라지고 실신했다. 애처로이 외치던 좌근이의 소리에 대원위는 두 모양을 보고 고소해하며 웃었다. 붉은 빛에 비쳐져서 저승사자의 얼굴처럼 보이니 섬뜩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나마 자신을 우롱해대던 일개 상갓집 개가 저렇듯 상감을 보위에 세우고 천하를 호령하던 힘이 생겨나다니. 겉으로나마 판단하려고 했던 무지한 자신을 책망하고야 말았다. “대원위 대감, 부디 우리 안사람 좀 살려주시오. 내 다시는 흥선군에게 아니 대원위에게 해하지 않으리다.” 애걸하는 영감의 청을 하응은 제안한다. “하옥 대감, 제안 한 가지가 있소.” “말씀하시오.” “월선이 저 아이는 김씨네에서 있으면서 무수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소. 그뿐이오. 전국 팔도에 탐관오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설쳐댔으니 일일이 일러 말해 무엇 하리오. 헌데 월선이의 어느 면에 반했기에 대감의 창자가 끊어질 정도의 지경이 됐소. 양귀비 마냥 경국지색(傾國之色)이 되기라도 하나.” 대원군의 비아냥대는 소리에 병졸들이 일제히 키득키득 거리며 웃는다. 한때나마 좌근의 서슬 퍼런 권력 밑에서 숨죽인 민중들의 한이기도 했다. 흥선대원군과 좌근이 이후에 밀담을 나누고 난 뒤 월선은 김좌근의 집에서 나왔다. 이후의 행적은 전무하나 월선이 비상(砒霜)을 먹고 죽었다는 소문만 무성할 뿐.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다. 좌근은 월선을 버린 대가로 네 차례 영의정을 지낸 것을 고려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지내도록 했다. 이제 이하응의 세상이 도래(到來)했다. 김씨의 일가는 권좌에서 내려왔지만 이하응의 밑에서도 호의호식하며 명문가로서의 체면을 많이 차릴 수 있게 되었다. ―대미(大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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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시대_01 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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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관안(度官案) 권4 
티모시에게 
제112차 소과 생진시 방목 
교육등록 제5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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