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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시대(時代)-01
시대(時代)-01
―이 이야기는 허구에 지나지 않은 이야기나 장차에 가서는 진실한 역사로 밝혀질 것이니 이점을 깊이 유념하여 언젠가 언제 어디선가 한 나라의 밝혀지지 않은 역사를 드러내는 날이 있거든 기꺼이 밝혀다오. 이 몸은 죽고 없더라도 기록은 남을 것이니 꼭 진실이 밝혀지는 그날을 기약하여 고이고이 지켜야 한다. 이 아비의 원(願)을 풀어다오. 아버지의 유품을 받은 덕호는 앞이 캄캄해짐을 느낀다. 아버지의 유언도 유언이지만, 어쩌다가 아버지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역사 기록들을 손수 간직하시다니. 강자가 승자가 되는 세상이기는 하지만 이렇듯 고이고이 간직하라는 유언을 남기시는 걸 보면 아버지에게는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으리라는 걸 모를 리 없는 것이리라 짐작할 뿐이다. 일각에서는 ‘선사국’이라는 왕국이 있어 천하를 호령할 만한 국력을 가졌다고는 하나 언제 어디서 흥망을 했는지 알 길이 없고 한다는데……. 덕호가 움켜쥔 이 책이 바로 그 ‘선사국’이라는 나라의 이야기라고 한다. 굳이 믿어보려고 해도 의심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고 짙어질 뿐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지인을 통해 알음알음해서 고명(高明)한 학자를 알아내어, 보름이 지나서야 학자가 있다는 사무실로 곧장 찾아갔다. 사무실로 찾아가보니 다소 누추한 곳이기도 했다. 허름한 건물에 눅눅하고 어둔 분위기였다. 수납장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수납장에 보관되어 있는 고서적과 고문서들이 즐비해 있어 학자의 연구실임에는 틀림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깊은 한숨이 나왔다. 제대로 잘 찾아왔구나. 하며. 학자가 그런 덕호를 반기다 못해 안심해하면서 어떤 연유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덕호가 아버지의 유품을 얻기는 했으나, 왜 굳이 밝히지 못한 역사를 드러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찾아왔다니까 알아들었다는 듯 끄덕이는 동시에 학자는 알아들었다며 그 책을 내놓으라고 해서 순순히 주었다. 책의 내용을 꼼꼼히 읽어보더니, “아니 이것이.” 하며 책을 읽던 학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지.” “이건 선사국에 관련된 내용이긴 합니다만 전혀 새로운 내용이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라는지라 덕호는 당혹함을 금치 못하였다.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는 건지.” “자세한 건 알 수 없으나 일각에서 선사국의 건국을 두고 다툼의 여지가 있는지라.” 다툼의 여지란, 한 나라의 정승의 반열에 오른 궁(宮)이라는 성씨를 가진 사람이 정변(政變)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簒奪)하여 스스로 보위에 올라 나라를 ‘선사국’이라고 칭했다는 것과 그가 죽을 즈음에 다시 전 왕조의 왕손을 새로이 후계자로 점지하여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의문이라는 것이다. 수십 년 전에 발견했다는 고서 ‘선사국기’라는 책에서만큼은 그리 언급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상으로부터 엉겁결에 물려받은 책에서만큼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반전을 보이는 터였다. 학자도 그와 같은 생각을 했었다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덕호는 학자의 시선을 떨치지 못하고 그저 기다리고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기를 수 시간이 지나서야 “이 책을 제게 주실 수 없을까요?” 학자가 입을 떼었다. “네?” “이 책은 기존의 ‘선사국기’라는 자료를 뒤집어 엎을만한 자료가 담겨있어서 좋은 연구 자료로 쓰일 거 같아서요.” 갑작스런 학자의 물음에 얼떨떨해하고서는 허락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네.” 그때였다. “아버지의 귀중한 유품이 어떤 이유로 이렇게 제 손 안으로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료는 선사국기의 발행연도보다 더욱 앞서서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큰 의의를 가지지 않을 수 없군요. 더욱이 이렇게 표지 제목도 언급이 안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출판이 되기도 전이구요. 게다가 이렇듯 활자본(活字本)으로 되어 있어 더욱 신뢰도는 높기는 합니다만.” 학자는 자신감 있게 덕호에게 책을 내보이며 자신의 뜻을 밝혀냈다. 덕호는 단 한번도 책을 읽어보거나 가까이 한 적이 없었다. 훑어 읽어본 적도 없었다. 그랬기에 덕호는 이 노회(老獪)한 학자의 말에 놀아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아버지가 저렇듯 보잘 것 없는 책에 대해 비밀로 붙이라고 했던 걸까. 어째서.’ 놀라움과 함께 덕호의 눈에서는 의혹의 그림자가 차츰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덕호는 마치 어린 아이를 내 맡긴 뒤에 아쉬운 심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는 어느덧 중년에 접어들었다지만 학자의 확신에 찬 눈빛에 이끌려 그를 믿어보기로 하고, 아버지의 유품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있게 되었다. 세월이 차츰 흐르고 흘러 넉 달이 되는 시점이었다. 마침 춘계 학술대회(春季 學術大會)가 개최되는 시점이었다. 학자는 발표할 자료를 손수 귀한 보물 다루듯 들고 와서는 선사국기에 대한 재인식을 주제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학계에서는 물론, 주요 언론 일간지에서도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되었다. 선사국기는 저자가 분명하지 않으며, 그럼에도 저자 스스로가 손수 필체로 적은 자료이며 신빙성이 떨어짐을 주장하였고 심지어는 이 책은 앞뒤 사정을 헤아리지 않고 기록한 탓에 망상에 가깝지 않을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이 사건이 텔레비전에 전파를 타는 건 시간 문제였다. 결국 학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덕호는 아버지의 유언을 거슬려야 했음을 느끼기 시작하여 후회로 밀려드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려야 했다. 텔레비전에 비춘 학자의 눈에서는 광채(光彩)가 서려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리는 듯하다. “전 왕조의 마지막 왕의 실정(失政)에 의해 정변을 일으켰다는 궁씨의 실질적 존재는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그 이름은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이번에 발견한 자료에는 그 이름이 명확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름은 ‘국(國)’이며 선사국의 정승으로 기록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학자의 말에 신빙성이 있을까. 덕호는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소식은 걷잡을 수 없이 사실로서 굳혀지고 있었다. 덕호는 공연히 자신이 일을 저지른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들었다. 이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시류를 잘못 탔는지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삼 개월 후에 노학자에게 넘긴 책이 이름 있는 박물관에 기증되었다는 사실은 덕호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죄책감에 쉬이 이기지 못한 채, 가족을 이끌고 미국 땅으로 이민을 갔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이와 같은 문구로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천범(天範)이라는 황제가 있었다. 여기서 ‘천범’은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법통을 의미하는 것이니 보통들 생각하는 태조(太祖)라는 묘호와 맞먹는다고 할 것이다. 어쨌든 이 천범이라는 황제에 대한 이전의 기록을 찾아보기 어려우나 왕위에 올랐을 무렵에 이미 자식을 두었다는 기록이 적혀 있는 걸 보면 부인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즉위한 지 1년 뒤에 왕후를 맞아들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슬하에 있는 자식은 모두 전처의 소생임이 드러나는 셈인 것이다. 어쨌든 전처에 대한 행적조차 언급이 되어 있지 않으니 석연치 않지만 왕은 왕자 다섯에 공주 하나를 두었다. 그 중 왕자로 백경(白鏡), 윤기(胤基), 금운(錦雲), 명소(明昭), 원모(元模)를 두었으며, 공주로 유일하게 강운(江雲)만을 두었을 뿐이다. 특히 맏이인 왕자 백경이 총명하여 주위의 신하들로부터 무한히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때문에 금상의 덕망은 하늘을 감동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지만 즉위한 지 십 년이 되었을 즈음. 천범 황제에게 근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어느덧 나이가 들어가고 있었고 늘그막에 왕실을 탄탄하게 다져놓지 않으면 후계 문제로 인해 나라가 어수선해질 소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료들을 불러다 의논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어전회의(御前會議)에 모여 의논하기로 마음먹은 금상은 내관으로 하여금 서둘러 신료들을 불러다 어전회의에 참석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이후 노소를 막론하고 신료들이 어전에 들어섰다. 신료들이 모두 도착하자 왕은 자신의 후사를 어떻게 정할 것이며 이들의 자질을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지 등도 함께 의논하고자 한 것이다. 우선 나이 들어 노쇠하지만 총명한 신하 하나가 나선다. “신(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길응(吉應)이 아뢰나이다. 신의 생각으로는 조정뿐만 아니라, 조정 안팎에 신망(信望)이 두터운 왕자를 태자로 책봉하는 것이 더욱 좋다고 생각하옵나이다. 이를 헤아려보건대 상감마마의 장자이신 백경 왕자마마가 적당하리라 보옵니다.” “신 또한 그리 생각하옵니다.”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길돌(吉突)이 이에 화답하였다. 그는 길응의 아우였다. “신들 또한 그러하옵니다.”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같이 화답했다. 이날 어전회의에 참석한 신료들의 이름을 열거하면 이러하다. 숭록대부(崇祿大夫) 장자성(張資星), 숭정대부(崇政大夫) 온희구(溫喜求), 정헌대부(正憲大夫) 이보고(李補顧), 자헌대부(資憲大夫) 허안(許顔), 가정대부(嘉靖大夫) 부억(夫抑), 가선대부(嘉善大夫) 고영랑(高英郞), 그리고 현 조정의 재상인 궁국(宮國)이 있다. 특히 궁국은 앞서 보았다시피 덕호가 손수 기증한 ‘책’을 연구한 노학자가 주장한 바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이때 영의정(領議政)이라는 벼슬을 맡고 있었는데 이는 왕에 버금가는 실력가(實力家)임을 짐작할 수 있으며 왕의 부재 시 잠시 동안이나마 왕의 정사를 대신 도맡는, 왕의 직권(職權)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대광보국숭록대부보다 큰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 왕이 잘못하다가는 폐위당하다 못해 왕실이 전복(顚覆)될 소지를 남기는 꼴인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나 ‘책’으로나 그 정도의 전례가 보통의 역사서에서처럼 멸망 시기에 발견된 것 말고는 없기에 왕실의 안정은 당연시하게 보장된 것이다. 그밖에 궁국의 아들인 통정대부(通政大夫) 궁운봉(宮雲鳳)이 있다. 신료들의 지지에 힘입은 바에 의해 맏이 백경이 태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태자 책봉 소식에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비로 책봉된 바가 없어 지금의 왕후로 앉지도 못하고 별세한 부인 가씨(價氏)라는 여인의 소생이라는 것이 문제였고, 주변의 왕자와 공주들의 수가 많으며 모두 다 장성했기 때문이다. “대체 형님이 태자의 자격이 없다니. 누군가가 형님을 시샘하고 덤비려는 수작인가 보오.” 백경의 처소에서 육남매가 한 자리에 앉았다. 그중 윤기가 말문을 연 것이다. “이는 필시 인비(仁妃)의 소행인가 보오.” 셋째인 금운이 찬동하며 충동질을 부추겼다. 그러나 백경은 성정이 소탈해서 그저 허풍떠는 수작이려니 하며 웃어넘겼다. “형님, 웃을 일 아닙니다.” 두 오빠의 부추기는 말을 듣고서 강운 공주가 한소리 해대었다. “두 오빠는 성미도 어지간히 하시려구요.” 앞에 놓인 찻잔을 들며 진정을 시켰다. 강운도 맏이와 같은 성품이고 매사에 신중한 사람이었다. 나라가 세워진 지 어언 삼십여 년 되고 나라가 안정되었으나 왕비를 따로 책봉하지 않고 후실을 세 명이나 두었을 뿐이었다. 궁에서 일하는 내인 셋을 승은으로써 맞아들인 뒤 후사를 많이 보았다. 그 중 인비는 팔남매를 의비(義妃)는 구남매, 예비(禮妃)는 삼남매를 두었다. 그런데 이들 모두도 소년티에서 벗어나 경쟁자로서 백경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 노릇을 어찌한다.” 아우들의 한숨소리를 듣던 백경의 눈동자에서는 서서히 알 수 없는 섬광(閃光)이 비치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후궁들에게 총애하시며 비 자리를 주시는데 어머니에게는 왜 그리하지 못하셨는가? 그것이 백경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뿐인가. 이들 소생을 사랑하면서 왜 태자자리를 동생(배다른)에게 주지 않던가. 재위 삼십 삼년이 접어들어 왕은 몸져 자리에 누웠다. 쌍쌍이로 후궁들이 모여들어 울부짖고 했을 때 황제는 눈살을 찌푸리며 백경만 남고 모두 물러가라고 하니 마지못해 모두들 물러났다. 황제가 백경에게 다가오라는 듯 손짓했다. 태자가 가까이 다가가 그의 입 가까이에 입을 대니, “네가 이 아비가 죽을 때까지 정사를 전담해야 한다. 내가 내치(內治)에 힘쓰다보니 네 어미의 추숭(追崇)도 못했단다. 그러니 내치와 외치(外治)에 힘쓰되, 네 어미의 추숭도 힘써서 행하도록 하라.” 다음날 조회에 왕 대신 백경 태자가 정사를 담당하였다. 어미 가씨를 여느 빈궁처럼 ‘비’로 추숭하여 수비(修妃)로 봉하였다. 신료들의 반발은 없었다. 이윽고 한 해 동안은 순풍에 돛단 듯 백경의 정치는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태자가 차츰 정세를 안정시키고 할 때, 백경을 후사로 삼은 것이 안심이 된 천범은 그제야 안심하시라고 조언한 어의(御醫)의 말을 떠올렸다. 하지만 황제의 병세는 극도로 악화되어 삼십사 년 정월에 천범 황제는 편안히 눈 감은 채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를 모시던 후궁들은 머리를 풀어 헤치며 청승스런 곡소리를 해대었다. 상은 열다섯 날 동안 이어졌고 선왕 때 모시던 조정 대신들은 같은 자리를 연임하도록 하였다. 황제가 새로 섰다. 백경은 황제로서 첫 권한을 행사했다. 신료들에게 선왕대의 후비들은 어느 누구라도 태후에 앉을 수 없으며 그 슬하의 왕손들의 역모혐의가 있을 시에 즉시로 처형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신료들도 이에 합세한다면 그 즉시로 처형하되, 일족을 멸문하여 그 이상의 죄를 묻지 않겠노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신료들을 장악한 것이다. 그 뒤 인사도 단행되었다. 좌의정(左議政)에 황자 윤기, 우의정(右議政)에 황자 금운,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황자 명소,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황자 원모를 임명하였다. 생모 수비 가씨를 천화왕후(天花王后)로 추숭하였다. 아버지의 유언이기도 했고 숙원(宿願)이기도 했다. 황제는 두 눈을 뿌리고야 말았다. 왜 이토록 어머니를 그렇게 대접해야 할 수밖에 없었는가. 천경의 분노는 여기에서 시작돼 걷잡을 수 없는 피바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정월이 지나 사월에 접어드니 산천초목에 새로이 기지개를 켜듯 초록색 물결과 내음을 맘껏 뿜어 싱그러움을 자아내고 개나리, 진달래, 왕벚나무의 꽃이 한껏 제 아름다움을 뽐내듯 피어나니 왕이 친히 신료들에게 이르니, “내 나이는 이제 서른이나 아직도 왕비를 두지 못하였다. 나는 이에 경들에게 이르노니 경들 가운데 혼기가 가득 차거나 이미 시집을 갔다 온 여식이 있다하면 불러다 놓고 왕비의 자질을 시험하고자 하니 누가 나서서 추천하시오.” 그러나 그 누구 하나 적극 나서는 대신이 없었다. 허나 왕 앞에 늙은 대신 하나가 무릎을 꿇으며 금상에게 고하기를, “폐하의 눈에 들지 못하겠으나, 아직 시집을 가지 못한 여식 하나 있사옵니다. 하오나 나이가 스물이 채 아니 된데다 몸집이 아담하여 왕손을 잉태하지 않을까 심히 저어되옵니다.” 대신 장자성이었다. “좋소! 내 경의 뜻을 흔쾌히 받아주겠소. 그 여식을 내게 데려다주시오!” 왕이 허락하니 장자성이 다음날에 딸을 왕 앞에 데려오니 미색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마음가짐이 마치 고운 비단결과 같이 보이니 왕의 승은을 입고도 남음이 있었으리라. 하여 왕은 그녀를 궐에 살게 한 뒤 이튿날로 왕후로 책봉하였다. 이이가 바로 덕공왕후(德恭王后)다. 덕공왕후가 보위에 인사한 뒤 옆자리에 앉자 왕이 말하길, “내 자네 생전에 만큼은 후궁 하나를 두지 않을 걸세. 그러니 내 자네를 푸대접을 않겠네.” 맹세한다. 왕비는 그예 기쁨의 눈물이 솟았다. 황제의 맹세에 왕후는 기쁜 마음으로 정중히 큰절을 올렸다. 훗날 왕비에 대해 사가는 평가한다. ―왕비는 황상에게 지고지순하고 만백성에게는 희로애락을 나누실 정도로 정이 많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재위 2년 4월 초닷샛날에 역모가 발생했다. 인비의 시중을 들던 나인 중 하나가 조정에서 일하던 오라버니와 금상을 폐하여 새로 왕위에 오르도록 인비 소생의 황자를 부추기는 일을 저질렀다. 이것이 왕의 귀에 들어가니, 지난날 형제가 이야기한 것을 가슴에 새겼기에 그 분노는 매우 컸다. “저런 고얀 것들이 있나.” 상의 분노가 온 정전을 울리고 그 즉시로 궐 안에 기거하던 선왕의 후궁인 인비, 의비, 예비가 있으면 모두 끌어다 폐하도록 하여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이틀 뒤에 유배 명령을 내리고 후궁의 소생들을 색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집안 곳곳에서는 비명소리가 그득하니 나라 안이 어수선하였다. 이윽고 황자들이 잡혀가니 이들을 들면 이렇다. 인비의 소생으로 윤형(胤亨), 해원(海瑗), 기창(基昌), 서길(瑞吉)이 있고, 의비의 소생으로 송정(松亭), 승안(承安), 시경(時經), 우운(雨雲)이, 예비의 소생인 백림(白林), 석윤(錫潤)이 있었다. 이들은 즉시로 군기시 앞에서 죽임을 당하니 오직 살아남은 이라고는 문범(文範) 황자가 유일하다. 유배 간 선왕의 세 후궁의 공주들은 모두 옹주로 격하하여 이들을 유배가 있는 후궁들의 앞뒤 살림을 도맡아 하도록 하였다. 옹주로 격하된 이들은 이러하다. 인비의 공주인 정인(正仁), 문용(文用), 육철(六徹), 의비의 소생 공주로 공보(恭寶), 고람(孤藍), 윤진(胤珍), 명혜(明慧), 현율(賢律)이, 예비의 소생 공주인 우옹(牛翁)이 있다. 같은 달 말에 문범 황자를 대군으로 책봉하여 대행왕비 가씨의 양자로 입적했다. 이에 왕족들이 반발하였으나 강행하기에 이르렀다. 유월에 충훈부(忠勳府) 부원군(府院君)으로 봉하여 그 동안의 앙금을 풀어내었다. 정헌대부 이보고에게 군기시(軍器寺) 도제조(都提調)로 겸임하도록 명하였다. 새로이 내각을 다지고자 함이었다. 군기시는 병기(군사무기)를 만드는 기구로서 왕실의 우환을 외부에 표출하고자 함이 역력했으니 왕의 의중을 깨우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이후 천화왕후의 조카인 가재서(價載瑞)가 정헌대부에 봉해졌다. 이보고가 군기시에 업무를 맡으므로 국가의 대소사에 대행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자 함이었다. 2년 12월에 중궁이 회임하였다. 어의들이 친히 진맥하여 아뢰니 왕은 크게 기뻐하며 중궁에게 치하를 내리니 중궁이 화답하여 기뻐해마지 않았다. 윤기황자가 대군으로 책봉되었다. 지난날 문범황자를 대군으로 책봉한 전례에 따른 것이다. 어머니를 왕후로 추숭한 후에 가뜩이나 마음의 짐을 덜어야 했던 왕의 의지가 반영된 사례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병조판서에 임명토록 하며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왕은 병조가 국가의 병권을 중요시 하는 부서이니만큼 왕족들로 하여금 병권을 움켜쥐도록 독려하였다. 그 방편으로 금운황자를 비롯해 원모, 명소황자에게 대군으로 책봉한 뒤 각각 참판, 참의, 참지에 임명하여 병권을 확고히 하였다. 3년 정월 초엿샛날에 금상의 잠저에서 강운공주와 가재서가 혼례를 치렀다. 추운 날씨였고 날이 궂었음에도 사람들이 모여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왕의 우애가 돈독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비의 죽음이 전해졌다. 병환이 있어 배소에서 죽었던 까닭에 왕은 상을 조용히 치르도록 명했다. 이후 천화왕후의 묘소를 능으로 격상하여 ‘천화릉’이라 부르도록 했다. 인비의 상을 마친 뒤 문범대군과 장자성의 차녀가 혼례를 치렀다. 대궐 정전 앞뜰에서 치러진 결혼식이니만큼 왕도 친히 참석하니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정인옹주와 문용, 육철옹주에게 사면령을 내리게 하여 사가에 살도록 명하였다. 3년 4월에 정인옹주에게 장자성의 아들 장국(張國)에게 혼사하도록 했다. 장자성의 집에서 치른 혼사였다. 그 뒤 나라 안의 혼란함을 들어 중국사신인 호 모가 아들 호판성(好板成)을 거느리고 귀화하고자 하니 이에 승낙했다. 왕은 이에 그치지 않고 벼슬을 제수하고자 하였으나 호 모가 여독(餘毒)을 이기지 못해 병사함으로 호판성을 사복시(司僕寺) 제조(提調)로 명하였다. 과거가 시행되었다. 이번 과거에서 봉운무의 아들 봉용서(奉用瑞)가 과거에 급제하자 왕이 크게 치하해 마지않으니 그에게 사복시정(司僕寺正)에 명하여 문용옹주에게 배필로 주었다. 3년 유월에 병사한 육철옹주의 소식을 듣고 왕이 크게 오열하였다. 3년 가을에 세자가 태어났다. 훗날 후궁을 두지 않고 세자를 슬하에 두니 우환거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인비 소생의 공주들은 기록되지 않았다. “대광보국숭록대부가 하세하셨나이다.” 내관의 말에 상감은 근심에 젖었다. 갑작스레 전해진 변고가 전해져 후임을 물색하였다. 이에 물망에 오른 이가 온희구였다. 상감이 말하길, “전임 대부가 갑작스레 찾아온 병환인데다 노구의 몸으로서 나라의 대소사를 관장하고자 했으니 어이 말로 형언하리오.”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지 않고자 노력했음을 시사한 대목이었다. 그리하여 후임을 온희구로 정하고 보국숭록대부에 장자성을, 군기시 제조에 도국,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온희구의 장남 온하수, 전설사제조(典設司提調)에 온희구의 차남 온일흥이 임명되었다. 선임 대광보국숭록대부 길응의 아우이자 길돌의 아들인 길보에게 훈련원정(訓鍊院正)에 임명하도록 하였다. 그밖에 궁국의 장남 궁호보에게 훈련원 지사(知事)로, 훈련원 도정으로 궁국의 차남인 궁보조에게 맡겼다. 의흥위(義興衛)에 감무(甘武)를, 용양위(龍衛)에 어송(魚松)을, 호분위에 도위를, 충좌위에 동방의시, 충무위에 옥보를 임명하였다. 훗날 금상의 유일한 혈육을 지키는 굳건한 세력으로 미리 키운 셈이다. 재위 5년 봄에 황자의 뒤를 이어 공주를 낳았다. 공주의 탄생으로 왕실에는 우환이 되어버린 자손에 대한 염려가 가셔지게 되었다. 같은 해 여름 가재서가 일가붙이인 장사랑(將仕) 가운(賈運)을 양자로 입적하도록 허락을 구하니 황제가 흔쾌히 승낙하였다. 재위 7년 황자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왕이 갑작스레 전해진 비보에 원통함을 금치 못하였다. 이때 왕비가 자진하고자 했지만 궁녀들이 한사코 말리고자 하여 생명을 구하였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느냐. 하며 왕비의 아픔도 같이 나누었다. 재위 9년에 공주도 세상을 떠났다. 왕자에 이어 공주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니 왕실의 근심이 더해갔다. 의비와 예비 소생의 옹주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어쩌면 왕권이 강화되어 정적에 대한 위협에서 자유로웠으리라고 본다. ―이후의 기록을 더듬던 학자들은 일부 기록이 판독하기 어려운데다가 기록이 누락되는 부분이 있어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판독이 쉬운 시점이 재위 22년의 일이다. 이때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 잇따라 왕자와 공주를 여읜 채 상실감에 젖어 있던 왕과 왕후는 문범대군에게서 뜻밖의 제안을 듣게 된다. “소인에게 자식들이 많은데 제 자식들 중에 하나를 태자로 책봉하심이 어떠하신지요.” 대군의 슬하에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넷째까지 장성하고 그 아래로 나이가 어리지만 부인 장씨와의 금슬이 좋아 자식이 매우 많았다. 때문에 실의에 젖은 왕의 상심을 털어내고자 했다. “태자로 책봉하다니요?” 짐짓 모르는 체 하는 왕의 처지를 모를 리 없던 문범대군이 앞으로 나라의 후사를 든든하게 해야 함을 피력한 뒤 하루 속히 태자 책봉을 서두를 것을 주청했다. 왕이 심사숙고하여 재위 24년 문범대군의 장남 석윤군(釋允君)을 양자로 맞아 태자로 책봉되었다. 오랫동안 정사를 다스린 끝에 얻은 태평성세인 만큼 왕은 편안히 후사를 이을 수 있는 여력이 있었지만 이조차 없었다면 후궁을 따로 둘 수밖에 없었다. 재위 25년 태자의 배필로 가재서의 여식으로 맞이한 뒤 왕은 보위에서 물러나 상왕에 봉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신하들이 반대하니 이를 거두었다. 그러나 재위 27년에 왕의 병이 위중함을 내세워 의원으로 하여금 자신이 보위에 물러나게 하도록 천명하였다. 왕이 아픈 것을 눈으로 보던 신료들은 보위를 태자에게 물려주고 상왕에 올랐다. 이에 보위에 오른 석윤군은(아니 석윤태자는) 자신의 왕호를 영효라 하였으며, 이미 문제가(즉위 초반에 일어난 문제) 있었던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조참판(吏曹參判), 이조참의(吏曹參議) 세 사람을 유배 보내고 자신의 동생들인 윤성군(倫成君), 표선군(表善君), 구민군(丘民君)에게 이조판서, 이조참판, 이조참의에 제수하였다. 재위 2년 상왕의 동의를 얻어 문범대군의 소생들을 각각 왕자와 공주로 봉하고 문범대군을 대원군(大院君)에 봉했다. 그 부인의 지위를 부대부인(府大夫人)으로 높였다. 같은 해 상왕은 병이 들어 오랫동안 자리보전한 끝에 세상을 떠나니 태후가 통곡하기에 이르렀다. 재위 3년 문범대원군에게 콩 1만 석과 쌀 4만 석을 하사하였다. 재위 5년 문범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는 정도가 지나치다는 신하들의 간청이 있기에 왕은 마지못해 모든 관직에 관여하지 않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대원군이 순순히 승낙하니 생모의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재위 6년 생부가 되는 문범대원군이 병이 들어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에 왕은 같은 형제의 뒷바라지를 맡을 것을 천명하여 이를 실행하였다. 재위 7년 윤기대군이 하세하니 슬하에 자식이 없기에 천표공주(天表公主), 인주공주(仁州公主), 그리고 구민군에게 양자로 입적토록 하였다. 뒤이어 명소대군과 원모대군이 연이어 하세한 이후 왕은 명소에게 금지군(金枝君), 홍운공주(紅雲公主), 인태군(仁泰君)을, 원모에게 창은공주(昌恩公主), 오현군(五絃君), 천영군(天英君)을 양자로 입적하도록 하였다. 재위 9년 중궁에게 후사가 없자 왕이 근심하였는데 신료들의 연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기생들을 불러다 춤을 선보이도록 했다. 이때 자색이 뛰어난 기녀 하나에게 반하여 귀히 여기니 불러다 빈(嬪)으로 책봉하였다. 이때 왕후가 근심하여 오라비에게 매달리니, “오라버니, 일전에 귀히 여기던 기녀 계월향(桂月香)이란 아이가 있소이다. 한데 그 아이를 대궐에 불러내어 후궁으로 삼았습니다. 내가 왕자를 잉태하지 못한 까닭이 있었기에 그리 된 줄을 알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라버니 가운이 망설임 없이, “이는 투기이옵니다. 임금이 후궁을 두는 것이 이 나라의,” 직언했으나, “오라버니,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내게 상의할 것도 없이 일방적으로 후궁을 불러들이다니요. 그것도 일개 기생을요. 생각사록 치가 떨립니다.” “그래도,” “예, 압니다. 알아요. 하나 더는 참기 어렵습니다.” 왕후의 안중에도 아랑곳없이 왕은 후궁을 불러들였다. 왕후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던 계월향은 누구일까. 그는 일개 향리(鄕吏) 찰방(察訪)의 여식의 여식으로 태어났으나 열하나에 부모를 모두 여의어 천애고아가 된 뒤 스스로 기방에 들어가 기생이 된 사람이었다. 본시 자색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능했으며 세상의 이치 또한 통달하니 왕의 신임이 더욱 돈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구나 중궁은 그녀에 비해 다소 뒤쳐진 면이 없지 않았으나 도성 장안에 이름을 날린 기생이었던 만큼 중궁의 근심은 나날이 깊어가고 만에 하나 후사를 얻게 되는 날이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울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하여 걱정이 이만저만 아닌 것이다. 중궁을 뵙고 난 가운은 궐에서 나와 제 아랫것에게 은밀히 불러다 계월화의 뒷조사를 하도록 했다. 뒤에 계월화에 대한 정보가 밝혀지는데 본래 성이 ‘계(桂)’라는 성씨였고 ‘월화’는 기명이었으니 찰방 벼슬을 한 부친을 여의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에 가운이 중궁에 고하니 한 고비는 넘겼다며 왕후는 안심하였다. 재위 10년 윤사월에 왕은 빈으로 책봉하여 혜빈(惠嬪)으로 봉하였다. 같은 해 시월에 아들을 낳으니 왕비는 낙담하여 바깥출입을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왕비는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사사건건 정사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혜빈 계씨가 아들을 생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왕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중궁전(中宮殿)의 자리에 앉았다고는 하지만 태자를 생산하지 않은 자신의 자리에 만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영락없이 폐위될 것을 두려워한 까닭이었다. 혜빈이 상감의 승은을 한 몸에 받을 것은 보지 않아도 환한 일이었다. 자신의 방 안에서 가운은 고뇌를 안 할 수 없었다. ‘대감,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부인 또한 걱정이 태산 같았기 때문이다. 왕비도 왕비지만 그 외척이 되는 자신도 못지않게 위협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깊은 밤 어두운 방 안에서 가운의 심사는 어지럽기만 할 따름이었다. 결단이 필요하다. 자신이 무기력함을 보이면 상대방이 약점을 틀어쥐어 위협하기 때문이다. 양아버지인 가재서는 이 얘기를 듣고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눈치였으나 세상의 물정을 모르는 아버지를 대하노라면 가슴이 답답하기 때문이다. 언제 어떻게 망할지 모르는 것이 권력이다. 그걸 알기에 가운의 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막(暗幕)으로 드리워진다. 재위 12년 가운을 내수사전화(內需司典貨)에 임명하고, 그 아비인 가재서를 좌참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도 잠시. 가재서에게 좌참찬보다 높은 영의정을 맡도록 특별히 명하니 가재서가 그 내막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왕이 말하길 “전임 영의정이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 후임을 찾고자 했으나 마땅한 사람이 없어 가재서에게 맡긴 것이다.” 이후 왕이 한술 더 떠 왕비의 아버지라는 미명 아래에 부국부원군(富國府院君)으로 봉하였다. 왕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혜빈이 낳은 태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태자가 세상을 떠나자 왕이 곡하여 슬퍼하며 그 진상을 알아오도록 명하였다. 그러자 범인이 나타났으니 그 범인이 복면(覆面)을 쓰고 있어 벗겼다. 이에 왕은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가씨 집안에서 부리던 하인인 것이다. “소인은 왕후마마의 사주를 받아 태자를 독살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자복(自服)하고 혀를 깨물어 죽으니 왕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이 소식을 들은 가재서는 왕의 진노에 놀라 어전 앞에서 죄를 시인하니 왕은 이를 너그러이 용서하였다. 한편 계씨는 “나 혼자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이냐.” 하며 참척의 아픔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슬픔은 깊고도 깊었다. 재위 13년 정월에 중궁이 회임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나흘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왕비가 분노하야 상궁은 물론, 궁녀들을 무자비하게 학대하니 왕이 분노하여 왕비를 찾아가 손찌검을 하였다. 그러면서 계씨가 독살한 것이 아니냐며 학을 떼었다. 왕비는 실성한 것이다. 가씨가 폐위되어야 마땅함을 비친 왕의 말을 듣고 신하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왕비의 폐위는 안 된다며 극력 거부를 하였으나 왕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이를 지키다 못한 가운이 나서기를, “폐하, 누이를 폐위하시옵소서.” 왕이 이를 듣고 눈물이 피어올랐다. “어째서요.” 왕비를 버리지 못하는 번민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가운이 왕의 의중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직언을 하니 말로 형언하기 힘든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제 누이가 어의들조차 치료하기 어려운 병에 걸렸으니 신의 마음을 일러 말해 무엇 하나이까. 차라리 폐위시키는 것이 폐하의 마음으로나 신들의 마음으로나 편할 것이옵니다.” “만에 하나 장인이 반대를 한다면 어찌하겠소.” 불안에 찬 왕의 눈을 보며 “신의 아비가 반대한다면 제 아비를 죽여서라도 집안과 왕실을 지킬 것이옵니다.” 왕은 그제야 끄덕이고 왕비의 폐위를 윤허하였다. 그러자 신하들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왕비의 폐위를 거두어달라며 연신 주청하였으나 왕의 결심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이틀 뒤에 가씨는 왕을 겁박하여 정사를 간여할 뿐만 아니라 후궁을 투기했음을 들어 폐출되어 쫓겨났다. 이를 듣고 가재서가 진노하여 아들을 불러다 호통을 치며 극력(極力)으로 막았으나 아들은 처자식을 데리고 가출하여 새로 일가를 만드니 이로 인해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끊고야 말았다. 권력은 가재서와 가운 두 갈래로 갈라지고 말았다. 기존에 조정에 몸 담근 사람들은 가재서의 편에 섰다. 이때 가운에게 힘을 실어줄 사람이 없었다. 불리한 상황이었다. 생각 끝에 혜빈 계씨를 찾아가 자신에게 힘을 보태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혜빈이 흔쾌히 응하여 자신의 아버지가 생전에 계시지 않으나 자신의 아우가 있음을 들어 벼슬을 주선하도록 하였다. 이윽고 가운은 자신의 집에서 계씨의 아우를 불러들이니 이름은 운관(雲觀)이었다. 계운관은 한미한 집안이었고 벼슬을 근처에 얼씬하지 못한 것에 대해 큰 불만을 품었다. 만에 하나 일이 성사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가운에게 그나마 다행이 있다면 계운관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雲集)해있단 사실이다. 이들도 다 같이 운관처럼 조정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초반에 나라를 이끈 벼슬아치들은 모두 자신들의 인맥으로 조정의 모든 요직들을 장악하였다. 때문에 왕은 모두 이들의 손아귀에서 허수아비 신세를 면치 못하는 형국이었다. 같은 해 삼월 중순. 야심한 밤에 계운관이 자신의 휘하에 거느리는 사병들을 이끌고 가운의 집에 행차하였다. 가운에게 찾아간 계운관이 직접 나서서 말하길, “나리, 나리의 명만 따르겠습니다. 제게는 사병이 많으니 과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운의 말 한마디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이때 가운은 끄덕이며 “그리하시게.” 대답했다. 이에 운관이 가운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안심하고는 가운의 집 밖으로 나왔으니 사병들은 길을 가득 찰 정도로 매우 많아 수를 헤아리기 힘들 지경이었다. 횃불은 온통 어두운 거리를 밝히다 못해 천지를 개벽할 정도였다. “역적 가재서와 그 일당들을 처단하라!” 운관이 외친 말에 따라 사병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 안에 가운은 어두운 방 안에서 통회(痛悔)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제 아버지를 죽이는 패륜을 말이다. 이윽고 대궐에 들이닥친 사병들은 샅샅이 뒤져 왕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왕은 난데없이 들이닥친 반란군 때문에 몸서리를 치며 떨어야 했다. 궁녀들의 비명소리와 반란군 군사들의 함성소리가 뒤죽박죽이 된 대궐은 온통 횃불이 비추고 있었다. 중궁전이 문을 닫고 있는 지금에 이르러 왕은 폐비의 안부가 궁금하였다. 이 와중에 폐비가 고생을 하고 있을까. 반란군에게 해를 입지나 않았을까. 그때였다. “폐하, 신 계운관. 폐하를 구하고자 이 자리에 왔나이다.” 왕에게 나와 알현을 청한 운관을 보고 두려워할 뿐이었다. “어, 어째서 처남이 이 자리에 왔나?” “신, 폐하를 해하려 하지 않사옵니다. 하오나.” 왕은 거품이 섞인 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말을 기다린다. “폐하를 뫼시고 전화 대감 댁에 피신하셔야 할 줄로 아옵니다.” 그때였다. 왕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운관은 군사를 시켜 왕을 업고는 서둘러 대궐을 빠져나갔다. 대궐에 빠져나오면서 계운관은 사병들을 두 패로 나누어 놓고 한 패에게 왕을 호위하여 가운의 집에까지 가도록 하고 다른 패들은 구세력을 제거하는 데에 일하도록 명하였다. 운관이 이윽고 제 품에 무엇인가를 꺼내들었으니 바로 살생부였다. 살생부를 움켜쥔 운관은 인편으로 보내 모든 조정대신들에게 왕명을 구실삼아 대궐에 부르도록 하였다. 그러더니 조정대신들이 하나하나 들어올 때마다 모두 죽이기에 이르렀다. 어떤 이들은 호통을 치고, 어떤 이들은 살려달라며 애걸복걸하였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시체는 쌓일 대로 쌓이고 피는 강을 이루기 직전이었다. 그때였다. 마지막으로 가재서가 들어서자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재서를 철퇴로 때려죽이니 세상은 다시 바뀌었다. 구월에 이르러 폐비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어 사사(賜死)하였다. 십일월이 되었다. 가운이 자신의 집에 계운관을 불러 이르길, “혜빈도 폐출하여 사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자 운관이 반발하여 누이를 왜 죽여야 하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다. “혜빈이 죽은 폐비가 투기를 하도록 하는 빌미요, 또한 이에 대한 앙갚음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미연에 방지하고자 함이오.” 가운의 설득에 의해 계운관은 제 피붙이를 끊어야 한다는 압박에 못 이겨 왕에게 혜빈도 폐하기를 간하니 왕이 역시 한사코 반대하고 말았다. 그러나 가운의 명에 의한 것이라고 하자 왕이 이를 거스를 수 없어 혜빈도 폐비의 전례에 따라 내쫓아 사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슴 아프기는 계운관도 마찬가지였다. 가운과 계운관은 정국공신(靖國功臣)의 자리에 올랐고 가운을 영의정에, 계운관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왕족들도 죽고, 조정대신들도 죽었다. 대신 조정에 몸을 담근 당사자들만을 죽였을 뿐이다. 이에 왕은 후사를 염려하기도 했으나 실권을 움켜쥔 가운이 인태군의 차남을 양자로 입적하여 태자로 삼도록 하고 계운관의 여식을 태자비로 맞아들이도록 청하였다. 왕은 이제 힘없고 허수아비 임금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도록 하니 훗날 장담황제(長潭皇帝)라고 불리는 이다.
―덕호 영감이 건네 준 책은 일부가 파손되어 읽기가 어렵다. 많은 학자들에게 수수께끼였다. 이는 보편적인 역사에 대한 도전이자 기존의 사관(史觀)을 뒤엎는 것이었으니 무모한 모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덕호 영감이 준 수수께끼 같은 역사책은 새로운 세계관을 터주는 것 이외에 아무런 의의를 남겨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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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보덕소설집(寶德小說輯) 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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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시에게 
제112차 소과 생진시 방목 
교육등록 제5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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