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조선왕조

ㆍ작성자	박준혁
ㆍ작성일	개국634(2025)년 10월 16일 (목) 23:25 [자시(子時):삼경(三更)]
ㆍ문서분류	문집
ㆍ설명	행전라도검률 박준혁의 주기(週記)
ㆍ저작	박준혁

ㆍ추천: 0 ㆍ열람: 57

내아행기(內衙幸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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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주(週). 일기(日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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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립>

아직은 풍성한 봄꽃이 있어서,
신나서 내려온 몸이 노곤해서.

부임을 알리고 내아로 향하던 길,
잠시만, 잠시만, 말 위에서 졸았더니.

툭하고 떨어졌을

나의 꽃,
전주 땅 그 어느 곳에 두고 왔는가.

너 없어 떳떳하지가 못하고,
너 보고 싶어 잠 못 이루고.

내아에 모셔둔 갓집 하나,
비어 있는 네 자리만 바라보며.

봄꽃 서러워지는 시간 앞에서,
나도 같이 서러워하노라.

"감영에 부임 인사를 붙이고 난 뒤, 관리단의 착오로 지방관 아이콘이
사라졌습니다. 고작 며칠의 시간이겠지만, 꽃을 잃은 전 서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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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전>

경기전에 참배했다.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雜人毋得入).

'신분 고하를 떠나 하마하라.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

참배하는 내내 하마비의 문구가 댕댕 울렸다. 잡인무득입이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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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인>

종이를 펼치고 한손으로 굴려대다가,

인주를 고루 묻히더니 권력을 눌러 찍었다.

관속 지원을 결재합니다.

영리청에 참알을 남겨 놓으시길 바랍니다.

아아- 어제 업무 분장했는데.

... 적어도 불평할 땐 웃지 말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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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아>

거의 아니 쓰다시피 한 내아기도 하고,

뭔가 임지의 건물을 두루 쓰는 것 같기도 하고.

하루에 한 번씩 뭐라도 써 보는 게 좋을 것 같긴 하니,

내아라는 명패를 들이밀고 사설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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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마실>

나라의 대사구(大司寇)가 세워졌으니,
나는 부랴부랴 전령을 불러 원고에게 보낸다.

'이제부터라도 발 빠른 송사를 진행하고자 하니,
혹여라도 있을 노여움을 푸시고 협조하여 주시면..'

관속의 업무 분장은 어제 끝났으니,
나는 부랴부랴 도장을 찍고 방을 붙여 지시한다.

'최근 몇 년간의 모내기 사업 사례를 조사하신 후,
5월에 진행할 모내기 사업을 각 지역에 맞게 기획하여..'

내아 뒤편 산동산으로 마실을 나가본다.

벚꽃을 밟고 밤하늘을 바라보며,
어렸을 적 노랫말을 흥얼거려나 보는 것이다.

짜라빠빠 저 하늘 별들처럼 짜짜라 짜라빠빠빠
짜라빠빠 영원히 변치 말자 짜짜라 짜라빠빠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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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부임하고서 계속 슬금슬금 욕심이 들어선다.

좌수영에, 통제영에, 삼척진에, 병마영에.

사람 인기척 단 한번 없었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강원감영 관풍각을 기웃 기웃거리면서

글 썼다 지우기도 벌써 여러 번이다.

써보려 해도 뭘 써봐야 할지 고민에 고민이고,

결국 혹시 모른다며 한숨짓고 떠나오는 것이니,

아무래도 나는 나만의 내아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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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전립을 쓰게 된 지가 벌써 1주일이다.

거창한 말 필요 없지 않을까.

오로지 나중 삼가기를 처음과 같이 하여

성은 유념함을 날마다 새롭게 하고,

애민에 부족함 없이 하려고 할 뿐이다.

다만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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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주(週). 주기(週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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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원래는 어제 개정하려 했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늦었고 했어서.

그냥 깔끔하게 1주일을 다 채우곤

오늘, 것도 상쾌하게 아침에나 해볼까.

모내기도, 관보도, 재판도.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은 다르지 않으니

그것이야말로 내 행복의 반증이겠다, 또 홀로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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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 주(週). 주기(週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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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일>

오히려 실감 나지 않는다. 3주씩이나 지나갔다는 게.

하고 싶었던 것들이 많았고, 하려고 했던 것들도 많았는데,

정작 무엇하나 제대로 마무리해 끝낸 것이 없어서.

세월이 약이야, 세월이 약이야.

스스로에게 계속 되뇌게만 둘 수가 없어서.

활자에는 하루를 갈아 넣고,

기사에는 보름을 갈아 넣고.

재판에는 한 달을 갈아 넣고,

업무 분담에는 임기를 갈아 넣으면서,

재차 계획하기를 나라 다스리는 임금의 악착으로 한다.

..

요즘엔 날씨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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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째 주(週). 주기(週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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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그만치 휘날리던 봄꽃 밟으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왔다,

너를 만나러 내려왔다.

달력의 장을 통째로 넘겨서

꽃은 졌고 새 잎은 돋았다.

그대가 변했는지 알 방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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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번째 주(週). 주기(週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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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하고 몇 분>

폭우 속 누군가를 뚫어 태우다가
어느 사내를 만났다, 분명히 만났다.

마주 보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데
찰나에 품었던 적의마저 부서져 물방울이 되었다.

꾸준히 신경 쓰고 증오하기가 힘들어
그만 놓아 주었고, 이만 사라졌다.

뛰기를 멈췄을 때야 비로소 온몸이 아파왔다.
하루 종일 앓아누워서, 이리 늦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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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 번째 주(週). 주기(週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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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주>

한 달하고도 반이 지났다는데

이럴 리가 없는 것이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내 그동안 뭘 해왔는지,

관보로써 되새겨나 봐볼까.

아아, 이 문장이 나는 너무나도 좋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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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 번째 주(週). 주기(週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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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주>

오늘을 살 땐 내일을 기대하고

내일을 살 땐 내일모레를 기대하고

내일모레를 살 땐 주말을 기대하며 살다 보니

이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그런 숫자에까지 이르러 버렸다.

야밤에 홀로 달력을 넘기며, 읊조리는 버릇을 키웠으니

'..성은 유념함을 날마다 새롭게 하고요..'

'..재차 계획하기를 나라 다스리는 임금의 악착으로 한다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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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홉 번째 주(週). 주기(週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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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주하고 이틀>

2주 정도의 기록이 끊겼다.

매주 금요일마다 꾸준히 기록했었는데,

생각보다도 더 체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1주간은 일기로서, 그다음부터는 주기로서

이어온 내아의 명맥이, 한성으로 첫 장계를 올려보내고

하삼도 여기저기 누비면서 사람이나 구경하다가

생각보다는 조금 더 그럴싸하게 끊겨버린 것이다.

오늘도 호조와 공조에 공문 보내는 삶을 살고 있으매,

요즘은 밀양 아리랑 행진곡 / 서곡 / 합주곡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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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한 번째 주(週). 주기(週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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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주하고 사흘>

바깥 비는 쏟아지고 부서져서

글자와 사람 속에 차곡히도 스미는데

달아오르는 정신은 아련하기만 하다.

하염없는 감상에 홀딱 젖어있자니,

언젠가 이 내아에 그런 소리를 늘어놓은 적 있었다.

뒷동산 야밤에 별이나 보면서,

어렸을 적 노랫말을 흥얼거려 본다고.

'저 하늘 별들처럼.. 영원히 변치말자..'

그런 각오를 되새기던 그때의 내가

문득 그리워지는 장마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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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두 번째 주(週). 주기(週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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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날 넘기기가 안타까워

점점 어긋난 것을 바로잡으려 드는데,

비 내리는 장마철이라 자허했더니

요 근래에는 먹구름을 통 보지 못했다.

오히려 묵은 구름 걷어내고 대지를 뎁힌다.

'하늘이 변덕스러운데, 한낱 미물 주제에.

어찌 그 천기를 당해낼 수야 있겠습니까.'

그리 위안 삼을 수야 있겠나.

지역 기관 현황을 갱신할 수 있는 것도,

전라관보 발행 연기에 대하여 공고할 수 있는 것도,

관속 수당에 대한 의견을 공문으로 부칠 수 있는 것도.

그 어느 성덕(聖德)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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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세 번째 주(週). 주기(週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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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주하고 사흘>

이제는 슬슬 고질병이라 부를 수 있겠다.

'13주'라는 활자가 아른거리는데

한여름 밤 꿈으로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공문은 오고, 공문은 가고.

아니 와야 할 공문이 와서

필히 가야 할 공문도 가고.

한낮의 허공으로 솟구치는

그 시대 잊지 못할텐데.

햇빛에 웅덩이 날아가 버리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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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네 번째 주(週). 주기(週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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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주하고 사흘>

확실한 고질병이다.

심지어는 사흘에 갇힌 것 같기도 하다.

뭐 기록이란 것에 서론이 없으니,

이제는 재판의 달인이 되어 버릴 것만 같다.

몇 주 전쯤이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새삼스레,

세월호 사건에 다시 한번 분노해 봤었는데.

아무래도 예지몽 비슷한 그런 거였나 보다.

세월호의 재판을 다시 재개하려 하는데

재판관에 관한 의지를 물어보는 간찰이 왔었다.

쏟아지는 장마에 몇 주째 하늘 눈치만 살피던 나는.

다음 날 새벽에 어전 계본이 올라갔고,

점심때쯤 재가되었으며,

3시엔 공문이 날아왔고,

4시엔 전국팔도에 방문이 붙었다.

7년 동안 송사 하나가 없다가

내 임기 안에 두건이나 생겨서는

둘 다 내가 재판관을 맡게 되다니.

보통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저 그 운수 자체가 너무나 귀하고 재밌어서

내아 밖으로 뛰쳐나가 큰 소리로 와하하 웃어본다.

우렁찬 폭우 천둥 소리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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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다섯 번째 주(週). 주기(週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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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주하고 하루>

장족의 발전이다. 기쁘다.

그래도 하루가 늦었잖냐고 꾸짖는다면

모든 전자기기가 방전되는 바람에

산청에서 나름의 뿌듯한 변명거리를 벌었다.

곤하다.

허나 기쁘다.

임기의 끝이 보여와도 내 수중에는 일거리가 태산이다.

국선 변호인 선임에 애를 먹고,

금성산에서 축문을 읽어내리고,

두달 치의 관보를 준비하는 나는

곤하다.

허나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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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여섯 번째 주(週). 주기(週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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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주>

뭐라 할까. 쓰다.

씁쓸하다기보다 쓴 것이다.

2달 만에 제대로 써보는데

뭐 2달이 대수일까.

봄꽃 휘날리며 내려왔던

내 4달이 날아가 버렸다.

뭐라 할까. 쓰다.

씁쓸하다기보다 쓴 것이다.

한낮의 허공으로 솟구치는

그 시대 잊지 못할텐데.

민사와 형사, 모내기와 낙동강,

명산대천제와 관보 날아가 버리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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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주(週). 주기(週記)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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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아와 전립>

어떡하냐.

시대(時代)가 진짜 끝나버렸네.

내일부턴 너희들, 더 이상 못 보게 되겠다.

그래도 4달을 함께했으면 우리 참 행복했다 그치?

너흰 언제나 내 자부심이었어.

개국634년 8월 9일,
행전라도검률 박준혁 남김.

http://www.1392.org/bbs?books: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