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조선왕조

ㆍ작성자	박준혁
ㆍ작성일	개국634(2025)년 3월 15일 (토) 18:59 [유시(酉時)]
ㆍ문서분류	문학
ㆍ설명	조선문학회 연재소설인 풍전등화의 개정판.
ㆍ저작	박준혁

ㆍ추천: 0 ㆍ열람: 22

풍전등화(風前燈火) 개정판

대지는 솟아올랐고 하늘은 우렛소리에 갈리곤 흩뿌려지듯이 쏟아졌다.
포탄은 날아들지 못하는 곳이 없었다. 불과 백 년 전 고쳐 쌓은 견고한
성곽은 굉음에 터지고 깨지며 뿌연 돌먼지를 죽기에 뿜었다.
천지가 뒤틀리는 굉음에 군졸들의 상투가 울렸고 눈으로 보이는 모든
땅에 포탄이 쏟아져 폭발하는데 지신(地神)이 놀라 뛰쳤다가 다시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어서 눈으로는 보이는 게 적었고 귀로는 들리는 게 없었다.

곧 내리는 장맛비 대신 왔다는 것이 따갑고 때 묻힌 흙무더기라 어영청
(御營廳)의 푸른 청전복(靑戰服)이고 훈련도감(訓鍊都監)의 누런 호의
(號衣)고 터지는 먹물을 막을 수 없어 이내 전부 꺼메지게 되어버렸다.
강화 앞바다의 갈매기들이 물고기를 향해 절도 있게, 재빠르게 바닷물로
뛰어드는 것. 적괴의 포탄은 단단한 부리의 갈매기 같았고 광성진(廣城鎭)은
요동쳐 솟구치는 바닷물 같았다. 강화 어부들은 나라의 앞날을 한평생
태평하게 바라보고 있었으니, 어제의 자연이 곧 오늘의 재앙이라는 모순을
선비들은 아찔한 마음에 차마 받아들이지 못했고,
이는 어부고 양반이고 임금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 바닷물이 요동쳐 치솟아 죽거나 기절한 물고기들이
파닥파닥 튕겨 날아갔다. 매캐하게 성첩(城堞)을 휘감아 돌던
하얀 화약 가루가 부서져 쏟아 내리는 물방울에 끓어오르다
무섭도록 빠르고 곧은 대포알 두 방을 꽝꽝 맞더니 성벽 안에서
터져 나온 흙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져 내렸다.

허공의 구렁텅이를 급박하게 뚫어 뛰던 군졸(軍卒)들 중 맨 뒤에
하나는 흘러내리는 흙과 화약 가루에 짓이겨져 사라졌고,
그 위로 다시 화약 가루가 내렸다. 광성진의 형세로 보아 뒤로는
산천의 대모산(大母山)에서 지키는 이 없던 봉수대가 화포를 쏘고,
앞으로는 절벽 너머 손돌목(孫乭項)의 양이선에서도 구름이
터지는데 앞뒤가 막히고 포탄이 날아드는 것이 자리부터가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흉벽(胸壁)이 산산이 깨지고 외벽(外壁)도 흙먼지와 함께 무너져
내려서 광성진은 무서운 속도로 석성(石城)보단 토산(土山)의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었는데, 여기저기에 흙이 쏟아지고 비로소
이따금 잠시 시야가 걷히면 돌먼지 엉켜 내려앉는 도랑에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 더럽혀진 군복 입고 있는 시체들이 수북이
늘어가고 늘어갔다. 병사들은 뜨거운 열기와 어서 여기저기
내달리지 않으면 몸이 터지고 날아가는 혼돈 속에서 제각기
새까매진 동다리(同多里)와 면제배갑(綿製背甲)을 벗어던졌고
대총(隊摠)들은 생사를 직면하고 있는 병졸(兵卒)들의 흔들리는
눈동자에 대고 차마 무어라 꾸짖을 수 없었다.

『불랑기(佛郞機)를 가지고 오너라』,『방포(放砲)하라』,
『속히 장전하라』 따위의 말을 악쓰며 내뱉는 초관(哨官)의
눈에는 흙이 원수랴 피로 물들어 그 모습이 마치 고통과 시름
중인 야차(夜叉)와도 같았고, 성벽 위에서 애절하게 손 떨며
불랑기포 쏘아대던 포수들은 이내 포탄을 맞아 군복이 찢기고
살이 찢겨 죽기에 피를 뿌려대었다.

갈매기가 태평하게 첨벙 내리꽂으면 뛰쳐 오르는 물결에
전립(戰笠)이 있었고 사람 팔이 있었다. 무너지는 돌들 사이로
말려 들어간 군졸이나 구하려 뛰쳐들어간 기패관(旗牌官)이나
화약 가루가 걷히자 터진 피로 꽃을 피웠다.

흙이 휘몰아쳐 만들어낸 소용돌이와 화포의 화염(火焰)이 뒤섞여
공기의 혼탁함에 숨이 막혀 죽을 모양새였는데 그 속 돌먼지 어딘가
에서 위로 쏟아지는 흙을 맞으며, 군졸들은 연신 캑캑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총탄을 재고 화약을 총안에 내리꽂아 장전했다.
곧이어 총구가 뒤틀려 버렸다.

중군(中軍)은 포격이 시작되자 등편(藤鞭)을 힘주어 쥐고선
비장들과 함께 문루(門樓)서 박차고 나왔다. 미끄러지듯 돈대
(墩臺)를 돌며 근엄하게 불랑기와 홍이포(紅夷砲)의 방사를
윽박질렀는데 살생부가 낭자한 돌무더기 속에서 중군은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를 바짝 따르던 훈련도감 기총(旗總)은
홍이포를 돌리다 가슴팍으로 날아든 총탄에 혼절하여 굴러
떨어졌고, 함께 포를 돌리던 금위영 포수들은 멈칫 놀라 하던
짓을 멈추고 적진 향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굉음을 뿜어냈다.

천지가 뒤바뀌는 고통에 갑주 후들리던 중군은 군졸 하나가
저 대신 피격당해 피 토하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다 머리 위로
토사(土沙)가 쏟아짐을 느끼곤 이내 다시 서둘러 방포하라며
좌우(左右)에 호통쳤다. 홍이포는 짙은 먹구름을 터뜨렸고
속세(俗世) 걷힌 중군의 새까만 뺨에 뜨거운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포탄을 나르는 비장들도 바삐 뛰는 다리 아래로
뚝 뚝 뚝 뚝, 끊임없는 눈물을 흘렸다.

외벽에 쏟아지는 탄환은 마치 거꾸로 내리꽂히는 여름비
같았는데 땅에 튕기는 물방울들이 깨진 돌덩이라는 것만이
유일한 차이점이라 병사들은 수평선 따라 평온히 흐르는
양이(洋夷)의 어두운 비구름을 두려워했다.

총안 너머로 보이는 이양선은 넘실대는 파도 위에 탐스럽게도
번들거리며 제 자리를 고수했는데, 조선군들이 쏜 포탄들이
마치 다른 세상의 무의미한 잡음같이 갑판에 한참 못 미치는
여울에서 두둥, 두둥, 파도의 북을 쳐댔다.

북을 치는 건 조선군의 쇠구슬뿐만이 아니었다. 그 전날
새벽에 보이지도 않는 해협 바위를 타고 타고 넘어 방심하고
있던 덕진진을 야습한 수어청(守禦廳) 소속 별파진(別破陣)들이
문루에서 사력을 다해 북을 때려 독전고(督戰鼓)를 울리고
있었으나 대지를 뛰쳐 오르게 하는 굉음에 북채를 잡고 있던
자조차 그 '싸움을 독려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흙이
치솟아 오르고 외벽의 터진 돌덩이들이 어지러이 떨어져
내리는 건 멈춘 적 없었으니 광성진은 이미 터져나가는 잔혹과
병사들이 울부짖는 아우성으로 가득 찬 지 오래였다.

중군 떠난 문루에 나무 튀기며 박히는 총탄 좌우로 다급히
펄럭이는 푸른 철릭 자락들의 출렁이는 물결이 '안해루(按海樓)'
큼지막하게 눌러쓴 명필의 현판, ‘바다를 누르는 글자’ 아래
정신없이 요동쳤다. 거꾸로 쏟아지는 여름비를 피해 여장으로
몸을 내던진 별파진들은 온 군데가 헤져 엉망이 된 갓을 벗으려
갓끈에 의지 뻗다 팔방으로 발작해 대는 다섯 손가락을 가슴 품에
쑤시곤 날뛰는 마음 추스르려 애썼다. 문루 근처에 떨어지는
포탄 소리, 쏟아지는 흙더미 소리를 맞으며 검은자까지 발광했으리라.
문루가 오래 버틸 리 없었다.

싸움을 독려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갈매기 부리가 문루를
세차게 뚫어 꽂았고 놀라서 말 잃은 기왓장들이 출렁이다 이내
터지고 부서지고 깨져선 새파란 하늘에 불붙은 난초화를 그렸다.
망와가 푸른 재를 쏟으며 뒤틀린 구멍으로 쏟아졌고 중도리와
빗천장이 나무째로 찢겨선 검은 재 내뿜으며 저들의 화염을 키웠다.

문루 안이나 밖이나 부서져 죽는 전각의 시체를 온통
뒤집어쓰는 꼴인데 시체에 작은 눈알이 있는가 하면
찢긴 팔뚝도 있는지라 아래의 요동치는 파란 물결들
위로 첨벙첨벙 찍어 누르면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부서졌고
나무상자에 담긴 물의 양은 점점 줄어만 갔다.

손과 발, 눈동자와 정신이 발작하던 별파진들은 수어기와
북을 닥치는 대로 품에 끌어안고선 원성(元城) 뒤 계단에서
다 같이 굴렀다. 내동댕이쳐진 강화 땅 흙에선 눈물 나리만치
톡 쏘는 매운맛이 났고 모두가 검은 공허만을 보았다.

문루는 노란빛인지 빨간빛인지 검은빛인지 알 수 없는
산화의 연기 속에 위태하게 나앉아 푸른색 피를 사방에
쏟으며 죽어갔고 영화(榮華)의 청룡은 자신을 둘러싸는
불길을 말없이, 다만 온몸으로 느꼈다. 별파진들이 오열하고
오열하다 이내 하나둘씩 까무러쳐 버리자, 불씨와 혈흔의
붉은색은 사방에 퍼져있었다. 사람은 물론 대포가 찢겨
나뒹굴었고 조선군은 전력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둥- 둥- 둥- 별파진들이 문루에서 건져낸 북으로 중군의
아우가 적막(寂寞)을 두드려 깨웠다. 새빨간 팔뚝에서
피가 흘렀다. 고요함이 가루가 되고 연기가 되어 허공을
메운 돈대에서 위엄 뒤에 숨은 결의가 울리어 퍼졌다.

『일생(一生)의 목숨은 초로(草露)와 같고-』
중군의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이씨조선 오백 년 양양(洋洋)하도다-』
비장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쉭쉭 쉰 목소리였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병졸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경군(京軍)의 위엄을 드높이려
도성서부터 질리도록 불렀던 노래다. 풍전등화의 태평성대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슬픔이 반도에 흘러넘쳤다.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

『삼가 바라건대 적군을 물리치고
조국의 화려강산을 지키게 해 주소서』
군복(軍服)에 전립(戰笠) 차림인 중군이
향불 피워진 신주(神主) 앞에 엎드려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사당은 들어갈 때 보니
묘를 주축으로 삼아 앞으로 강이 훤히 보이게
숲을 등지고 있었는데 그 터가 꽤나 좋았다.

중군이 몸을 일으켜 곧 다시 절하려는데
순간 문이 열리더니 군교(軍校) 차림을 한
그의 아우가 들어와 중군과 나란히 엎드렸다.
실로 놀란 중군이 무어라 말할 겨를도 없이
옆의 향리(鄕吏)가 『배(拜)-』 하니, 두 군인은
정숙한 제(祭)를 올렸다. 앞뜰에서 고을 중들이
바라춤을 추기 시작하여 중군은 아우를 조용히 불렀다.

『어찌하여 병졸의 차림을 하고 예까지 이르렀느냐?
너는 허튼 생각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효(孝)를
다하도록 하라』 근처 산길에서 중군이 아우를 크게
다그쳤으나 아우가 돌아갈 기색 보이지 않으니 또 덧붙이길

『나는 지금 죽으러 가는 것이다. 나조차 강화 땅이라곤
병인년(丙寅年) 난리 때 딱 한 번 가 보았을뿐더러 그때
주둔했던 광성진 주변의 지리밖에 알지 못한다. 지금
묘당(廟堂)은 적이 강화산성(江華山城)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바, 광성진은 산성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고, 또 그 진영의 규모가 근방서 가장 크니 언뜻
보면 상책처럼 보인다. 허나 나는 병인년의 기억이 살아있다.
그곳 형세는 사방이 틀어 막히어 양이의 화력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이런 바탕에서 나는 내 부하들과 숨이 끊어질
때까지 항전하여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히매 저들의 내륙
진출을 저지하고자 할 뿐 애당초 싸움에서 이겨 돌아갈
생각이 없다. 네가 나와 함께 한다면 죽는 것은 물론이고
이길 수조차 없는 것이다』 중군은 몇 달 만에 본 아우에게
이런 말밖에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원망하였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생사는 하늘에 달려 있을진대 어찌 적이 두려워
나라 구하지 못하겠느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우는 진중한 목소리로
자신의 굳은 결의만을 곱씹고 있었다.

『형님의 부인께서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답답해하는 중군에게 무언가를 건네는데 상투를 틀 때
쓰는 조리개였다. 헌데 이상했다. 『이것을 내 아내가?
내가 상투를 틀 때 백색으로만 트는 것을 모를리...』
중군의 시선이 아우의 미투리에 이르자 말을 잇지 못했다.

아우는 버선을 거꾸로 신고 있었다. 반가(班家)의 사내로서는
그 자체로 예사가 아니었다. 아내가 전해주라 했다던 평소와
다른 색의 조리개.. 거꾸로 신은 버선.. 중군은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소인은 먼저 떠나겠습니다. 백의(白衣)의 몸으로선
말 한 필조차 장만할 수 없군요』 그러고는 먼저 떠나버렸다.

중군은 사당 근처로 돌아와 강이 보이는 잔디밭에 쓰러지듯 앉았다.
사당에선 아직도 바라를 울리며 원혼 달래는 소리를 찬찬히 울리니
중군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옛적에,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도
억울한 죽음 맞은 이가 한을 품고 지역의 귀신이 되었는데 병인년. 그
나라에서 나온 관리가 엎드려 힘을 청했고 이겼다. 자진하여 나라 문을
걸어 잠그곤 외세의 화를 돋운 우리를, 그자가 정녕 두 번씩이나 돕겠는가.

양이는 절벽 아래 해안에 발을 디뎠고 그 짙은 푸른색의 무리는
굽이쳐 살생(殺生)을 모는 손돌(孫乭)의 한(恨) 같았다. 중군은
포수들을 성첩에 앞장세워 몰려오는 적군을 내려다보며 쏘게
하였는데 훈련도감 초관은 성벽의 형세를 따라 줄을 일렬로 세운 후
후방에 장창수를 배치하여 적군의 돈대 돌파를 막고자 하였고
장창수가 없던 어영청 초관은 포수만을 이열로 세워 연속사격을 꾀했다.

품계는 같고 각 군영의 진법은 달랐던 두 초관은 각자의 방식을
고집했고 제 초관을 진작에 잃은 금위영 기패관과 애간장 녹는
세 영(營)의 병졸들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적군이 총포를 마구
쏘아대고 충전된 사기를 내지르며 암벽을 기어 올라오는데 훈련이라곤
지난 사흘간 받은 것이 전부였던 포수들은 화승총 심지의 불씨 다루기를
어려워했고 초관들은 각자 다른 방포 명령을 내렸다. 결국 적군이
지척(咫尺)에 이를 동안 노쇠(老衰)한 화력은 통일되지 못했다.

금위영 아무개가 죽었다. 어영청 아무개도 죽었다. 훈련도감
아무개와 수어청 아무개, 진무영(鎭撫營) 아무개도 죽었다.
몇 순간 뭉게구름이 펑펑 터지더니 모두 하나같이 쓰러져
일어나질 못했다. 여기저기 흙먼지가 일고 칼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한데, 무기고에 들어갔다 나온 군교(軍校) 하나가 중군에게
수자기(帥字旗)를 건넸다. 국태공(國太公)이 직접 내렸다고 했던가.

말려있던 하얀 종이를 흙바닥에 펼쳐 보인 중군은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허영(虛榮) 위로 사죄를 쏟곤 깃대를 내리꽂아 수하들의
오장육부를 울렸다. 『이곳이 우리의 마지막 중심이요, 곧 우리가
죽을 곳이다. 생사는 하늘에 달려 있으니 어찌 두려워 나라 위하질
못하랴. 내가 나라의 후은을 입었으니 죽음으로써 내 직책을 지킬
뿐이다』도처(到處)의 동분서주하는 전립들 속 함께 칼 휘두르던
아우의 미소에 진심이 번지고 또 번져갔다. 뜸 들이지 못했다.

위아래로 요동치는 뜨거운 흑(黑)과 매끈하고 차가운 쇠에서
뿜어져 나오는 옅은 백(白)이 뒤섞여 온 사방 천지에 양기가
터지고 터져 뿜어졌다. 총에 맞아 쓰러진 군사들은 꿋꿋이
휘날리는 중군의 허영 아래 귀신처럼 되살아났고 중군은 그
소생의 힘을 믿었다. 가지고 싸우던 검이 두 동강 나자, 세 번째
검을 주워 휘두르던 장창수가 다리에 총을 맞고 쓰러져 적들의
얼굴에 돌을 던져댔다. 총검에 찔린 어영초관이 적군에게
달려들어 볼과 귀를 물어뜯고 그 살점을 씹다 하얀 피부 위에
검붉은 토사를 게워 냈다. 『어디 한번 따라 뛰어들 테면 뛰어봐.
그러면 내가 물귀신이 돼서 네놈들 뱃속 오장육부를 갈가리 찢어
놓을 테니까. 네놈들 오장육부를 갈가리 찢어발겨 놓을 테니까』
무기를 버리라는 적의 언어가 들리자 금위기패관은 절벽 아래
파도로 몸을 내던졌고 그를 따르던 금위영 병졸들이 모두 뒤따라
몸을 날렸다. 밀려오는 적군에게 대포알을 내던지다 사로잡힌
별파진은 머리가 깨지고 발목이 잘려 나간 판에 어서 죽이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고 적 장수 하나는 고통 없이 보내주자
하였다. 손을 얹고 있던 그의 칼집이 덜덜덜 떨렸다.

검은색 조리개와 거꾸로 신은 버선에 진한 피가 배여 물들었다.
사흘 전 강화 땅에 도착한 경군 사백여 명이 모두 죽었다. 적군은
광성진을 함락하고 시체들을 묻어주다 강화산성 유군(遊軍)의
습격을 받았고 그다음 날 서해를 떠났다. 신미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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