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조선왕조

ㆍ작성자	정병욱
ㆍ작성일	개국630(2021)년 3월 8일 (월) 18:44 [유시(酉時)]
ㆍ문서분류	문학
ㆍ설명	풍고전 후속
ㆍ저작	국민일간사

ㆍ추천: 0 ㆍ열람: 578

시대_01 제2권

흥선군의 사랑에 들어선 상감의 미복 차림은 예전의 화려했던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지 못하였다. 색색이 아름다운 화려한 미복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누추한 흥선군 이하응의 살림에 버금갈 법한 옷차림이었다. 하지만 상감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나이는 자신보다 여덟 살 연상인 흥선군을 그 누구보다도 극진히 대하고자 노력해왔다. 상감의 은총을 한 몸에 받은 흥선군은 그 누구보다도 부럽지 않았지만 시세(時勢)의 상황에 맞물리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있었기에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다.

상감의 방문을 받은 이하응은 자신의 사랑방에 들인 뒤 자신은 아랫자리에 앉고 상감은 윗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상감이 방바닥을 하염없이 쓰다듬는 것이다.

“하, 이곳 흥선군의 방은 유난히도 포근하구 따뜻하구려. 왕실의 그 어느 방도 이리 따뜻하지는 않소.”

따뜻한 방바닥을 만지면서 천장을 바라보는, 왕실의 어른이 하신 말씀에 이하응은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어릴 적에 자신처럼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의 등쌀에 왕위에 올라서도 떳떳하지 못한 구차한 삶의 연속으로 살고 있으니 이 어이 말로 형언할 수 있을까. 헌헌장부로 태어났으면 천하를 호령할 힘을 맘껏 떨칠 수 있으련만 그 미련에 맞물린 상감의 마음은 서서히 약해지는 것이다.

“전하.”

그 맘을 알기라도 하듯 하응은 나직이 눈물을 떨구는 것이다.

“여기 온 김에 그대의 난 그림도 보고 군부인(郡夫人)의 모습도 보고.”

삭막한 대궐보다는 시정(市井)들과 얼마 멀지 않는 흥선군의 집이 더 나을 거라고 위안을 삼는 상감이었다.

“소인의 난 그림을 보고 싶으시옵니까?”

흐르는 눈물을 애써 거둔 하응이 상감에게 묻는다.

“그렇소.”

쓴웃음을 짓는 상감의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던 하응은 문을 열어 부인 민씨(閔氏)를 부른다.

“예.”

밖에서 민씨가 나오는 걸 본 하응이 주안상을 내오라고 이른다.

민씨가 간만에 온 귀한 손님을 위해 알뜰살뜰히 술상을 푸짐하게 보아왔다.

민심이 박한 게 아니라 대궐의 인심이 박한 것 같을 지경이었다. 상감은 입 벌려 웃으며

“얼마 되지 않는 주안상이 이리 푸짐할 수가 있겠소?”

그러자 하응이

“대궐의 상차림보다야 누추합지요.”

대답한다.

“허허허허, 무늬만 반찬들이 많지. 그 이상도 아니오.”

“얼마나 백성들이 먹고 살기가 힘들겠사옵니까. 그러니 구할 것이 변변치 않을 수밖에요.”

상감의 얼굴에선 굽신 거리는 이하응의 모습이 너무나 보기 싫어 넌지시 농담 아닌 농담을 건넨다.

“흥선군.”

임금의 눈이 하응을 응시한다.

“예, 전하.”

쓴웃음을 지으며 상감이 나직이 묻는다.

“이내 용상의 자리가 탐나지 않소이까.”

순간 하응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갑작스레 임금의 입에서 그리 나올 줄 미처 몰랐다.

“전하, 어찌 감히 용상을 탐하겠나이까.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로소이다.”

당황해하는 하응의 태도에 임금이 크게 웃는 게 아닌가.

후사(後嗣)가 있다고 하나 옹주 하나 밖에 두지 않았다. 대군 아기씨도 왕자 아기씨도 없는 임금의 답답함을 이로써 대신하는 것이다. 그런 의중을 모르고 하응이 놀라는 것은 자칫 하다가 역모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왕족의 슬픈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는 불가항력(不可抗力)의 불안 때문일 것이다.

상감의 주안상을 마주한 하응을 다독이며 서로서로 격의 없는 친구처럼 정담을 주고받으니 이내 흥선군의 사랑방에서는 그제야 웃음꽃이 피어났다. 하응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실력을 맘껏 떨친다. 바로 난을 치는 것이다. 하응의 붓 솜씨는 여느 나이와는 다르게 난을 그리는 선 하나하나에 유연성(柔軟性)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 몇 수를 적는 필체 또한 강직함이 돋보여 상감의 눈을 신선하게 해주는 것이다. 상감은 그런 흥선군을 좋아하고 흠모하였다.

훗날 자신의 아들을 상감으로 올린 힘은 그런 이하응의 태도가 유연함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흥선군은 손수 그린 난 그림을 상감에게 바치니 상감의 입에 웃음이 넘쳐흘렀다. 이윽고 상감의 소원을 이룬 덕에 내시는 한시름을 놓았다. 날이 트일 즈음 상감은 서둘러 흥선군의 인사를 받고 궐로 서둘러 향하고 있었다.

상감이 은밀히 운니동 흥선군 이하응네 집에 들르고 다음날 아침 김좌근네 집으로 웬 마님 한 분이 당도하신다. 겉은 도도하게 생겼지만 무척이나 행실이 천박해보이기 까지 하였다. 그렇기에 좌근네 집 하인들은 보는 내내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거다. 이를 눈치 채지 않고 이 마님이,

“안에 아씨 계신가?”

하고 물어본다. 이윽고 침모가

“아뇨. 아씬 지금 잠시 밖에 나갔는뎁쇼.”

마님에게 퉁명스럽게 내색하기 어려운지 억지로 예를 갖추며 답한다.

“그럼 마님 오실 때까지 잠시 집안 산책을 좀 하고 있겠네.”

십여 년 전 상부(喪夫)한 김유근의 처였다. 예전의 곱던 자태는 어디로 갔는지 모를 정도였고 남편이 여의고 난 뒤에 줄곧 김좌근의 집에를 어슬렁거리는 일이 늘 있다 보니 그것이 유일한 낙이 되어버리고야 말았다. 이러기는 한 두 해가 아니라 꽤 오래되었다.

좌근네 안방마님은 누구에게 얘기를 들었는지 헐레벌떡 아랫것을 앞세우고 유근네 처 앞에 다다른다.

“아니 예가 어디라고 이렇게 오셨습니까?”

씩씩대며 삿대질하려는 듯 좌근의 처는 유근의 처를 덤비는 게 아닌가.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광경을 목격한 유근이 처는 남이야 여기로 오든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엄연히 시댁이라는 데 아니올 손가. 하며 맞받아치는 것이다. 하기는 좌근의 처가 화가 치밀 만도 했다. 물론 유근의 처 말마따나 시댁이기는 하다. 그런데 시어른들이 계시지 않는 지금 오고가질 못하는 고아로 전락한 두 집안이 곧이곧대로 왜 만나야 한단 말인가. 물론 시부모가 모두 돌아가시고 없지만, 무엇보다 제 시누이가 왕실의 큰 어른으로 군림하고 계시기에 싫어도 싫은 척 내색하기 힘든 지경에 이른 탓도 있다. 그런데 둘째 원근의 처는 이미 이들의 뒤치다꺼리 자체가 싫어 왕래를 끊은 지 오래되었다.

차라리 이 꼴을 보지 않은 게 원근의 부인으로서는 다행이라 할 수 있을 거다.

어쨌든 두 아낙네의 다투는 소리를 듣는 하인들은 진상을 부리는 모습이 아니 꼴사나울 수 없었을 거다.

그렇게 아웅다웅하다가 갈라져버린 두 사람은 여섯 달 만에 다시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동서에게 단 한 번의 소식 한 번 없던 둘째 원근의 처가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원근의 처의 병세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의원이 자주 왕래하여 문진하고 갔는데 얼마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의원의 말이 마음에 걸려서인지 원근의 부인은 몇 번이고 아들 병지에게 신신당부하였다.

“내가 죽거든 큰집에나 작은집에 찾아가서 신세를 져야 한다. 네가 안동김씨의 유일한 혈손(血孫)이니만큼 가장으로서의 책임이 막중하니라. 만약 나이가 다 차거든 다시 이 집에 와도 괜찮으니라. 네가 입신양명(立身揚名)하는 모양을 보지 못해 한스럽다만 네가 한 집안의 가장이 된다면 지하에서 네 아버님이 크게 기뻐하실 게다.”

그도 그럴 게 천신만고 끝에 얻은 하나뿐인 귀한 자식이었기에, 생전에 김조순이 그토록 바랐던 장손이니만큼 그 기대가 오죽이나 컸을까. 김조순의 세 며느리들 중 가장 현숙(賢淑)하기로 소문이 난 원근의 부인은 윗동서를 극진히 대하고자 노력하고, 아랫동서에게는 점잖게 대하고자 노력하였다.

매사를 신중하게 하였기에 김조순네 집은 그만큼 평화를 유지한 건지도 모른다. 때문에 원근의 부인이 두 동서를 불러내어 장차 자신이 죽고 없으면 하나뿐인 혈육 병지를 맡아서 잘 키워달라고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물론 항상 좌근이가 그의 뒤를 후원하기는 했지만 후견인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병지 어머니로서는 근심이 아닐 수 없었다.

“형님, 형님 몰골이 말이 아녜요.”

막내 좌근의 처는 철딱서니 없게 이맛살을 찌푸리는 게 아닌가. 하지만 건방진 태도에도 아랑곳 않고 원근이 댁은 쓴웃음만 짓는다.

“대체 어느 정도라고 합니까?”

유근의 처가 걱정스레 물어보았다.

“내일 모레 앓는다더구먼.”

원근이 댁이 피식 웃는다. 그런데 난데없이 손에 쥔 무명천으로 입을 가린 채 심한 기침을 뱉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천 가운데에 시커먼 피가 나오는 게 아닌가. 그러자 두 부인이 화들짝 놀란다.

“아, 아니 형님.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막내 동서의 물음에 무명천으로 피를 닦고 있던 병지 어머니는 쓴웃음을 짓는다.

“자네는 모를 걸세. 나는 시집오기 전부터 타고나기를 병약하게 태어난지라 어릴 적부터 염려와 걱정 속에서 살았다네. 한데 집안에 성화도 있고 하여 마지못해 김씨 집안에 시집을 왔는데 종갓집 며느리로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지. 그런 걸 시아버님이 아셨던지 내게 그저 편안하게 지내라고 하시며 다정히 대해주셨어. 아랫것들 실컷 부려먹을 거면 부려먹으려무나. 하시곤 했어. 하다못해 시어머님조차도.”

반가의 며느리로 시집을 온 병지 어머니는 그러나 아랫것들을 부려먹기만 하지 않았다. 천성이 타고나기를 병약한 까닭도 있지만 어진 마음가짐으로 아랫것들과는 격의(隔意) 없이 지내기도 했다. 반가의 규범도 지엄한 이 풍토 속에서는 흔치 않은 개방된 시각이 오히려 안동김씨의 세도를 더욱 오랫동안 유지시켜왔는지도 모른다.

수구적(守舊的)인 세력과 개혁적인 세력 사이에서 마치 줄타기를 타듯 살아온 김조순의 마음가짐은 오히려 병지 어머니에게 영향을 미친 것인지도 모른다. 명색이 맏며느리인 유근의 처는 실질적인 안주인인 병지 어머니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본 것은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잘 버텨준 것에 대한 고마움인지도 모른다.

사실 김조순 생전에 맏이 유근을 다른 집의 양자로 입적하고파서 한 게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집이 만약 몰락하게 되면 종손(宗孫)의 맥이 끊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염려와는 다르게 집은 잘 돌아갔고 자연히 원근이 사실상 맏이 노릇을 하게 되면서 병지 어머니도 종부(宗婦)로서의 도리를 다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에 유근 영감이 미련에 사무쳐서 분이 치밀기도 했지만 오히려 상감이 왕위에 오름과 동시에 세도를 누리게 되었으니 그 분풀이를 할 새도 없이 원한은 사그라지고 말았다.

종부로서 살고 있는 둘째 동서를 시샘하기도 했지만, 그나마 남편이 세도를 누리게 되어 대신 한풀이는 한 셈으로 쳤지만 병상을 떨치지 못하고 죽고 난 지 2년이 지난 어느 날 병지 어머니를 보고 나서야 자신이 공연한 욕심을 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이 한때 세도가의 아내로서 남편의 권세에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온 삶이나 삶과 종부로서의 책임을 지고 살아온 둘째 동서의 삶이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사(設使) 동서가 아닌 자신이 종부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손 치더라도 책무를 져야하는 임무는 그저 그런 하잘것없는 사람의 삶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우친 것이다.

그 무거운 짐을 병약한 몸으로 짊어진 둘째 동서를 생각할 적에 유근의 처의 눈에는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눈시울이 뜨거운 채 유근의 처는 둘째 동서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그래. 고마우이. 내 대신 종부로서 책무를 다해줘서 너무 고마우이.”

울먹이며 감사를 표하는 말에 병지 어머니는

“형님, 무슨 말씀을요. 제가 별 도리를 다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에요.”

무슨 말을 그리 하나. 이런저런 말이 오고가는 두 동서간의 덕담 아닌 덕담에 막내 좌근의 처도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세 동서가 일시에 대성통곡을 한다. 세 형제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김좌근의 처는 안타까움에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울분은 밤이 깊도록 그칠 줄 몰랐다.

여한 없이 동서들을 지낸 덕분인지 한 달도 채 되지 못한 날에 병지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부고를 접한 두 동서는 호곡(號哭)하며 동서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였다.

장동 김좌근네 집으로 찾아온 조카 병지의 절을 받은 당주(當主) 김좌근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치 못하고 흐느끼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고 이렇게 말을 꺼낸다.

“네가 이제 당당한 김씨의 유일한 혈손이니라. 그러니 체통을 잘 지켜야 하니라. 우리 집안은 대대손손 권세를 누릴 수밖에 없는 기로에 서 있기도 하니 네가 처신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 집안의 가운(家運)도 기울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기에 병지야. 너는 이 집안을 반석 위에 올릴 수 있도록 각별히 애정으로 집안을 잘 이끌어주길 바란다.”

특유의 입발림으로 좌근은 이렇듯 조카 병지를 설득하는 것이다. 곁에 지켜보는 좌근의 처는 눈물을 훔치는데 여념이 없고, 병지는 숙부의 말에 경청하지 않을 수 없기에 더욱 공손히 앉기만 했다.

날이 가면 갈수록 풍양조씨의 세도는 하늘을 찌르고 남음이 있었다. 그 덕에 대왕대비전은 고사하고 김좌근네 집에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는 발걸음도 그만큼 뜸해지고 말았다. 시들어가는 안동김씨의 세도는 그 깊이를 모르는 곳으로 곤두박질치듯 떨어지고 말았다.

더더구나 조정은 오직 풍양조씨의 입김에 의해 정권이 좌지우지되어가고 안동김씨에 버금가는 전횡을 일삼았다. 과거(科擧)는 과거대로 부패해질 대로 부패해져 온갖 청탁 뇌물이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

서상교(徐相喬)라는 이가 상감에게 김흥근의 부정축재(不正蓄財)를 문제 삼아 정배(定配)를 보내고 하는 바람에 대왕대비는 괘씸했으나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게다가 두 공주를 출가시키고서 적적하기는 이를 데 없는데 하필 두 공주마저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참척을 겪으니 대왕대비의 외로움도 기울어가는 안동김씨의 세도처럼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듯 떨어지고 있다. 밤이면 밤마다 대왕대비는 몰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야속하게도 상감은 이런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아침 문안은커녕 저녁 문안도 드리지 않으니 섭섭함을 넘어 괘씸함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왕대비인 나를 푸대접하다니. 이런 고얀.’

막가자는 식의 상감의 태도를 불손하게 여긴 김씨는 그러나 자신이 명색이 왕실의 큰 어른으로 받들어지는 처지인지라 대놓고 내색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런 대왕대비의 처지를 방관한 상감은 항상 경빈의 처소로 제집 드나들 듯 해댔다. 경빈은 불철주야(不撤晝夜) 상감이 오기를 학수고대하였고 사랑은 그만큼 돈독해져 슬하에 이미 옹주를 하나 두었으나 태어난 지 1년도 채 안되어 죽음을 맞이하는 참척을 겪었다. 상감은 이제 성숙한 모습으로, 마치 효명세자(익종)의 살아생전의 모습과 같았다.

주위의 아랫것들도 눈치 챌 정도이니 젊은 상감에 대한 기대는 그만큼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풍양조씨의 세도에 놀아난 이들이 정부의 주요 요직에 몸을 담갔다손 치더라도 마냥 상감은 좌절하지는 않았다. 왜냐? 왕대비 조씨의 지지와 더불어 조씨의 대표격인 조병현 등의 세력 또한 상감의 친위세력으로 자처할 정도로 상감의 국정에 따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으로 박규수라든가 이하응이와 같은 신진관료들을 등용하여 측근으로 삼아 새로운 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던가 가뜩이나 상감의 문후도 받지 못하여 독방 늙은이 취급을 당하는 게 서러운 대왕대비 김씨는 상궁 나부랭이들의 비웃음을 당해야만 하는 설움을 겪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현실이 너무 야속할 따름이었다.

어쨌든 야심한 밤에 경빈의 처소에 듭신 상감은 대청마루에 올라가더니 주위를 살피며 조용함을 확인하고는 상궁의 인도에 따라 경빈이 묵는 방에 들어간다.

상궁의 부름에 화들짝 놀란 듯 경빈은 경황없이 찾아온 기별에 서둘러 상감을 맞이한다.

“처소에 어인 일로 오셨나이까?”

새삼스럽게 상감이 온 연유를 묻는 경빈의 아양에 젊은 상감의 입가엔 웃음기가 가득 감겨 있었다.

“내 경빈을 보러 왔지. 경빈이 아니면 그 누구를 볼꼬?”

애착이 담긴 마음으로 가득 찬 상감의 태도에 경빈은 상감이 내리는 성총(聖寵)에 기쁨을 감출 길 없어 경빈은 수줍게 웃음을 타는 것이다. 이 모습이 보기 좋아 상감은 이곳에서 밤을 보낼 작정이었다. 경빈이 상감의 승은(承恩)을 받은 지 이제 삼 년이 되어간다. 왕비의 자리에 앉을 법했지만 지엄한 대왕대비의 엄명이 있고 하여 소원성취를 이루지 못하였으나 상감의 불타는 애욕에 주체지 못한 나머지 대왕대비마마를 조르다시피 하여 간신히 궐에 들인 경빈이었다. 그만큼 애착이 컸기에 지금 경빈이 거처하는 처소를 손수 지을 정도에 이르렀으니 오늘날 비원(苑) 인근에 자리한 낙선재(樂善齋)가 바로 이곳이다. 낙선재는 단청(丹靑)을 입히지 않고 허례허식(虛禮虛飾)도 마다하고 오직 소박한 사랑만을 추구한 상감의 진심이 담긴 전각이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경빈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있음에도 아랑곳없어 보인 사랑의 불씨는 서서히 꺼져갔다. 상감의 개혁 정책에 찬동하는 이는 극소수였고 안동김씨는 하루빨리 자신의 정권이 다시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왕비는 왕비대로 경빈의 승은에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홀로 독수공방하는 기구한 운명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대왕대비의 꼭두각시놀음에 속을 그가 아니었다. 그 몸부림을 경빈의 무한한 사랑으로 쏟아대는 지도 모른다.

그런 상감의 상황이 십년이 넘고 나서부터는 악화되어가고 있었다. 상감의 병이 문제였다. 상감이 앓고 있는 병을 분명히 밝히지 못하고 전의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그러기를 아홉 달. 대전 내시가 중궁전에 찾아가 아뢰었다. 그것은 상감의 붕어 소식이었다. 상감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사랑하는 경빈의 품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상감의 부고에 대왕대비는 당황하여 통곡하였으나 어두운 밤중에 쓴웃음을 지었다. 국상이 선포되고 대왕대비는 상감에 대하여 이렇게 회상하였다.

‘본래 여색을 탐하고…… 의심 많아 나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을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았소. 또 성정이 계집애와 같은지라 후사를 두고 싶어도 둘 수 없었소.’

대왕대비는 손자인 선왕의 진정한 면모를 이렇듯 험담을 내놓는 게 아닌가. 상감에 대한 섭섭함이 분노로 변한 순간이었다.

―이하응은 대전 뜨락 앞에서 여러 신료와 종친들과 같이 상감의 승하에 대성통곡하였다.

상감의 죽음 이후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풍양조씨네는 언제 어떻게 휘몰아치는지 모른 채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상감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기에 그 아쉬움을 헤아리기에도 버거웠다. 그런 자신들의 처지도 서러운데 안동김씨네들이 옳다구나 하며 재집권을 서두르려고 하니 생각수록 괘씸하기도 하였다. 대왕대비의 입김 하나면 다른 왕족의 자손쯤이야 후사로 이을 수 있는 힘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루는 상감의 상중에 대왕대비는 정원용(鄭元容) 이하 대소신료들을 불러다 놓고 울면서 하소연을 토해냈다.

“상감이 죽고 나니 이리도 적적할 줄 누군들 알았겠습니까. 허나 왕실에 후사가 없으니 맘 같아서는 왕족이란 왕족을 수소문해서 새로 금상을 세워야겠는데 경들은 이 생각을 잘 헤아려서 대답을 해 주시오.”

선왕의 뒤를 이어 새로 왕을 세우는 중차대한 일을 눈앞에 둔 대신들은 수군대기 시작한다. 후사는 단연 남연군의 자손들이 물려받아야 하나 대왕대비는 그 중 이하응만큼은 내주기 싫었다. 영악해도 여간 영악해서 탐탁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직 대왕대비 자신의 비위를 맞추는 임금만 잇으면 그만이었다.

그때였다.

“신 정원용, 아뢰나이다.”

영상(領相)에 앉은 정원용이 직접 아뢰었다.

“제가 알기로는 강화(江華) 땅에 영조대왕의 혈통이 살고 있다 들었사온데.”

대왕대비는 솔깃했다.

“그래요? 그럼 영상께서 직접 찾아주세요. 이 늙은이, 기댈 곳이 없어서 너무 허전합니다. 그러니 경이 하루 빨리 왕손을 찾아주세요. 부탁입니다.”

대왕대비의 진심 어린 울분(?)에 신료들은 일제히 통곡하였다. 대왕대비의 분부를 받들어 정원용은 서둘러 강화도 땅으로 향했다.

그리고 선왕의 시호를 헌종(憲宗)이라 하니, 세도정치의 희생양이 된 비운의 군주였다고 후세 사람들이 안타까워하였다.

때 이른 나이에 요절한 헌종대왕의 뒤를 이을 왕족을 찾기 위해 조선팔도를 수소문 하던 안동김씨가 강화도에 있는 왕족을 찾았다. 전계군(全溪君)의 아들 원범(元範)이 바로 그이니 강화도령이라고 일컫는 바로 그 사람이다.

덕분에 조씨에게 빼앗긴 권세를 김씨네가 다시 손을 움켜쥐는 영광을 안았다. 그 경사스러운 자리에 김좌근은 자신의 애첩 월선에게 잔치를 벌이도록 했다.

“감축드립니다. 대감.”

아양떠는 나주(羅州) 출신의 월선이는 좌근의 마음을 쥐락펴락 하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에게 ‘나합’이라고 별명을 지을 정도이니 이는 ‘나주 고을에서 온 합하’라는 의미의 줄임말이었다. 본처인 이씨 부인은 그런 월선의 행태에 분노와 투기가 있었으나 대감이 손수 움켜쥐어 주는데 일조한 대왕대비의 뒷배가 있어온 터인지라 참는 것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러다보니 이씨의 일은 큰동서―유근의 처와 소담을 나누는 게 일이었다. 대왕대비가 정계에 복직하고 하는 움직임 속에 김흥근 등이 정계에 다시 나서기 시작했다. 드디어 좌근의 힘에 의해 강화도령 이원범이 선왕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르니 조선왕조의 제 25대왕이 되는 분이다.

대왕대비는 이후에 왕실의 큰 어른으로서 식견이 부족함을 들어 친히 몸소 수렴청정을 행했다.

상감 사후 조정은 대왕대비의 손에서 진행되었다. 대왕대비는 상감의 후임으로 강화에 있는 원범에게 보위를 넘기고 자신의 양자로 입적하니 선왕 헌종에게 삼촌인 셈이다. 마치 자신의 참척의 고통을 보장받기라도 하듯 대왕대비는 김좌근을 대신 영의정에 앉히고 권력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선왕의 개혁 정책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유야무야(有耶無耶)되어 버리고 생전에 신뢰한 조정 대신들에게 철퇴(鐵槌)를 휘두르기까지 했으니 일러 말해 무엇 하리. 왕대비의 오빠 조병구가 죽고 풍양조씨의 실력자가 된 조병현은 상감이 즉위하자마자 명경대왕대비의 명을 받고 사약을 먹어 죽으니 조씨의 세도는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헌종의 친위세력을 축출한 대왕대비는 김좌근이로 하여금 매개체로 삼아 민심의 동태는 물론 조정의 상황까지 보고하는 것이었다.

이에 좌근은 대왕대비의 침소에, 밤 깊은 시각에 은밀히 찾았다.

대왕대비는 수심에 젖은 채 좌근을 맞이하고 이야기한다.

“아우님.”

“네. 마마.”

“나는 죽겠소.”

“죽겠다니요.”

“덕온공주(德溫公主)가 눈에 밟힙니다. 선왕의 문후도 받지 못하고 있는 내게 사가의 일을 제쳐두고 내게 와서 꼬박꼬박 문후 인사를 드리고, 하다못해 내 어지러운 심사가 거스를 때면 공주는 내게 와서 어지러운 심사를 달래주곤 했어요. 그런 공주가 없으니…… 이토록 허전하구려.”

누님의 울분을 지켜보는 좌근도 좌근이지만 덕온공주의 죽음이 꽤 충격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누이의 사심이 드러나는 순간 그런 정을 쏟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 듯 일어나니 누님의 마음을 헤아릴 것 같단 듯 좌근은 슬피 울었다. 왈칵 쏟은 눈물 주체치 못하는 마음, 금할 길 없다. 좌근의 타고난 성격 같으면 대왕대비의 비위를 능히 맞추고도 남았건만 좌근의 마음으로서는 대왕대비의 변덕 심한 마음을 헤아리기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덕온공주의 부군 되는 김병주(金炳疇)는 아직 생전에 있고 부인과의 사이에 태어난 딸도 무럭 잘 자라니 다행 중에 다행이다. 좌근은 지금에 이르러서야 대왕대비를 보필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쁜 나머지 감격의 눈물을 주체하기 매우 힘들다. 상중이 아닌 것만도 다행이다.

상감은 올해로 스물여섯. 그 나이에 와서는 벼슬길도 가보고, 조정을 위해 불철주야로 제 몸 하나 헌신하고도 남아 입신양명의 길로 접어들 법하건만 대왕대비가 수렴청정 하는 동안에 사서삼경을 배우고 왕도 수업을 받는 식의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대왕대비가 강화도에서 농군(農軍)의 아들로 자라온 까닭에 공부에 매진하지 못하는 연유도 있으나, 대왕대비와 그 외척 세력에게 만큼은 자신들의 권세를 굳히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새 임금은 대왕대비에게 문안을 드리러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으로 들어갔다. 그때 명경대비가 웃으며 상감을 맞이한 뒤

“상감 오셨소.”

하며 물었다.

“네.”

의례적 인사이지만 궁중의 법도가 엄하여 주눅이 든 상감을 마치 아들 대하듯 하는 대왕대비는 자신의 왼편에 앉은 대신 하나를 가리키며,

“상감, 인사하시오. 장차 국구가 되실 어른이오.”

하면서 상감을 소개시켜 준다. 대신을 돌아보게 하니 얼굴은 늙은 호박처럼 넓고 살집이 많았으며 흡사 전생에 장군으로서 천하를 호령할 것 같은 인상이었다. 저 사람이 내 장인이라니.

당황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자신과 일말의 상의도 없이 강화도(江華島)에서 두고 온 각시 생각은 않고 왕실의 불가항력에 가까운 강압에 이길 도리가 없었다. 지금은 전임 영상이 되어버린 정원용의 성화에 못 이겨 끌려오다시피 한 대궐의 살림이 결코 좋을 리 없다.

한데 어찌하랴. 강화도에 계시는 부대부인(府大夫人 : 상감의 생모)의 말씀에 따라 지엄하다는 대왕대비의 분부에 받드는 것이 도리일 듯싶다. 그러면서 상감의 얼굴은 금방 흙빛이 되어 있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대왕대비는 어김없이 미소하며

“상감. 어째서 얼굴빛이 어두워지셨습니까?”

그러자 곁에 있던 영상 김좌근이 웃으며

“대궐 생활이 낯서신 탓이지요.”

상감의 말을 대신 하는 것이다. 이들은 오직 하나. 왕손을 보위에만 세우면 그만이라는 뜻이었다.

장군 모양으로 생긴 장인어른감인 김문근(金汶根)은 대왕대비와 좌근에게는 먼 친척동생이었다. 그런 그에게 방년에 접어든 딸이 하나 있는데 그를 상감의 배필(配匹)로 점지한 것이었다.

부대부인은 상감에게 ‘대왕대비는 무소불위(無所不爲)의 세도에 의해 정권을 좌지우지하며 백성들에게 온갖 수탈을 일삼고 탐관오리들을 양산하며 심지어는 상감, 곧 헌종을 죽이는데 일조하여 손자의 죽음에 대한 비정함을 지닌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어른’이라고 일렀다. 그리고서 상감이 궐에 들어가서 행동거지에 소홀히 할 때는 가차 없이 대왕대비의 손에 의해 집안이 절단나고야 마니 조심하라고 일렀다.

상감은 대왕대비와 측근인 좌근과 자신의 장인이 될 김문근 이 세 사람의 미소를 통해 권력자들의 횡포(橫暴)가 극심함을 몸소 느낀다. 부대부인의 말이 예삿소리가 아님을 절감했다. 이때 불현 듯 선왕을 떠올렸다. 수십 년 동안을 세도로 누리고 있는 저 안동김씨의 서슬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이 눈에 선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에 맞서 싸우고자 노력했으나 갑작스럽게 단명한 상감의 모습이 되풀이 될까 심히 불안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옵니다.”

상감의 때늦은 대답이 서운하였지만 대왕대비는 그제야 안심하고

“상감의 뜻대로 처리하세요.”

위선적인 태도로 대비는 수긍하는 분위기를 취한다.

정신적 지주였던 선왕이 죽고 김씨네가 다시 세도를 누리게 생기자 흥선군은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그토록 자신을 신임해주시던 상감이 세상을 하직하고 그 누구 하나 충신을 두시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니 천추의 한이 아닐 수 없다.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탐관오리의 학정(虐政)과 굶주림으로 먹을 것을 제때 먹지도 못한 채 궁핍한 생활만 하니 말로 어이 형언하랴. 하다못해 갓난아이의 몫을 매기려 들며 세금을 착취하니 나라에 대한 원망도 하늘을 찌르기에 이르렀다. 오죽했으면 훗날 정약용이 <애절양>이라는 한시를 남겼을까.

이 현실을 차마 떨치기 어려워 흥선군은 스스로 은둔을 택하였다. 이때 부인 민씨가 대감에게 애원하였다.

“대감, 참으십시오. 대감이 안 계시면 처자식들은 어쩌려고요.”

그는 성 문 밖 자하동(紫霞洞)에 별장을 지어 아담하게 살고자 하였다. 외부의 차단 속에서 주군을 잃은 신하처럼 세속과의 벽을 쌓아 자신의 예술혼을 태우고자 했다. 그러나 부인의 만류에 밀려 차마 그리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생각한 끝에 자신은 세상을 향해 가고자 자신을 낮추기로 마음을 먹었다. 계섬월(桂纖月)도 이때 만난 사람 중에 하나였다. 계섬월은 한때 서울 장안에 이름을 날리기도 했던 기생이었는데, 그 기생집에 단골로 온 흥선군의 실수로 아들(재선)을 두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부인 민씨는 계섬월의 부탁을 받아 친자식처럼 재선(載先)을 거두어 키워주었고, 계섬월은 명색이 소실이지만, 이하응의 부탁으로 기방을 새로 차리고 조정의 유력한 대신들을 모시도록 했다.

그런 뒤 흥선군은 자신의 은신처로 이 기방을 택하여 자신의 애첩인 계섬월이로 하여금 정보를 캐도록 하였다.

흥선군은 이번 행보를 통해서 든든한 지원자들을 얻게 된다. 첫 번에는 천희연, 하청일, 장순규, 안필주를 필두로 보부상, 시정잡배(市井雜輩)로 이름을 날린 건달들에 이르기까지 이를 헤아리기 힘든 사람들을 자신의 수하로 두어 시정잡배에 어울리기 시작했다. 한번은 천하에 제일로 영악하기로 소문난 천희연이 어디서 구했는지 오래 되고 냄새가 고약한 누더기 옷을 가지고 오니 대관절 기이한 상황에 민씨가 이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그제야 대감의 의중을 알아버렸다.

“이게 무엇이오?”

하고 묻자

“이 옷을 대감마님께서 찾으시는뎁쇼.”

간사하고 영악하게 생긴 천희연이 태연하게 답한다. 그런데 안에서,

“천 서방. 밖에 있는가.”

“네 마님.”

“어서 누더기 옷을 가져오지 못하느냐.”

대감이 재촉하고 있었다.

이에 민씨는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대감이 그예 실성하셨구려.”

통곡하는 부인의 울음소리에 아랑곳 않고 무작정 천 서방이 준 누더기 옷을 입어보고는 해맑게 웃었다.

이하응은 어수선한 세상을 향하여 그는 누더기 옷을 항상 입고 세도가란 세도가의 집에 문전걸식(門前乞食)하며 왕족이라는 신분에 안 맞는 행위로 주위 사람들이 소곤소곤 대었다. 흥선군이 아주 실성하였다는 둥,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 나서 미친 거 아니냐는 둥, 벼락을 맞아서 저렇다는 식의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그 소문은 물정 모르고 이하응의 본모습을 보지 못한 자들이 꾸민 허무맹랑(虛無孟浪)한 거짓말이었다. 그에 더하여 상을 치르는 반가에 찾아가 걸식하는데 줄 것이 없어 개한테 주는 밥을 주었다. 그때 하응이 마치 기아에 허덕인 것처럼 게걸스럽게 그걸 먹었다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상갓집 개’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때 좌근은 하응이 하루아침에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파안대소하였다.

그뿐만 아니었다. 대왕대비전에도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졌다. 가뜩이나 눈엣가시와도 같았던 흥선군의 퇴행에 대왕대비는 웃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의 앙칼진 웃음은 문밖에까지 퍼지고 말았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흥선군이 선왕의 신임을 악용해 날뛰더니 졸지에 상감을 잃고 나니까 실성을 했군요.”

대왕대비의 비웃는 모습에 좌근은 움찔한다.

“마마, 그뿐만이 아니옵니다.”

좌근이 그 뒤를 잇기를,

“박규수는 선왕의 상이 끝나기도 전에 낙향하여 자리를 떴다 합니다.”

박규수가 조정에 사직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웠다. 안동김씨네로서는 꼭 필요한 인재였음에도 불사이군(不事二君)을 이유로 현실에 타협하지 않았음은 두고두고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아비 김조순 생전에는 어느 집단의 소속이냐 아니냐의 문제보다 오직 실력으로서 포용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선진적 문물을 받아들여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하고자 한 사람이었기에 삼십 여 년 동안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진 신하 하나를 눈 씻고 찾아보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조정에 주요 요직은 모두 안동김씨의 손아귀에서 좌지우지되고 있고, 군수(郡守)나 현령(縣令)은 모두 안동김씨의 파수꾼이었다.

그랬기에 흥선군은 주군인 헌종대왕을 여읜 슬픔을 와신상담(臥薪嘗膽)으로서 구걸하는 거지의 행색을 했는지도 모른다.

새 상감이 들어선 직후 대왕대비전은 새로운 바람을 맞이한다. 그 바람은 김조순 때에 태평성대와 맞먹는 격이었다. 이제 대왕대비는 예전의 대왕대비가 아니었다. 선왕이 여덟에 보위에 오르고 난 뒤 시작한 수렴청정 때와는 달리 점차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많이 트였다. 그는 이미 생전에 있는 오라비 김유근의 도움을 받아 국정을 도우며 살아왔고 그로 하여금 정치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정도의 경륜을 쌓기도 했다. 무엇보다 자신도 모르게 쌓은 연륜이 녹아져 있기에 이번 수렴청정은 한결 수월했으리라고 본다.

이번에는 아우 김좌근도 한몫을 챙겼으나, 예전보다는 많이 변했다. 이번 변화는 새로운 세력의 군림으로서가 아닌, 명경대비의 손아래에서 나라가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조선왕조 역사를 통틀어 두 차례 수렴청정 하는 이는 오직 명경대왕대비, 그녀뿐이다. 전무후무한 권력을 그녀에게 준 하늘의 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명경대왕대비는 대비전에 앉아 자리보전만 한 것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오는 상소(上疏)와 백성들의 삶을 적은 장계(狀啓) 등 산적해 있는 민정(民政)을 수습하고자 노력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배우고 보잘 것 없는 한낱 무지한 규수일 뿐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만큼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보잘 것 없는 아녀자가 졸지에 공자의 말을 하는 꼴이 됐습니다 그려. 하하하.”

대왕대비가 다과상을 놓은 앞에서 파안대소하자 신료들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전 영상 정원용 이하 의정부의 대신들은 그런 대왕대비의 말씀이 진실이 아님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 상감이 보위에 올랐다곤 치더라도 실권자는 뭐니 뭐니 해도 대왕대비에게 있으므로 자신이 한순간의 실수로 엇나갔다가는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궂은일은 모두 김좌근과 김흥근이 맡아서 행했다. 이 두 사람이 행한 정치적인 음모로 인해 조대비의 사촌이 되는 조인영이 극변으로 귀양을 가고 말았으니 그렇게 조씨의 세도가 끝나게 되었다.

어느 야심한 시각에 김좌근이 대왕대비전에 찾아왔다. 잡인(雜人)의 출입이 번다하지 않고 내인들 몇 명만 있을 뿐 마냥 분주하지는 않았다. 좌근이 대왕대비가 계신 침전 앞에 당도하니 상궁이

“마마, 영상 대감께서 듭시옵니다.”

하며 아뢴다. 그러자 안에서 기척이 들린다.

“뫼시어라.”

이윽고 문이 열리고 좌근이 분주히 들어서며,

“마마. 희소식이 당도했나이다.”

좌근이 사가에서의 버릇대로 누이에게 대하듯 하는 것이었다.

“무슨 희소식이오?”

무심히 대하는 대왕대비의 냉정하고 쌀쌀 맞은 표정이 역력했지만, 좌근은 아랑곳없이,

“조병현이 사사(賜死)되고, 조인영은 배소(配所)에서 병들어 죽었사옵니다.”

좌근의 보고에 대왕대비는 비로소 화색이 만연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아버지가 베풀어 준 은공(恩功)에 보답하지 못할망정 원수로 대하였다는 것에 크게 분노하였다. 헌종 재위 기간 동안에 상감의 친위세력으로 자처하며 안동김씨에 대한 숙청이 이어져 왔기에 김씨네로서는 큰 실망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랬기에 대왕대비와 영의정 두 사람은 자신들의 분풀이를 대신 하늘이 해준 것에 감사함을 금치 못했다.

특히 조병현은 조대비의 오빠 조병구와는 사촌간이고 대비에게는 오라버니가 되었고, 조인영은 조대비에게 숙부가 되는 분이니 가뜩이나 같은 척신 세력인 대왕대비로서는 눈엣가시가 아닐 수 없었을 터였다.

그래서였을까. 대왕대비의 얼굴에는 엷은 눈웃음과 함께 세파에 절은 연륜으로, 얼룩진 걸걸한 웃음으로 전각이 울리도록 웃는 것이었다. 이제 예전의 대왕대비가 아니었다. 이제 천하를 한손에 움켜 쥔 여걸(女傑)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시 대왕대비의 손아귀에 권력이 넘어간 뒤 뒷방의 어른으로 전락하였다. 상감이 자신에게는 같은 항렬에 있다지만, 나이는 왕대비 자신이 더 위였다. 왕실의 물정을 모르는 새 상감을 불러들여 자신을 외딴 섬에 가두듯 대하는 것도 못마땅하고, 그것도 모자라게 제 친족을 정권의 걸림돌이라는 이유로 유배 보내는 것도 모자라 사사하여 죽이니 실컷 울분이라도 토하고 싶어도 토하기 어렵다. 명실상부할 것 같은 조씨 집안이 풍비박산 나니 독수공방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갑자기 부군을 여읜 대비 홍씨의 얼굴도 보기 매우 어려웠다. 한 사람도 아니고 서너 사람이 겪은 경우라니, 민간에서는 이를 두고 쌍과부(雙寡婦)라고 한다.

과부로 늙어가는 것도 서러운데, 단지 권세를 잠시 움켜쥐었다는 이유로 조씨의 일족을 몰살시키다니 시어머니의 몰인정한 태도가 못마땅하지만 왕대비는 꾹 참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경빈김씨 만큼은 궐에서 나왔다손 치더라도 항상 왕대비에게 꾸준히 문안인사를 드렸다. 그런 효심을 알았던가. 왕대비는 그런 경빈의 마음씨에 감복하여 묵묵히 문안을 받으면서 즐거운 낙으로 삼았다.

경빈은 이제부터 순화궁(順和宮)으로 불려 왕실에서 꾸준히 예우를 다했고 그 덕분으로 왕대비와 대비 홍씨에게 극진히 대접하였는데,

“쇤네는 오직 전하의 승은을 입은 것만으로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마음씨 또한 비단결과도 같아 대왕대비와 왕대비에게는 효도를 다했고, 대비 홍씨와는 동서지간처럼 흉허물 없이 지내는 것이었다.

“순화궁께선 선왕을 모셨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수?”

특유의 재치가 넘치던 발랄한 성품의 홍씨가 묻자,

“사내란 것이 맘만큼은 그저 똑같은 맘인가 봅니다.”

웃으면서 부끄러워하는 경빈의 수줍음에 대비가 까르르 웃었다. 이에 순화궁도 덩달아 대비와 같이 까르르 웃었다. 웃음바다는 마치 향긋한 봄 냄새처럼 따뜻하고 포근했다.

천희연이 운니동 흥선군 집에 곁살이 한 지 어느덧 오 년이 넘었다. 장가는 열일곱에 들어, 슬하에 열 남매를 두었지만 자식을 여덟이나 잃고 두 남매를 키우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한때는 놀음에 빠지기도 하여 마누라의 구박을 받아야 했다. 희연이 심보가 매우 고약하다는 세간에서의 얘기와는 다르게, 그는 흥선군의 눈에 들어 흥선군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기도 했으니 책임도 막중하리라.

그런 희연이가 아침 동틀 동튼 무렵에 집을 나섰다. 그가 어김없이 대감의 부름을 받들고 찾아간 곳은 한적한 별장이었다. 그 별장은 김좌근이 소유한 곳이었다.

그곳에 애첩 월선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가 왜 대감의 명에 따라 이곳을 찾는지 모를 일이다.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아랫것이 천희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어인 일로다 오셨수?"

하며 묻는다.

"우리 흥선군 대감께서 마님께 전해드릴 일이 있다고 전갈을 드리려고 왔소."

아랫것은 썩 내키지 않아 했지만 별채에 있는 월선에게 넌지시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보고했다. 월선은,

"그래?"

희색을 띤 얼굴로 천에게 들어오라고 일렀다. 알고보니 청탁을 하고자 한 명목이었던 것이다. 월선은 뜻밖의 상황에 당황할 법했지만 당연시 여기는 모양새였다. 흥선군의 먼 친척동생(친가든 처가든 모두 민씨 핏줄이지만 그 일가 중 하나다)이 벼슬하고파 한다며 현감이나 수령 감투 하나 달라며 조른다고 하니 감투 하나 얹어줍소사 빌었는데 월선으로서는 마다할 이유도 없는거다.

그래서 흔쾌히 응낙한 월선에게 굽신 절한 뒤 급히 산자락 아래에 있는 어느 민가에 다다라

"이보시오. 이 서방"

하며 희연이 기척을 냈다. 이윽고 안에서

"천 서방이우? 들어오시구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천이 안에 들어가보니 왠걸. 그 안에 이하응이 있었다.

천희연이 월선과 주고 받았던 것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보고했다. 그러자 이하응의 얼굴에서는 피식 웃음이 솟구쳤다. 이제 일을 벌릴 일만 남았다는 표정이었다.

"흐흐, 천 서방 고생 많았수."

이하응이 게걸스레 웃고 청승맞게 천희연을 내보냈다. 그러자 아이 별 말씀을요. 하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갔다.

이렇듯 이하응이 취한 태도는 안동김씨에의 분풀이에 대한 동시에, 자기 생존에 대한 강한 욕구가 만들어낸 연극이었다. 애첩 월선이에게 기대어 권력의 맛에 흠뻑 젖은 김좌근도 김좌근이지만 이하응은 그의 발아래에 놓인 조선의 캄캄한 앞날을 밝히기 위한 힘을 기르고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천희연은 하응에게는 더없는 보물이었다.

월선이에게 찾아간 천희연. 그는 이하응을 대면케 하고 쏜살같이 물러나듯 문밖으로 나갔다. 월선이라는 실세 앞에 마주한 하응. 그는 몸소 낮추듯 하고

“이 누추한 곳에 오셔서 감개무량하외다.”

걸걸대며 하응이 재주 부리듯 접대하자, 월선이가,

“어인 일로 이내 몸을 찾으시었소?”

웃음 띤 모습으로 연유를 묻는다.

“다름이 아니오라 쇤네한테 아들×이―장성한 아들×이 하나 있사온데. 출셋길이 막히고 해서 눈칫밥을 먹고 있습니다요.”

그때 월선이가,

“그러면 댁의 아들이 사서삼경은 떼었다고 그럽디까?”

“네, 그러문입쇼.”

걸걸한 태도로 하응은 수긍하였다. 그때였다.

“나이는 몇이오?”

월선의 입에서 나온 물음에 옳다구나 했던 하응은 열일곱이 되었노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내일모레면 약관이겠군.”

하며 월선은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장차로 월선이 생각했다.

‘만일 남은 자리가 있다고 한다면, 수령, 방백(方伯)인들 안 줄까.’

그러나 이하응의 불확실한 태도가 월선으로서는 거슬리기 한량없었다. 그런 터에 섣불리 그리했다가는 대감의 미움을 살 것이 뻔했다. 그래서,

“자네가 원하는 자리는 어떤 자리시던가?”묻는다. 흥선군은 기회는 이때다 싶어 옳다구나 하며,

“방백이든 수령이든 그저 제 아들× 건사만 해주소사 할 뿐입니다.”

월선에게 굽실한다. 천하의 이하응이 굽신 대는 꼴에 재미났는지 월선의 입은 활짝 핀 꽃과 같이 이를 드러내어 웃는다. 그러고서,

“내 대감께 말씀을 드리지요.”

쾌히 승낙하는 것이다.

박 서방은 월선의 부름을 받고 부랴사랴 기생들이 없는 안채에 자리했다. 후배 기생들의 인사치레를 치른 탓에 기생 신분의 출신 성분을 편견으로 받아들이는 월선의 인상은 찡그려지고 말았다.

박 서방은 월선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집사였다. 그의 임무는 김씨 일가에 반기를 드는 세력의 속속이를 염탐하는 것이었다. 월선은 그의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고 믿는―신뢰를 중요하게 생각한 지 오 년 되었다. 그런 그에게 월선은 중차대한 임무를 맡겼다. 결의에 찬 눈빛으로 가득한 박 서방의 눈빛을 간파한 월선은 쓴웃음을 띠었다. 고지식한 박 서방의 인품도 마음에 들었다. 때문에 성욕에 불만이 쌓일 때는 그와 채우기에 충분했다. 어쨌든 박 서방을 부른 월선은 웃음을 애써 감추며 말한다.

“박 서방.”

하고 부른다.

“네, 마님.”

“내 자네에게 임무를 맡기려 하네.”

“말씀하십시오.”

월선은 다시금 씩씩한 박 서방의 모습에 쓴웃음을 머금는다.

“다름이 아니라 흥선군의 일거수를 감시하시게. 그이가 내게 벼슬을 청탁했는데 조카에게 벼슬을 달라고 하더군. 박 서방이 직접 진위를 알아오시게.”

네 하며 박 서방은 물러갔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오랜 적에 불린 시조를 월선은 흥에 겨워 창을 읊조린다. 이 시는 기생들 사이에서 널리 불리운 노래였다. 기생들의 애환에 우러나오는 자연스런 관행이었다. 흥선군이―날고기는 흥선군이 자신을 찾아와 벼슬을 청탁했다. 자신은 기생이라는 콤플렉스에 벗어나고자 나이든 실력자 김좌근의 첩실로 들어앉은 지 십년이 다 되어 간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하련만 조정의 돌아가는 상황과 김씨의 세도는 언제 어떻게 무너질 지도 모르는 판국인데…… 자신을 업신여길 것만 같았던 흥선군 이하응이 자신에게 굽실하다니 쓴웃음이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속내를 알새도 없이 이하응은 간만에 궐에서 부르심을 받았다. 종실들을 한 자리에 모이도록 하라는 대왕대비전의 부르심이었다.

상감이 새로 섰겠다. 왕실의 어른인 대왕대비가 체면을 세우기 위해 세운 임시방편이었다. 이하응이 관복을 바로 한 뒤 부인 민씨의 마중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상감―아니 선왕인 헌종대왕을 여의고 처음 들어선 대궐. 선왕과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친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져 갔다.

김씨 정권의 뒤에서 막후 실세로 행세하는 월선이와 ‘밀담’을 나눈 이하응. 그가 대궐로 들어섰다. 형인 흥인군 최응(最應)도 같이 있었으나, 형에 대한 관심은 애초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두 형제가 만나기는 십년 이라는 긴 세월이 지나고 처음이었다. 두 형제는 형식상의 안부만 주고받을 뿐. 별 반응이 없었다.

종친부(宗親府)에 소속된 왕족만 백 명을 헤아리나, 이때 대왕대비의 초대에 응대한 왕족이 그에 반인 오십이 채 되지 않았다. 속속 들어오는 왕족들을 눈여겨보며 앉은 대왕대비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며 제조상궁을 불렀다.

“네. 마마.”

“지금 ○○군이 아니 왔는가?”

대왕대비의 하문에

“이하전(李夏銓)이 말씀이오니까?”

되묻는다.

“그렇네.”

“칭병(稱病)하여 오지 않았나이다.”

“그래?”

자신의 성의를 무시한 것처럼 느낀 대왕대비의 눈에서는 노기가 등등했다. 게다가 손주를 앞세워 자신에게 대항하였다는 흥선군이 눈앞에 뜨이자 분노의 눈길은 더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활활 타올랐다.

이때 연회에 왕실의 어른인 대왕대비와, 금상, 그리고 돈령부(敦寧府)의 당상관 이하 신료 두세 명, 그밖에 왕족 서른 명 안짝에 모인 것이 전부였다. 이날 연회에서는 익종대왕이 생전에 대왕대비에게 보여주었던 춘앵무를 비롯해 열 가지 정도의 춤을 추는 기생들의 무대로 시작되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대왕대비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신의 업보(業報)로 자신을 대신해서 죽은 효명세자에 대한 안타까운 정에 못 이겨 흐느껴 울었다. 조용히.

그 옆을 지켜보던 상감은 대왕대비의 냉철한 모습에서 감춰진 내막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이윽고 연회가 수그러질 때 쯤. 대왕대비는 옆에 앉은 상감의 손을 잡으며,

“나는 금일부로 상감을 익종대왕의 양자로 삼고자 합니다.”

폭탄선언과 같은 말에 종친들은 일제히 놀람과 경악으로 어수선해했다. 이는 왕족들에 대한 선전포고임과 동시에 더 이상 왕위를 둘러싼 싸움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노파심(老婆心)에서 비롯된 대왕대비의 확고한 의지였다. 이 말을 들은 이하응은 그제서 저 늙은 아녀자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럼에도 하응은 결코 낙담하지만 않았다. 그 늙은이의 실세와 밀담하여 약속을 받아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내면에는 무시무시한 일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를 법하건만 흥선군은 더욱 의연했다. 조실부모(早失父母)하다시피 살아온 자신의 삶에서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살아온 지모(智謀)가 있기에.

‘어디 두고 보자! 내가 네놈들의 밑바닥을 씹고야 말리라.’

그는 와신상담하는 심정으로 김씨에게 칼을 가는 것이었다.

대왕대비의 의지를 전해들은 종친들은 한밤중에 끝난 연회에서 나서기 무섭게 일제히 꽁무니 감추듯 대궐 밖으로 나섰다. 순간 하응은 자신이 왕족이라는 신분에 얽매인 채 비참하게 죽고 만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자신은 장차 왕위에 오를 수 있었건만 대왕대비와 그 외척인 김좌근 일파의 모함을 받을 위험에 처하게 되면서 차츰 보위에서 멀어지고 말았던 거다. 이 위험을 벗어나려고 월선에게 빌붙어대기까지 하였으니 체면이 구겨저도 여간 구겨진 것이 아닐 거다. 대왕대비의 위엄이 그만큼 컸더란 말인가. 이하응은 치를 떨었다. 분을 추스리지도 못한 채 터덜터덜 제 집으로 걸어갔다.

한편 월선의 지시를 받은 박 서방은 뒤에 은밀히 이하응의 뒤꽁무니를 쫓아갔다. 과연 조카를 빌미로 벼슬 청탁을 하고 있었던가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흥선군이 거짓으로 아뢴 것이 은밀히 발각되었다. 서자지만 맏아들 뻘이 되는 재선이 그 발단이었다. 흥선군은 부인 민씨 몰래 기방 출입을 하였었더랬다. 그래서 애첩이지만 퇴기나 다름 없는 계월향에게 애걸복걸 하는 것이었다. 자기는 차차 나이 들어 외간 남자를 상대하기 힘들고 아들은 단지 서자라는 이유만으로 벼슬길이 막히기까지 하니 답답한 노릇이 아니랴. 하응은 그런 서자 재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대감. 우리 재선이를 꼭 벼슬에 나가게만 해주시어요."

야심한 밤중에 어느 민가에 들려오는 나이 든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러잖아도 내 월선이에게 청탁을 하였네. 월선이가 누군가? 김좌근 대감의 애첩이 아니던가. 그러니 부인. 그만 근심을 털어버리시오. 내 차마 서자라고 입을 올리기 힘들어 내 조카라고 속이고 말하였소."

허무맹랑한 말장난을 한 이하응. 그런 동태를 옳다구나 하고 박 서방은 잽싸게 월선에게 이 일을 고하였다. 그러자 월선은 집이 무너져라 웃음을 터뜨렸다.

"흥선군이 보통내기는 아닌갑소."

월선은 영악한 이하응의 진면모를 보고 웃음기를 멈출 수 없었다. 이때다 싶어 아침이 되어서야 문안 인사 차 김좌근에게 찾아가서 어제 일을 고하니 좌근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게 참말이더냐?"

묻는 것이다.

이 사실은 대왕대비전의 귀에 들어가는 건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초반에 못마땅하게 여겼던 하응의 행동거지가 대왕대비의 마음에는 흡족하였던 모양이다. 엷은 미소를 띠며

"흥선군이 보위에 욕심을 부릴 줄 알았더니. 고작 서자 하나를 조정에 발을 들이게 하려고 청탁을 하였단 말인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좌근이 대왕대비에게 고자질을 하고 난 뒤에 퇴궐하여 사랑에 들어서니 웬 젊은 선비 하나가

"숙부님."

하고 부르는 게 아닌가. 나이 들어가고 노쇠해가는 좌근의 앞에 젊고 건장한 선비는 정중히 인사를 하였다.

"아니, 너, 너는 병지가 아니냐?"

생전에 작은 형의 모습을 빼어 닮은 병지였다.

갑자기 찾아온 조카의 방문에 반갑기는 했지만, 마냥 멍하니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명목상 자기네 집안의 유일한 장손이기도 했지만 좌근으로서는 콤플렉스에 가까운 알 수 없는 상처를 받고 살아온 설움이 맞물려 있어 조카를 가까이 대하기에는 너무 멀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 어머니는 잘 계시구?"

좌근은 조카의 인사를 받은 뒤에 형수의 안부를 대뜸 묻는다. 그러자 병지는 잘 계시다고 하며 자신의 심중에 있는 말을 드러내었다.

"실은 제가 과거에 응시하고자 하여 송구스러움을 무릅쓰고 숙부님을 뵈러 왔습니다."

제법 의젓하게 자신을 대하는 조카를 보고 비로소 자신의 지난날을 되짚어보았다. 아버지 김조순이 세도를 부리고 할 무렵. 자신은 저 나이에 아버지의 음덕을 받다시피하여 조정에 발을 들인 적이 있었더랬다. 보통의 형제들과는 다르게 자신은 어머니로부터 응석받이로 자라왔던 터라 세상의 눈에 어두운 줄 모르고 기방출입을 밤낮할 거 없이 드나들고는 했다. 한번은 서당 공부니 무어니 때려치고 할 무렵에 아버지로부터 큰 꾸지람을 당했다. 회초리를 대령하라는 호통과 함께 자신으로 하여금 종아리를 걷게 하여 회초리를 칠 때 어머니는 그런 막내아들이 안 되었어서 말리고 또 말려보았지만 막무가내로 나가려는 아버지의 의지대로 회초리를 실컷 맞곤 하였다. 아버지의 그늘 아래 도움을 받는 현실. 정작 그 자신은 그것이 싫었다.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직 반항에 얽매인 채 살아온 지난날을 되짚어본 그는 조카의 의젓한 모습을 통해 자신이 조카를 품에 안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아버지와 형님의 죽음으로 자연스레 얻은 권세이건만 조카가 저렇듯 장성하여 자신을 찾아오고 하다니. 좌근은 순간 회한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네, 잘 계십지요."

병지를 살뜰히 대하며 좌근은 사랑으로 안내한다.

사랑에 나란히 들어선 두 사람은 아랫것을 시켜 찻상을 내오도록 하였다. 본래 술을 좋아하는 좌근이건만 조카에게 그런 몰상식한 태도를 보여주기가 싫어 형식을 갖춘 찻상이었다.

찻상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뜨뜻한 차가 담긴 찻잔을 들기가 무섭게

"네가 이렇게 찾아오다니 기쁘기 한량 없구나."

하며 좌근은 조카의 모습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더듬는 것이었다.

"별 말씀을요."

병지도 덩달아서 찻잔을 들며 말했다.

"실은 나도 네 나이 때에 아버님과 어머님을 여의었었다."

좌근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참회하듯 지난날을 되짚고 더듬는 것이었다.

병지를 맞이한 좌근의 마음은 천근만근 불편한 심기였다. 자신의 약점을 움켜쥐는 것 같은 갑갑함이 좌근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병지만한 나이에 철없이 아버지의 바람을 저버리고 자신의 안일함에만 치중하였던 자신을 반성하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라 생각하니 괘씸하고 당장에라도 조카를 나무라는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작은형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보니 나무라고 싶어도 나무라지 못하였다. 만에 하나 자신이 어엿한 어른인데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어 조카를 나무란다면 세상에 웃음거리로 전락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병지가 스스로 자신의 집에 찾아오니 한편으로는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반갑기까지 한 것이다. 좌근의 집은 생각보다 적적하다. 월선의 세도가 하늘을 찌르고, 또 덩달아 자신의 세도도 날로 기울어갈 줄 모르는데 이와는 딴판으로 집은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요한 산골과 같았다.

월선은 참고로 좌근과 살림을 달리하여 따로 집을 마련했기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본처와 문중에서 성화를 내어 얼떨결에 얻어낸 병기(炳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좌근에게 병지는 안부를 물으며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것이다.

"제가 만약 과거에 급제한다면 숙부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참이옵니까?"

조카의 물음에 영문을 모르고 놀라던 좌근은 태연함을 잊지 않고,

"그러는 조카님께서는 어찌할 참이오?"

갑자기 숙부님이 존댓말을 하니 당황스럽기 그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의중을 밝힌다.

"제가 벼슬을 하게 된다면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숙부님과 같은 삶을 살지 않도록 모범을 보일 겁니다."

공연히 질문을 던진 좌근이 조카의 본색을 보고,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던 조카가 자신을 견제할 세력이 될 싹수가 보임을 알고 난 뒤 등뒤에 식은땀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간담이 서늘하다.

'병지가 제 아비를 잃어버리고 나더니 이제는 간이 배밖으로 나왔구나. 이 ×××× 같으니.'

병지를 대하는 자신을 어리석게만 바라보았다. 좌근은 조카에게 놀아나는 자신을 한심스럽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병지는 갑자기 파안대소를 하는 게 아닌가.

"하하하하……"

집이 떠나가라 웃어 제끼는 조카를 좌근은 한심스런 눈초리로

"이×! 네가 웃어른인 나를 하찮게 대하려 드느냐!"

비아냥거리게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런 조카를 한집에 두게 할 수는 없으니 썩 물러가거라, 이×!"

좌근은 푸대접을 하려고 용쓰는 게다. 하지만 병지는 제가 앞장서서 좌근에게 잘못함을 고한 뒤 단 하루만이라도 자신이 머물 수 있도록 허락받고자 하였다. 핏줄은 부정하고 싶어도 당기는 법. 좌근은 마지못해 미우나 고우나 조카이니만큼 악감정을 거두고 조카에게 다른 방으로 안내하여 머물도록 했다.

"누추한 방이다만 우리 조카님이 지나가는 객손이고 하니 너그러이 이해하시게."

웃음기 띤 얼굴로 좌근은 조카 병지에게 한마디하고는 밖을 나섰다. 좌근의 말마따나 누추한 방이기는 했다. 하지만 숙부 좌근이가 아랫것을 시켜서 방바닥을 뜨뜻하게 데우도록 명한 까닭이 있었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방 안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눈앞에는 촛불이 쉽게 꺼질 줄 모르는 기세로 켜져 있어 방을 밝히고 있고, 자기가 앉은 그 앞에는 서안이 놓여 있고 그 위에 이름 모를 서책이 놓여 있었다. 자리 맞은편에는 이불장만이 소박하게 있으며 이불은 이제 갓 사들인 듯 새것으로 놓여 있었다.

병지의 집은 할아버지 조순의 무덤인 경기도 광주 땅 한적한 시골에 있었다. 누추한 살림이지만 어머니는 양반가의 규수였지만 삯바느질로 살림을 근근이 이어나가는 실정이었었다. 아랫것 몇몇은 다른 친척에 보내버리고 두세 사람의 하인들만을 거느린 채 광주 땅으로 서둘러 내려가고 말았다. 그 때문에 병지는 한양 근처에는 얼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거다.

푸대접을 받을 것만 같았던 좌근의 집에 들어선 병지는 방을 나서서 좌근의 집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예전 할아버지 생전에 사시던 집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고품스러움은 여전하였다. 빗질하던 남종 하나가 굽신거리며 도련님에게 인사한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인사를 받은 병지는 시종일관 집들을 휘―둘러보는 걸로 소일을 삼았다.

'아버님, 장차에 제가 벼슬을 하게 된다면 이만한 집인들 못 구하겠습니까. 아버님께 큰 보답을 해드릴 것을 거듭 맹세하옵니다.'

병지의 두 눈에서는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날 밤부터 병지는 밤새도록 촛불을 끄지 않고 자신이 손수 준비해둔 서책으로 차근차근이 과거 공부를 하고 있었다. 문밖에 밝힌 병지의 거처방에 흐뭇한 모습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었다. 바로 좌근이었다.

좌근의 집에 당도하고 이틀도 채 안 돼 숙부 좌근의 집을 나선 병지는 자신의 의지대로 조정에서 치러진 과거에 응시하였다. 자신 있게 과거장에 들어가 자기 자리에 앉은 그는 영의정 김좌근의 음덕에 힘입은 까닭도 있었지만, 오직 자신의 역량으로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과거의 시험장에 빽빽이 들어선 유생들 틈바구니에서 치른 병지는 초지일관 정신을 올곧게 하여 치른 뒤에 당당한 마음으로 과거 시험장을 나섰다. 이후 병지는 곧장 좌근에게 인사를 아뢰지도 않은 채 곧장 광주 땅으로 향하였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에 대사성을 지내는 당조카 김병학(金炳學)이 하인을 불러다가 당숙인 좌근이 계시냐고 묻고 계시다는 대답을 들은 뒤에 사랑에 들어섰다.

"당숙님. 좋은 일이 있어 이리 긴히 찾아왔습니다."

좌근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시시때때로 찾아 드나드는 병학이니만큼 그저 경청만 하는 것이 능사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신가?"

태연히 병학의 대답을 들으려고 하자 홧김에

"병지가 과거에 급제했다 하더이다."

대답해버리자 좌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조카의 말에 놀라며 거듭 물어보았다. 그렇다니까요 하며 병학이 큰웃음을 터뜨리자 좌근은 그제서야 흐뭇한 웃음을 띠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내 조카가 당당한 안동김씨의 자손이어늘. 벼슬인들 못할 손가. 장하시군. 우리 조카님. 유일한 우리 집안의 장손.'

병지의 새로운 길을 빌어주는 좌근이었다.

대행대왕 헌종의 사후에 조정은 거의 김씨의 수중으로 넘어왔다. 대왕대비의 비호 아래 아래로는 수령방백, 위로는 의정부의 삼정승(三政丞)에 이르기까지 김씨의 손길이 뻗치지 않을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과거―대과나 소과―를 거치었다손 치더라도 김씨의 비위에 맞추어야만 조정에 출사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조선이라는 나라는 서서히 어둠으로 짙어져 가기 시작했다. 한때 김조순의 집권 시에 반대파였음에도 삼정승의 반열에 오른 바 있었던 권돈인(權敦仁)이 함경도 극변에서 유배되어 있다가 배소에서 죽고 말았다. 이유인즉슨 상감의 등극에 대한 망언을 대왕대비전에 고하여 공연히 미움을 샀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를 들은 김좌근 세력이 권돈인에게 정배하도록 청하기에 상감이 이를 허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감을 대신하여 행한 수렴청정을 대왕대비가 스스로 거두었다. 일부 대신들이 반발하며 걸고 넘어졌으나

"나이가 더 들어서야 수렴청정을 거둘 까닭이 없으니까 자중하세요. 무지한 아녀자가 언제까지 정사에 관여하겠습니까. 한두 살 갓난아이도 아니고 약관보다 훌쩍 넘은 상감이거늘. 이 늙은 몸으로 나라를 운영하였으니 이만하면 됐습니다."

대신들을 타이르며 대왕대비는 정중히 사양하는 것이었다. 하기는 그랬다. 영조의 계비로서 정조 사후에 정권을 잡아 어린 순조를 앞세워 섭정한 예순대왕대비(睿順大王大妃)가 수렴을 거두다 다시 나선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김조순이 국구로 우뚝 선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고, 그 주위에 김조순을 따르는 신료들이 포진되어 있었기에 마지못해 거두었다지만, 현 시국은 그 누구 하나도 반대하는 이 없고, 김씨의 틈바구니에서 튀면 곧바로 멸문지화 당하는 형국이니 제 앞에 것에만―제 일신에만 얽매어 "예!" 하고 대답만 할 뿐이다.

이러한 나라 사정을 보다 못해 왕족들, 그 중에서도 왕의 후계자로 점철된 왕족들은 제각기 다른 행보를 보였다. 우선 흥선군 이하응은 밖으로 활보할 때 항상 누더기 옷을 입고 김씨와 그에 아부하는 실력가의 집으로 가 걸식을 일삼아 주위의 원성이 자자했다. 하지만 이하응의 속내는 무엇인가 감추어진 진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하응에게 부인 민씨와의 슬하에 네 남매를 두었다. 첫째와 둘째는 딸이고, 셋째와 넷째는 아들인데 그 중 첫째와 둘째는 장성하여 출가하고, 셋째이면서도 맏아들인 이재면은 이제 갓 열 살이고, 막내이며 아들인 명복은 이제 다섯 살로 마당을 휘젓고 뛰놀 수 있는 상태였다. 이것이 그의 참 진실이었다. 자신은 헌종대왕 생존 시에 임금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아 조정의 대소사를 관장할 뿐만 아니라 종친의 한 사람으로서 왕실의 안정에 도모하고자 많은 노력을 해온 자신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이번 행보는 주위 사람들로부터는 당혹을 넘어 불안과 혼란, 그리고 공포로 다가온 것인지도 모른다. 서방―아니 지아비의 갑작스런 돌발행동에 실성했다며 울부짖었던 부인은 이제 그런 서방의 의중을 간파하게 되었다. 그 역시도 무지한 아낙이라지만 서방의 깊은 뜻을 그제야 깨우친 것이 얼마나 큰 다행인지 모른다.

어쨌든 흥선군의 이런 돌발행동에 웃음으로 답한 김씨들 틈바구니 속에서 부인은 그저 서방의 무사하기만을 빌 뿐이었다. 그녀에게는 하나 위안이 있다면 다행한 일이나 조정에서는 한때 금기시하던 서학을 믿는 독실한 신도였다. 천주님을 믿는 독실한 신도였다. 그래서 남몰래 다른 반가의 부인 몇몇을 불러다가 그 교리를 깨우치고 하며 하느님의 섭리를 차츰 알아가기 시작했다. 서방의 돌발행동도 행동이지만 무엇보다 그 속에서 지내야만 하는 아들들에게 풍파 없는 세상이 오기를 고대하는 간절한 마음이 매우 앞선 것이다.

이런 내막이 있기에 이하응은 이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문전걸식을 일삼아왔다. 물론 일부 대신들은 그런 그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김좌근의 양아들인 병기였다. 하루는 병기가 대놓고 흥선군의 미치광이 행위를 두고 욕지거리를 해대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보다 못한 김병학이

"그래 실컷 욕지거리를 하시니 속이 후련하신가?"

비아냥거리는 게 아닌가. 병기는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자네가 하도 문전박대를 일삼고 해대니 그 양반의 심정이 오죽이나 답답하셨을꼬."

하고 병학이 헛기침을 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찾아간 곳은 뜻밖에도 운니동의 흥선군 집이었다. 전날부터 줄기차게 내리치던 빗줄기가 오전에 가서 차츰 가라앉더니 대낮이 되고부터는 날이 개었다. 그 덕에 공기는 상쾌하기 그지없고 조용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그 집 문 앞에 다가가

"계십니까."

하고 기척을 내어 보았다.

"뉘시오?"

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리고

"김병학이올시다."

하고 다시 기척을 내니 안에서 놀란 듯 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아이구, 이 누추한 곳에 어인 일로."

민씨가 반가워하며 맞이하자

"안에 대감 계시오리까?"

미소가 만개한 채로 병학이 대감을 찾는 것이다.

"우리 대감께서는 잠시 출타 중이시기는 합니다만."

하고 민씨가 서 서방을 찾는다. 서 서방은 이하응의 집에서 잠시 심부름꾼으로 부리는 사람이었다.

"네, 마님."

서 서방을 부른 민씨는 대감을 뫼시고 오라고 재촉하였다. 이윽고 서 서방이 들입다 밖으로 나가자 민씨는 대감이 머무시는 방으로 안내한다. 안내받은 김병학은 집을 휘―둘러보았다. 집안 규모는 여느 왕족들의 집과는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흥선군이 자신의 재산들을 오직 자신의 기행으로 일삼아 가며 탕진하듯 쓴 바람에 일전에 있던 몸종들은 하나둘 나가떨어지고 지금은 사분의 일에 차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처지가 딱해 김병학은 은밀히 흥선군 이하응의 집을 마치 제집인 것처럼 수시로 드나들었던 거다. 드나들면서 남몰래 흥선군 부인에게 엽전도 몇 푼 쥐여 주고 집안 아이들에게는 다정한 삼촌처럼 대하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병학의 동생 되는 김병국(金炳國) 또한 성정이 따뜻하기에 흥선군 일가에게 솔선수범(率先垂範)으로 자신에게 있는 재산의 일부를 하응의 일가에게 주기도 한 것이다. 그런 형제의 마음을 민씨를 비롯해 그 부군 되는 하응도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지만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대왕대비는 수렴청정을 거두어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상감에게 단 한명의 왕자를 생산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되었다. 지밀상궁에게 가서 중궁과 숙의(淑儀)의 처소에서 회임 소식을 듣지 않느냐고 묻는 통에 궁녀들은 모두들 쉬쉬하고 있었다. 명색이 어미라는 사람이 취할 태도는 아니나, 왕자를 보고 한다면 한 나라의 왕조가 명맥을 잇는 중한 일이고 보니 다급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중궁 김씨가 회임하지 못하자 다급해진 대왕대비는 아우 좌근과 흥근을 시켜 새로 후궁을 간택하도록 명하였는데, 이이가 범씨(范氏)라는 여인이었다. 한낱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대왕대비전에서 그녀를 눈여겨보아, 예전에 미천한 시절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지 않나 싶어 동무 삼아서 궐에 들었다. 이것은 대왕대비가 시켜서 진행된 일이었고, 이때도 상감은 그분의 의지에 따라 행하였다. 자신은 입이 있으나 열 개의 말조차 변변하게 못하는 가련한 처지였다. 그런 상감이 있기에 후궁 범씨는 이를 간파하여 야심한 밤에 상감의 승은을 빌미로 자신의 미천한 신분과 상감의 아픈 가슴을 어루만지겠노라고 하자, 이에 가뜩이나 근심에 얼룩진 상감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성공하여 내명부에 일러 ‘숙의’라는 직책을 주어 대궐에서 살게 하니, 상감의 무한한 승은을 입어 잘 살았다. 그런데도 후사가 없으니 대왕대비는 속이 타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맹꽁이 같은 상감의 의중도 의중이지만 만일 상감이 후사를 두지 않는다면 왕실은 물론이고 한 나라의 맥이 끊기고 만다. 이 지경에 닿으니 대왕대비로서는 열성조를 대하기가 매우 거북하고 겁이 나는 것이다.

한편 전권을 시어머니에게서 빼앗기다시피 한 조씨는 자신의 일가붙이들을 모두 죽인 안동김씨네에게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눈 밖에 나서 대궐에서 쫓겨난다면 그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끝끝내 인내의 세월을 지내는 것이다.

또, 보통의 일 같으면 일가족을 몰락시켜 버렸을 것을 시어머니는 당사자에게만 죽음을 내리고, 그 자손에게 살길을 열어주게 하셨으니, 왕대비 조씨로서는 곧이 절치부심(切齒腐心)하게 김씨의 몰락을 고대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런 그에게 한 차례 사건이 터진다. 상감의 승은을 입은 숙의 범씨가 아기씨를 생산한 것이다. 그러나 왕실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으니 왕실의 불행의 씨앗이 여기서 뿌려졌다. 더구나 옹주마마였기에, 간신히 얻은 귀한 아기씨였기에 상감의 깊은 상심은 하해를 아우르고도 넘침이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대왕대비는 어느 날 문안인사를 드리러 온 왕대비에게 푸념조로,

“이게 다 내 탓이로다. 내 탓이오.”

하소연하였다. 그러자 왕대비가,

“어마마마 탓이라니요. 당치 않사옵니다.”

시어머니를 다독거렸으나, 예전의 대왕대비가 아니었다. 한때는 헌종대왕과 상감을 연이어서 수렴청정을 행하여 놓고서 이제는 복에 겨워서 며느리에게 푸념하다니. 속으로 왕대비는 그예 노망드셨구먼. 하였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한 조씨였다. 만약 입 밖으로 나오면, 수많은 궁녀들이 듣고 입을 나불거려 밖으로는 김좌근 일파가 눈치라도 채어 아는 날에는 조씨 일가에게 더 큰 회오리바람으로 몰살시키려 들 것이기에 묵묵히 듣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하응의 청탁을 받은 월선이 어떻게 되었나? 월선이에게 탄로 날 것을 일찍 간파한 그였기에 자신의 아들 재선이를 대신해 자신의 맏조카 재원(載元)을 벼슬길에 있도록 하였다.

기실은 이랬다. 흥선군이 천하장안 네 사람을 거느리어 판을 벌리는 가운데 월선의 집사가 나타남을 직감하여 여보란 듯 조카 대신 아들을 벼슬에 청탁하겠노라고 지나가는 소리로 공안한 건데, 집사 박 서방이 곧이듣고 월선에게 고자질한 것이다. 다음날로 아무 일 없이 월선에게로 하응이 찾아오자 월선은 그런 이하응의 행동거지가 못마땅하여

“왜 거짓말했는?”

하고 물었다. 그런데 무슨 말이냐고 의아하게 하응이 맞받아치며

“잘못 듣지 않았습니까. 이건 아마도 쇤네의 목소리하고 닮은 작자가 있사온데 그 자가 제 흉내를 낸 모양입지요.”

그러나 월선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를 모를 리 없는 이하응이었다. 연신 땅바닥으로 통곡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자, 월선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하응의 소원을 이루어주었다. 그리하여 하응의 장조카 이재원이 직부전시(直赴殿試)하여 조정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하응에게는 회생할 수 있는 첫 기회였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이하응이다. 막내로 태어났지만 먼 미래를 바라보는 천리안(千里眼)을 가지고 장차 자신이 권력을 움켜쥘 수 있는 그날을 고대(苦待)하였다. 그런 그에게 왕실의 소식은 너무나도 갑작스레 찾아온 천재일우(千載一遇)에 가까운 소식이었다. 바로 상감의 유일한 혈육인 옹주의 급작스러운 하세 소식이었다. 더구나 왕자 아기씨가 아니니 다행이기는 했으나 안동김씨네들의 속내를 깊이 알 수 없으니 난감한 노릇이었다. 만에 하나 후사를 두지 못한다면 안동김씨들은 전국 방방곡곡 샅샅이 뒤져가면서 새로운 왕족을 찾아다니기 분주할 터이고 그리되면 왕실은 물론이고 나라 역시 안동김씨의 손아귀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더 깊은 탁류(濁流)에 휩쓸릴 지도 모른다. 탁류 속으로! 순간 하응의 눈은 불안에 얼룩지고 말았다.

과연 하응의 예지(銳智)는 맞아떨어졌다. 대왕대비가 후사에 대한 근심과 자신의 늙어감에 맞물려 병들어 눕고야 말았다. 대왕대비전에 들어선 어의가 왕실 여인네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진맥을 하였는데 고개를 가로 젓더니

“마마께오서는 소생하기 어려울 거 같사옵니다.”

하고 바로 아뢴다. 그러자 왕대비는 물론이고, 대비 홍씨와 왕비 김씨는 옷소매를 훔치며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에 급급하였다. 어떤 이는 애증의 관계로, 어떤 이는 왕실의 큰 어른을 잃는다는 슬픔으로 제각기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어의가 황급히 물러나는 틈을 타 상감은 대왕대비의 병환을 지켜보러 왔다. 마마의 위중함을 들은 터라 경황이 없었다.

“어마마마.”

힘겹게 뱉은 임금의 말이었다.

대왕대비는 병환에 힘든 몸임에도 상감이 왔음을 알고 그제야 그 손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상감이 없었더라면 언제 어떻게 변할지 생각만 하면 앞이 캄캄해져왔다. 그렇기에 자신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다스리는 지금이 더욱 낯설게도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누려보지 못한 권세를 대신하여 누릴 수 있게 되다니. 꿈일지도 생시일지도 모르는 이 현실. 이 현실을 두고 자신은 눈을 감아야 한다. 하지만 마치 한낱 미완성으로 끝나는 것과 같은 헛헛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후계자 문제였다. 자기가 죽기 전에 후계자를 세우고 가야만 하건만 그건 자신의 힘으로는, 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다. 그렇다고 왕대비에게 섣불리 맡기다가는 자신의 뜻대로 다 할 수 없을 거 같다. 하기야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사람의 깊은 속을 모른다는데, 어떻게 며느리에게 후사를 맡기고 갈까. 앞이 캄캄해짐을 느낀다. 자신이 죽고 나면 상감에 버금가는 왕실의 후계자들이 눈에 환히 보이도록 왕좌를 두고 덤비지 않는가. 대왕대비는 곰곰이 생각해보고 생각해본다. 우선 이하응 형제를 떠올려본다. 그런데 형제 중 유독 이하응이만은 워낙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나대는 통에 왕위에 설사 올라간다손 치더라도 안동김씨들에게는 오히려 골칫덩어리로 취급되어 왕좌와는 거리가 꽤 멀 것이다. 다음에 이하전이 있다. 이하전은 제법 총명하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왕실과는 방계(傍系)에 지나지 않으니 설령 순조대왕의 양자로 입적될 뻔 했다손 치더라도 대왕대비의 눈에는 성에 차지 않을 존재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대왕대비는 점차로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옴을 몸소 느끼게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내 손으로, 내 손으로 후계자를 지명해야한다. 아니 된다!’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치며 대왕대비는 싸움을 벌인다. 숨을 헐떡거리는 대왕대비의 곁에 때마침 왕대비가 있었다. 고부(姑婦) 사이에 있는 두 사람이지만 한때는 경쟁자였고 한때는 쌍과부로서 같은 아픔을 나눈 동지나 다름없게 살기도 했었다. 그랬기에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 처지에 있건만 대왕대비는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치며

“대, 대비……”

다급하게 조대비를 불러댔다.

대비 조씨는 시어머니 곁에 차츰 다가왔다. 시어머니는

“이, 이하응을 조 조심하시구려!”

하였다. 조대비는 무슨 내막인지 모른 채 그저 듣기만 하고 이를 알 리 없는 대왕대비는

“이하응은, 이하응은 본시 기 깊이를 알지 못하는 위인이오. 어떨 땐 원한을 가진 듯 하고 어떤 때는 변화무쌍하게 사람을 묘하게 교활하게 처세를 잘하는 모양이오. 그 와중에 미치광이로도 지내는 모양이던데 그 미치광이는 참인지도 아닌지도 모르겠소. 한데 요 근래에 와서 보니 하 하응이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단 말이오.”

숨을 헐떡이며 뇌는 것이다. 어떻게 맞아떨어졌는지 먼 훗날 이하응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움켜쥐어 안동김씨 세력을 혁파하는데 일조하고, 안동김씨의 손아귀에 의해 신음하다시피 한 조선을 중흥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인 혁혁한 공로를 지닌 그였건만, 자신의 무소불위에 지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권세에 못 벗어나 권력욕(權力慾)에만 집착하게 되는 인상을 드러내게 되니 명경대왕대비의 예언은 적중한 셈이었다.

“그 그러니 대비, 대비께서는 하응이에게만은 보위를 물려주지 않으셔야 합니다. 아시겠소. 대비?”

횡설수설하는 대왕대비의 명에 그저 왕대비는 네 하고 대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상감.”

속삭이듯 대왕대비는 상감을 불렀다.

“상감.”

“네 마마.”

울음 섞인 채 상감이 대답한다.

“상감은 이 나라의 지존이시오. 그러니 지존답게 온 금수강산을 잘 다스리시어야 합니다. 상감, 상감은 스스로 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으십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는데.”

“마마, 말씀하소서.”

“후 후사를, 후사를 이으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왕실이 삽니다. 하루 속히 후사 후사를 두셔야 합니다. 상감.”

이제 대왕대비의 운명은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다.

“상감, 부디 이 어미의 말을 들으시오.”

“……네 마마.”

상감의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상감…… 부디 이 나라를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하루 속히 후사를 두시어 강건한 군주가 되시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상감……”

대왕대비는 이 말을 남기고 창덕궁 양심합(養心閤)에서 예순여덟을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훗날 그녀를 순원왕후(純元王后)라 불리니 상감이 내린 시호이기도 하다. 대왕대비의 하세를 계기로 안동김씨는 위기를 맞이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야 말았다.

자신들에게 있어 유일한 버팀목인 대왕대비가 하세하자 김씨 일족은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사건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올 것이고 이후에 상감이 후사를 생산 못하고 승하하는 날에는 자신들의 목숨이 추풍낙엽처럼 되어버리기에 현 시국에서 만큼은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터에 한때 현 상감 자리에 보위에 오를 뻔했던 이하전이 자신들의 지인들과 나눈 사담(私談)이 화근이 되었다.

“차라리 잘 죽었군. 대왕대비가 염라대왕(閻羅大王)을 만나는 건 시간문젤세. 지금 상감이 누구든가. 강화도에서 밭이나 갈아야 할 촌부(村夫)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어째서 보위에 오를 수 있나. 사촌이 땅 사면 배가 아프다던데 내가 그 짝일세. 그랴.”

파안대소하며 하전이 말을 잇는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던가. 내가 물러가면서 비워둔 자리가 아닌가. 그 자리는 따 논 당상이었건만. 야속도 하지, 하늘두 야속하지.”

제 벗이 이하전이라는 왕족임을 알고 있는 지인이었다지만 왕족들의 일거수일투족. 한 치의 잘못만 해도 역모로 몰림을 모를 리 없는 지인들이 입을 틀어막기도 했다. 그러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에는 쥐가 듣는다던가. 사건이―사건의 전말이― 조정에까지 들렸다. 가뜩이나 대행대비(大行大妃)가 하세하여 국정을 다스리기 어려운 때에 불난 집 부채질한 왕족 하나가 괘씸하기 그지없던 조정대신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유배를 가야 한다, 군문(軍門) 앞에서 효수해야 한다, 왕족이 어찌 그리 끔찍하게 도륙이 되느냐. 말이 많았으나 영상 김좌근은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킬 뿐. 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그때 설왕설래하던 신료들을 다독이며 정원용이,

“영상 대감.”

좌근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러나 김좌근은 요지부동이었다. 조정의 좌장이라는 이가 아무 반응이 없으니 주위의 대신들은 김씨 세도의 앞잡이 노릇만을 일삼았으니 김좌근의 입이 떨어지는 것이라면 열길 불속으로 뛰어들 기세였다.

“영상 대감.”

속삭이듯 다시 정원용이 물어보아도 소용이 없자 보다 못한 심의면(沈宜冕)이

“하옥 대감!”

하며 소리쳐대었다. 그러자 좌근이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었다.

“무슨 허깨비라두 보셨소?”

한심하다는 눈으로 심의면이 절레절레 거리며 쯧쯧쯧…… 혀를 차대기 시작했다.

“무,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소?”

좌근이 짐짓 모른 체하자 이경재(李景在)가 나섰다.

“이하전이 문제로 의논하였습니다.”

“이하전이?”

“네.”

“이하전이가 왜?”

“대왕대비전에,”

순간 정원용이 낚아채듯 고하였다.

“이하전이 시정잡배들 앞에서 황공합게도 대왕대비의 하세를 두고 험담을 늘어놓고는 자기가 아니었음 나라를 잘 다스렸을 텐데, 한낱 촌부인 상감이 대신 보위에 올라가니 원통하고 분해하며 대왕대비가 염라대왕의 곁에 가게 되었다 하며 가소로워 하더랍니다.”

“뭐요?”

영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부르르 몸을 떤다.

“감히 한낱 왕족 주제에 감히 대왕대비마마를 욕하다니. 이는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오.”

대왕대비의 뒷배를 등에 업어 누려온 권력이건만 쉽사리 내릴 줄 모르던 김좌근이었다. 대행대비가 사라진 지금. 권력의 빠져나오기 힘든 맛을 느낀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게 아무도―아무것도― 없다. 상감도 어찌하지 못하는 권력을 움켜쥔 하옥은 이제 자신들―김씨네들을 업신여기며 도전장을 던진 이하전의 오만방자함을 응징할 때가 옴을 알고, 가슴에 품은 칼을 드러내었다. 이제 노구의 몸일 수가 없었다. 노망이랄 수가 없었다. 자신들의 권력에 도전장을 던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확신이 한 노구의 온몸에 불구덩이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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