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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쇄연명소(玉碎聯名疏)
- 신묘년, 2011('620), 12번째 기사
12월 6일에 대구부사 임랑이 소두(疏頭)가 되어 연명소를 올렸는데, 상소문의 찬자(撰者)는 생원 박민승이었으며, 선공감제거 이운, 군자감제검 이수현, 생원 박민승, 경상감영 이방 묵세휘, 경기감영 이방 황보덕이 각각 연명하였다. 시기적으로 보면 전날에 임금이 평정에 불복하는 김관을 엄히 꾸짖은 일이 발단이었으나 내용을 살펴보면 그 이전부터 임금에게 쌓였던 불만이 극렬하게 터져 나온 것이었다. 소의 내용에 이르기를,
“오늘 전하께서 또 한 명의 구신(舊臣)을 겁박하고 내쫓으셨습니다. 이제 조정이 텅 비고 전하께서 홀로 계시니 그야말로 고립무원(孤立無援)입니다. 천명(天命)이 떠나가고 천자가 필부가 되었으니 조정이 더는 조정이 아닙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군왕에게 있으니 신 등은 감히 전하께 함께 죽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지금 백성을 위하여 아름답게 옥쇄하시면 지금까지의 실덕이 있더라도 이름은 아름답게 청사(靑史)에 보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의 보령이 이미 높으시고 대군들의 나이가 적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선위(禪位)하셔도 아무것도 문제 될 것이 없으니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신 등이 생각할 때 전하의 죄목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전하께서는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으셨습니다. 일찍이 여러 신하가 아뢰었으나 전하께서 신하들의 말을 듣고 뜻을 굽힌 적이 있으십니까. 전하께서 신하들의 무능을 꾸짖으시며 여러 정책을 시행하게 하였지만, 신하들의 중지를 모은 것이 모두 전하의 말 한마디에 무상해질 뿐이니, 신하들은 할 말을 하지 않으며 사대부(士大夫)가 아니라 유사(有司)가 되었습니다. 세제상정도감은 전하께서 만들라 하셨지만 유사단이 마음대로 세율을 정하고 조정이 되지 않는 바람에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는 아문이 되었고 관원들의 업무량만 증가시켰습니다. 경연은 전하께서 원하시는 방향이 아니라는 이유로 한순간에 중단되었고 배식단과 독립유공자 향사는 예조에서 모든 준비를 마쳤으나 전하의 한마디로 사라졌습니다. 실록청을 설치하자는 여러 신하의 간언도 한마디로 물리치셨습니다.
둘째, 전하께서는 구신들을 홀대하고 겁박하셨습니다. 전하께서 보위에 오르시고 쫓겨난 신하가 몇이며 환멸을 느껴 스스로 물러난 신하가 몇입니까. 양지원, 박연, 박현철, 한유찬 등 당상만 해도 여러 명이며, 통훈 이하의 신하들까지 합하면 이미 열 손가락이 넘어갑니다. 금번 김관의 일도 전하께서 친히 겁박하시니 백성들이 모두 비답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채 김관이 물러나면 그 나머지 일은 누가 수습할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고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하를 겁박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없다고 하실 수 있겠습니까.
셋째, 전하께서는 나라를 덕이 아닌 위엄으로만 다스리려 하십니다. 전하께서는 항상 법으로 다스리려 하시지만 실은 형벌만 있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대전(大典)을 존중하십니까. 대전을 존중하신다면 왜 대전에 규정된 된 것을 가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지난날 정석학당을 서원으로 승격하려는 논의가 있었고, 모든 요건이 갖추어졌으나 전하의 미심쩍은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무산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단지 위엄으로 다스리려 하십니다. 그러나 덕이 없는 위엄은 겁박과 다름없을 뿐입니다.
신 등이 실로 망극한 언사를 하는 이유는 그만큼 사직이 위태롭기 때문입니다. 이미 천명이 떠났기 때문에 점점 국가가 쇠락해지고 사직이 위태로운 것입니다.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마음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선위하시면 신 등은 따라 죽어 저승에서라도 전하를 모실 것입니다. 신 등은 설령 전하의 역적이 될지언정, 사직의 역적은 되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걸주(桀紂)는 천명을 모르고 왕위를 고집하다가 결국 필부만도 못한 처지가 되었고, 당현종과 송휘종은 선위하였으나 때가 이미 늦었기에 상황(上皇)으로서 차마 못 견딜 일을 겪었습니다. 작금의 현실이 당현종과 송휘종 때만큼은 아니나 시기는 늦을 만큼 늦었으니 서두르셔야 할 일입니다. 선위하시고 옥쇄하시면 이름은 요순과 같이 청사에 아름답게 남지 않겠습니까. 열성조께서 지키신 육백 년 사직을 아름답게 보존하여 부디 만백성에 이롭게 하시옵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과인이 불민하고 부덕한 것을 모르지 않으나, 천명, 필부, 선위, 옥쇄 등 상소에 담은 문구가 극한에 달하였다. 부모의 바르지 못한 행동을 고치기 위해 참담한 말로 다그치면서 본의를 알아 달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그것을 본조가 내세우는 유교적 강상(綱常)에 비추어 보면 어떠한가. 정상적인 행동을 한 후에야 정상적인 반응을 기대할 수 있는 법이다.
논란을 내용에 국한하더라도, 첫 문장에서 과인이 구신을 내쫓았다고 하는데, 조정에 봉직한 지 오래되거나 지위가 어느 정도에 이르면 차마 할 수 없는 행동을 하더라도 모두 용납해야 하고 징계 사유가 발생해도 덮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인가. 조정에서 민국의 죄를 논할 때 가장 많이 다루는 것이 소위 사회 지도층에 대한 것인데, 조정 안에서의 필벌도 엉성하게 하면서 무슨 민국의 일을 논하겠는가. 아무런 실책이 없었는데도 무작정 처벌한 적이 과연 있었는가. 과거 전례나 하급 관원의 징계와 수위와 견주어 보면 어떠하였는가. 본인에게 관계되는 것은 크게 기억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라지만, 각 대상자가 자초한 것은 생각하지 않거나 애써 무시하고 결과만을 말하니, 신분이 오를수록 피부가 얇아져 추위를 느끼는 격이다.
상정도감이 어떻게 개설되었는지 그 내역을 소상하게 기억하는가. 배식단과 독립유공자 향사와 관련한 조정 공론이 있었는가, 아니면 한두 관원에 의해 좌우되었는가. 또 경연에 참여하는 관원들의 자세는 어떠하였는가. 무엇을 위한 논의인지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지 않았던가. 소요한 시간과 노력이 아깝다고 해서 대충 완결하는 것이 국가에서 행할 바인가. 이러한 사업조차 지지부진한데 다시 몇몇 관원이 원한다고 하여 새로운 사업을 일으키겠는가. 처음 주장을 이끌었던 관원은 그저 자리에서 물러나면 그뿐이고, 책임과 비판이 향하는 곳은 대체로 일정하다. 각 사안에 대해 처분한 명분이 뚜렷하니, 지금이라도 하나하나 그 추이를 찾아 자세하게 읽어 본다면 고심과 고뇌를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전에서는 오직 전교와 비답으로 요지를 밝혀 명시하는 것에 그치는데, 여항(閭巷)에서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확대 재생산을 하고, 혹은 선동하거나 인정에 이끌리는 경우도 있으니 이것은 본래 어찌하기 어려운 바이지만, 최소한의 지켜야 할 선을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과연 어떻다고 하겠는가.
주위의 작은 지적에도 평생을 갚아야 할 치욕을 입은 것처럼 처신하면서, 그럴듯한 말로 치장하지만 합심하여 맹렬히 공격하기를 거리낌 없이 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신망 얻는 것을 위주로 행동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거나 징계라도 받게 되면 그 원인이나 이유는 생각하지 않고 모든 비난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행동인가. 스스로는 도발과 조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서 요구하는 것은 태산과 같고, 뜻한 바가 좌절되면 그 원인과 비난을 결정자에게 미루는 경우가 적지 않다. 역지사지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고, 설령 그 처지를 바꿔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 경험하기 전까지는 십분지일이나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와 같은 극렬한 행동에 대하여는 녹봉 반납 및 벽서 행위에 관한 처분 등 참고할 만한 전례가 있다. 다시 며칠 동안의 시간을 두고, 상소에 참여한 인사들의 이후 행적을 참작하여 처분을 내리도록 하겠다. 아울러, 상소문을 작성하지 않은 자가 소두(疏頭)가 되는 것을 금지한다. 창국 이래 없던 일이고, 이와 같은 것을 허락하면 관원의 차자(箚子)와 유생의 상소를 구분할 이유도, 승정원에서 상소문을 봉입하게 할 이유도 없다.”
하였다. 8일에 임랑 등이 재차 연명소를 올렸는데 소의 제목이 한말(韓末) 병자년(1876)에 충경공 최익현(崔益鉉)이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체결을 반대하기 위해 올렸던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를 본뜬 듯하였다. 임랑 등이 궐 앞에 도끼를 지고 꿇어앉아 죽기를 청하는 각오로 재차 그들의 목소리를 아뢰었으나 소는 봉입되지 않았다.
임금이 승정원의 상소 봉입을 중지시킨 뒤, 연명소에 관한 처분을 고심하다가 17일에 마침내 전교하기를,
“연명소에 관하여 처분한다. 이번 처분을 두고 한 편에서 또다시 신하들을 내쳤다는 오해와 억측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어찌할 수 없다. 그러한 상소에 연명하고서도 평상시처럼 행동하니, 이것 역시 자초한 것이다. 소두는 삭출(削黜)하고 그 이하는 전원 파직하라. 서용을 금지한다. 이조와 병조는 결원을 인선하고 승정원은 상소 봉입을 재개하되, 이번 사태에 관계된 상소는 금령(禁令)에 포함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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